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68화 (14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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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68

    전용기 두 대가 한 시간 간격으로 북경수도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 두 대의 전용기에 탑승한 인물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확연히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경환과 린다는 단지 중국정부의 하급관리들의 형식적인 환영만 받았을 뿐, 기자한명 볼 수 없었다. 일본과 한국과는 달리 썰렁한 분위기를 실감하며 준비된 리무진에 올라 조양구에 위치한 하이얏트호텔로 향했다.

    “회장님, 중국의 관심이 온통 빌 게이츠에게 쏠리고 있는 거 같습니다.”

    “각오를 하고 온 방문인데 린다는 너무 큰 기대를 했나 보네요. 이틀 정도 푹 쉰다고 가볍게 생각하자고요.”

    확연히 차이나는 중국의 반응을 담담히 넘기는 경환과는 달리 린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빌 게이츠의 방문을 신문 일면에 실을 만큼 중국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SHJ에 대한 기사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중국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 비해 SHJ의 중국투자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고 SHJ퀄컴과의 로열티계약과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판매가 꾸준히 증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실질적인 투자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니 형식적이나마 SHJ를 초청한 중국정부는, 이 기회에 SHJ를 길들여 보겠다는 의도를 보이는 것이란 걸 경환은 알고 있었다. MS역시 부동산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투자를 하는 기업은 아니었지만, SHJ와 맞물려 중국정부의 뜨거운 환영을 받고 있었다.

    경환은 중국시장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중국정부가 짜놓은 각본에 춤춰줄 생각은 없었다. 호텔에 도착한 경환은 어윈과 에릭의 환영을 받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두 분 고생하셨습니다. 잠깐 휴식을 취한 뒤에 경과를 보고 받겠습니다.”

    간단히 샤워를 한 경환은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틀었다. 방금 도착을 했는지 티비엔 빌 게이츠의 모습과 함께 빌을 취재하기 위해 공항을 가득 메운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영이 되고 있었다. 화면으로 중국 정보통신부 부장인 우지추완이 빌과 반갑게 악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경환은 기지개를 한번 피고는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의 심장부에 위치한 중남해는 중국의 모든 정책과 미래의 청사진이 그려지는 비밀스러운 공간이기도 했다. 작년부터 중국의 국무원의 수장으로 임명된 주룽지 총리의 집무실엔 MSS(국가안전부) 제 6국 국장인 쉬바이성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대외첩보를 담당하는 MSS에서 6국은 과학기술 정보 수집 및 통신공작을 담당하는 부서로 이번 MS와 SHJ 방중과 관련해 가장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부서였다.

    “쉬 국장, SHJ 회장은 뭘 하고 있습니까?”

    “하이얏트호텔 프레지덴셜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총리.”

    부패척결을 외치며 수많은 암살 위협 속에서도 군대와 경찰조직이 영리기업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각 지역의 썩은 관료를 쳐 내는 과정에서 인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주룽지도 해외기업인들에 대한 도청과 미행에는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아직 열악한 중국의 기술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산업스파이를 이용해 해외 기업의 기술을 빼돌리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HJ는 CDMA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업체보다 한발 앞서는 휴대폰 제조기술까지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에 서둘러 진출하는 다른 기업과는 달리 SHJ는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투자 유치 제안에도 시큰둥한 반응만 보여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주룽지는 SHJ와 일본, 한국과의 회담내용에 대한 첩보보고서를 덮으며 쉬바이성을 바라보았다.

    “이경환 회장의 반응은 보고가 되었나요?”

    “MS에 비해 푸대접을 받았다는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이경환 회장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불만을 표출하는 직원들에게 휴식을 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잠시 후 회의를 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회의내용은 따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쉬바이성의 보고를 받은 주룽지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다 사라졌다. 노골적인 푸대접에도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큰 것을 얻기 위해 중국을 자극하기 않겠다는 의지, 혹은 중국이란 나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었고 그동안의 SHJ의 행동으로 보자면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도발을 통해 SHJ의 조급증을 유발하려던 계획이 쉽게 풀려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주룽지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들었다.

