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67화 (144/264)

#167

다시 사는 인생 - 167

두 사람의 팽팽한 기 싸움으로 긴장감에 휩싸였던 접견실의 분위기는 좀처럼 가라않지 않았다. 경환은 김환기의 정치적 연륜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고 김환기 역시 나이로 경환을 판단하려 했던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여유 있는 두 사람의 모습과는 달리 서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처절한 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기에 지쳤는지 김환기의 입이 먼저 떨어졌다.

“한국 기업들과의 합작 진행이 잘 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플랜트 쪽이 지지부진 하더군요. 정부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으시면 서슴없이 말씀해 주세요.”

경환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앉았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머리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금년 추진하는 프로젝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LNG 플랜트는 일본의 JSC와 이미 합작키로 했으니 이건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은 프로젝트는 사우디의 해수담수화 프로젝트와 나이지리아와 앙골라의 FPSO 사업입니다.”

“그렇군요. FPSO는 대현중공업과 합작을 추진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대후그룹이 SHJ의 파트너가 될 정도의 기술력은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역시 김환기는 대후그룹과의 만남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김현태와의 협상내용이 김환기에게 보고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경환은 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청와대에 보고되기를 바랐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수도 있었다. 김환기의 답변을 통해 이미 대후의 처리방향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경환은 망설임 없이 뒷말을 이어갔다.

“대통령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기업에게 의리나 우정을 논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SHJ도 마찬가지이지만 대현중공업도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SHJ와 페트로팍, 두 회사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저는 이번 FPSO 프로젝트 파트너로 대후를 고려하고는 있지만, 여의치 않는다면 미쓰이조선과 함께 할 생각입니다.”

김환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FPSO 발주처인 프랑스의 TOTAL과 SHJ와의 밀착관계는 이미 정보라인을 통해 확인을 한 상태였다. 또한 해수담수화 플랜트 역시 사우디SWCC와 SHJ와의 물밑협상이 끝난 상태였기에 세계 유수한 플랜트 시공업체들은 SHJ와 합작을 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SHJ가 일본으로 방향을 돌린다면 한국기업은 결국 손가락만 빨아댈 수밖에 없었고 건설 경기는 침체기에서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말들이 많은 상태에서, 아시아본사 유치를 제외하더라도 SHJ의 플랜트 프로젝트가 일본기업과의 합작으로 끝나게 된다면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대후는 부채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기업입니다. 자칫 SHJ와의 합작기간 중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피해로 인해 이 회장님의 발등을 찍을 수도 있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SHJ가 그런 위험을 부담할 수는 없죠. 단지 한국정부에서 프로젝트가 완공될 때까지 대후그룹이 성실하게 프로젝트를 이행한다는 보장을 해 주시면 됩니다. P-BOND는 SHJ가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태연하게 웃음 짓던 김환기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지 시작했다. 이미 국정원의 보고를 통해 이 내용에 대해 듣긴 했지만, 경환이 직접적으로 거론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내부결론은 불가판정을 내린 상태였기에 김환기는 뜸을 들이지 않았다.

“불가합니다. 기업의 일에 정부가 나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혹시 김현태 회장의 개인재산과 지분 모두를 사회에 환원하고, 대후그룹 내의 일부 계열사와 해외법인을 매각하는 자구책을 발표하게 된다면 어떻습니까? 아, 그리고 대후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이 되는 조건이고요.”

김환기는 이런 내용까지 보고받지는 못했다. 그건 도청을 의식한 경환이 마지막 협의에선 철저히 필담으로 김현태와 협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김현태를 설득하는 게 어려운 일이였지만, 경환은 반년을 넘기기 전에 대후그룹은 사라지게 될 거란 객관적인 자료를 김현태에 넘겨주자 김현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환은 대후라는 이름을 남길 건지, 아니면 대후가 공중분해 되고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건지 양자택일 밖에는 없다는 것을 설명했고 결국김현태는 명예로운 퇴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후의 메신저 역할을 그냥 해 줄 수는 없었다. 대후통신과 대후정보시스템을 SHJ에 매각하고 사원지주제로 독립한 대우엔지니어링의 인수에 대후그룹의 협조를 받는 조건으로 한국정부와의 협상에 나서겠다는 제안이었다. 사면초가인 대후 입장에선 경환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김현태와의 협상일 뿐, 김환기를 설득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이 회장님이 이런 조건을 내밀다니 생각 밖이군요.”

“대통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GM이 대후자동차를 탐내고 있다는 것을요. 대후자동차가 GM으로 넘어간다면 현 정부의 큰 패착이 될 것입니다.”

경환은 쌍용자동차가 중국에 넘어가 기술을 뺏기고 버려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GM 또한 현재 엄청난 로비를 정부에 하고 있어 김환기를 설득하는 게 가능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까지 걸고 넘어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SHJ에 이득이 있습니까?”