    “흠, 이경환 회장이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겠군요.”

    “그렇습니다. 총리. 91년도 이경환 회장이 교통부와 경무부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결과물을 생각해 본다면 결코 쉬운 인물은 아닙니다.”

    91년 당시만 해도 경환의 제안은 관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경환의 제안서는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지금은 교통부와 경무부에 들어오는 신입관료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할 정도였다. 주룽지 자신도 시대를 앞서가는 경환의 제안서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회에 아시아본사는 힘들더라도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생산시설은 반드시 유치할 생각으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 놓은 것이었다.

    “이 회장이 중국을 너무 잘 안다는 게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겠군요. 밀착 감시는 하고 있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모든 조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경환 회장의 동선은 24시간 모니터링 하고 있습니다.”

    수백 개의 눈이 경환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빠져나갈 구멍조차도 막아버렸다. 북경이 아무리 큰 도시라고 하더라도 경환을 타깃으로 정한 이상 경환의 일거수일투족은 자신의 손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총리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경환 회장이 중국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게 맘에 걸리는데 계획대로 진행을 해도 되겠습니까?”

    “배부른 놈은 진수성찬도 마다하게 됩니다. 우선은 SHJ가 심한 허기를 느끼게 만들 필요도 있어요. 바로 진행하세요.”

    주룽지는 경무부 부장인 왕샹첸과 화동의 장성궈를 손본다면 경환의 약점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그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무리 부패를 척결하며 사신으로 인민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하더라도 건드리지 못하는 부분은 분명 있었다. 두 사람을 쳐내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주룽지는 입맛을 다시며 급히 주선된 빌 게이츠와의 만남을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 게이츠는 우리의 서포터 역할로 중국을 방문한 게 아닙니까? 중국방송만 봐서는 우리의 존재감은 전혀 없네요.”

    방송으로 빌 게이츠가 주룽지의 초대를 받아 두 사람이 회담을 하는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고 중국정부의 푸대접에 어윈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관련 부서인 정보통신부나 경무부 어느 곳에서도 일정에 대한 문의를 해 오는 곳이 없었고 주룽지 총리와의 면담도 성사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다. 중국에 진출하지 않은 SHJ에 대한 무언의 항의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쓴다면 중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봅니다. 중국기업과의 합작은 어디까지 성사가 되었습니까?”

    “그게 좀 이상합니다. CHINA UNICOM을 비롯해서 많은 기업들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론은 똑 같았습니다.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생산 공장을 합작으로 건설하자는 내용입니다.”

    SHJ와 CHINA UNICOM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CDMA의 테스트기간을 거쳐 금년 말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SHJ는 로열티 계약 시 확보한 장비공급을 오성전자에 발주함으로써 CHINA UNICOM의 사업개시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와중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자는 제안은 외부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고 경환은 생각했다.

    “조건은 어떻습니까? 50대 50 입니까? 51대 49입니까?”

    “토지와 비준, 인허가를 중방이 담당하고 건설비의 20%를 제공하는 선에서 51대 49로 하자는 제안입니다.”

    경환이 예상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의 제안이었다. 중국은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이기에 기껏해야 30년 정도의 토지사용을 비준을 내어 주고 지분의 49%를 요청하는 중국식다운 발상에 경환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휴대폰과 MP3의 생산 공장은 긍정적으로 검토하지만, 독자투자를 선호한다고 전달하세요. 그러나 중방이 지분에 맞게 현찰을 통한 지분인수에 경영에 참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합작도 고려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시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목매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환은 손을 털어도 손해를 보지 않을 정도의 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땅한 합작 회사가 나오지 않는다거나 독자투자가 어렵다고 판단이 된다면 구 모델들의 OEM방식 생산도 포함해서 철저히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중국시장에 접근하려고 했다.

    “구글은 어떻습니까?”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습니다. 컴페니언 사용자들이 홍콩이나 미국 사이트를 이용하고 있다 보니 구글의 중국진출에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의 언론통제 정책에 우리가 어떤 대응책을 가질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경환도 에릭과 같은 고민에 쉽게 구글의 진출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BAIDU가 서비스를 시작한다면 자국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구글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것을 알고 있는 경환은 말을 아꼈다.

    “다각도로 검토를 해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합시다. 우리의 중국방문은 기업들과의 협상을 목적으로 한 만큼 중국정부의 태도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의 역할을 빌이 잘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과 한국에서 빠듯한 일정을 보내느라 다들 피곤했을 텐데 편하게 쉬었다 갑시다.”

    경환은 중국정부의 치졸한 대응에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중국정부가 자신의 인내심과 자존심을 건드린다면 무관심으로 중국정부의 궁금증을 유발할 생각이었다. 주는 것도 없는데 덥석 미끼를 물어줄 정도로 경환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당한만큼 돌려줄 생각에 경환은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판매를 담당하는 김창동을 바라보았다.

    “김창동 사장님, 준비는 되셨나요?”

    “네, 회장님. 기자들이 도착해 있습니다.”

    “중국정부에 뒤통수 맞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입시다. 김 사장님, 부탁합니다.”

    대부분 미국, 일본, 한국의 특파원들이었지만, 일부 중국기자들까지 SHJ의 회견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기자회견은 경환이 미국을 떠나기 전 한 통화의 전화로 준비된 회견이었다. 그 전화는 경환에게 좋지 못한 기억을 남긴 왕샹첸이었다. 부패척결을 시대적 사명으로 여기는 주룽지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왕샹첸의 불안감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윗선에서 꼬리 자르기라도 한다면 자신과 형제들은 꼼짝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갈운명이었기 때문에 왕샹첸은 주룽지를 반격할 카드로 경환을 선택했고 SHJ에 대한 정보를 경환에게 넘겨줌으로써 만약을 대비하려고 했다.

    회견장에 도착한 김창동과 어윈은 자리를 잡고 주위를 살폈다. 경환이 도착하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이루어진 회견에 기자들은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듯 한 분위기였다. 중국어에 능통한 김창동이 조용히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댔다.

    “먼저 SHJ퀄컴의 휴대폰과 MP3인 세틀러와 컴페니언을 사용하시고 계신 중국 소비자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SHJ에이전트에서는 급격하게 증가하는 AS문제에 큰 우려를 느껴 대대적인 자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경악할 만한 내용을 포착하고 중국공상총국에 신고를 했습니다만,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고 피해자는 더욱 증가하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김창동의 지시를 받은 SHJ직원들이 큰 박스에 담겨진 수백 개의 세틀러-1,2,3과 컴페니언-1,2를 준비된 탁자 위에 쏟아냈다.

    “이 기기들은 모두 불량판정을 받은 것들입니다. 저희가 확인한 불량품의 1%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수백 개의 불량품이 쏟아져 나오자 회견장은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종이라도 잡은 듯 여기저기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지만, 담담한 표정의 김창동은 급히 말을 이었다.

    “겉모양을 봐서는 잘 구분이 되지 않겠지만, 이 기기들은 모두 광주와 심천에서 불법으로 복제된 제품들입니다. 당연히 불법 복제품들은 AS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소비자들과 AS직원들과의 마찰이 발생해 SHJ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 소비자들께서 정품을 구입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리며, 중국정부의 빠른 대처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 뒤로 한참동안 회견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 CCTV 사회고발 프로에서 SHJ의 휴대폰과 MP3의 잦은 고장과 불친절한 AS 문제를 방영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왕샹첸을 통해 입수한 경환은 보도보다 하루 앞서 이 문제를 기사화 해 버렸다. 중국 언론이야 통제가 되겠지만, 미국과 일본, 한국의 언론에선 중국의 저작권 침해와 맞물려 대대적인 보도가 이뤄질 게 뻔했다. 음흉한 미소를 보이는 경환은 주룽지의 다음 수가 무엇일지 무척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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