“큰 이득은 없겠지만, 대후그룹이 구조조정을 하게 된다면 대후통신과 대후정보시스템, 대후엔지니어링은 인수를 하고 싶습니다. 만약 이 세 회사를 인수할 수만 있다면, 한국에 대한 투자는 확대될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김환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경제가 호황기라면 경환의 이런 건방진 말을 일축하며 내정간섭으로 미국에 항의라도 해 보겠지만,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의 상황이 그리 녹녹하지 않다는 것이 김환기의 두 발목을 잡고 있었다. 경환은 경환 나름대로 필요도 없는 대후 때문에 한국정부와 척을 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한국에 제 2의 SHJ타운을 설립하려던 계획이 자칫 대후로 인해 무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불가 입장을 고수한다면 투자는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전 대후그룹이나 한국정부 보다는 SHJ의 직원들이 더 소중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미 칼은 빼 들었다. 여기서 물러서게 된다면 우스운 꼴로 전락해 SHJ가 한국정부에 발목을 잡힐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경환이 부인하고는 있었지만, 한국에 휴대폰과 MP3의 생산시설을 마련한 이유는 자신이 한국인이란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끝내 한국정부와 타협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큰 손해가 발생하겠지만, 점차적으로 한국의 생산기지를 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만약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IMT 2000사업에 한국정부가 WCDMA를 지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김환기도 마지막 칼을 뽑아들었다. 경환은 김환기의 말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오성그룹 금성그룹과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를 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정부의 입김이 작용하기 시작한다면 이동통신사들도 결국 정부의 뜻에 반기를 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의 당혹스러운 표정에 김환기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김환기는 어서 대답을 해 보다는 듯이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경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경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입가에미소를 흘렸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으실 생각이시군요. CDMA가 있기 때문에 GSM의 독과점에서 한국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정부의 뜻이 그렇다면 저도 어쩔 수 없겠네요. SHJ가 미국기업이란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북핵과 관련해 삐거덕거리는 한미관계에 한국정부가 정책적으로 미국기업을 배척한다는 소문은 김환기에게도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미국을 파는 현실이 짜증스러웠다.

“허허, 한국정부는 기업들의 경제활동에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농담으로 던진 말에 이 회장님이 이런 반응을 보이실 줄 몰랐습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하는 김환기의 달변에 경환은 어이가 없는 듯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경환은 이 만남을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았다. 결론이 없는 대화라면 자신이 결론을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깍지를 낀 후 김환기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려는 순간 김환기 한발 빨랐다.

“이 회장님이 제안하신 내용은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겠군요.”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중국과 싱가포르를 방문한 후 잠시 한국에 들릴 예정입니다. 그때를 맞춰, SHJ의 한국투자 계획을 발표하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루한 회담 속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청와대를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리한 제안이란 건 경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경환 스스로도 한국정부를 이길 생각은 없었다. 단지 서로 이익을 공유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경환도 한국정부를 위해 어느 것도 내 놓을 생각이 없었다.

“김환기 대통령,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괜히 정치9단이 아니더군요. 백 명의 린다와 말싸움 하는 거 같았어요.”

호텔로 돌아온 경환은 남아있는 실무진을 회의실로 급히 불러들였다. 김환기와의 면담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뒤통수라도 맞게 된다면 피해가 심각할 수도 있었다.

“타케우치 사장님은 플랜트 실무진을 이끌고 일본으로 가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지금 당장 일본으로 출국하겠습니다.”

한국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조치라는 걸 감 잡은 코이치는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 나가려 했다 그러나 경환은 그런 코이치를 급히 불러 세웠다.

“일본정부는 SHJ아시아본사와 SHJ퀄컴 생산기지를 위해 국유지 100만 평을 50년간 총 1억 불에 임대를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건설비용의 50%를 부담하겠다고 하더군요. 실무진들과 검토를 해 보세요.”

휴대폰과 MP3의 생산기지를 일본으로 이전하는 것은 SHJ에게도 큰 메리트는 없었다. 해외기업에 배타적인 일본의 분위기와 높은 인건비 등은 자칫 높은 생산원가로 수출가격에 큰 부담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의 이런 조치들이 한국정부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린다는 북경에 나가있는 어윈과 에릭에게 아시아본사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의견을 교환하라고 하십시오.”

경환은 결코 중국에 생산기지를 둘 생각은 없었다. 모든 기업의 생산기지가 중국으로 몰리고 있었고 중국 정부에서는 수입제한을 통해 자국에서 생산된 제품의 소비를 유도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최후까지 버텨 볼 생각이었다. 중국은 모토롤라와 오성전자, 금성전자 등 휴대폰 공장을 통해 엄청난 기술을 빼돌렸고 이 빼돌린 기술은 고스란히 중국기업에 전달되고 있었다. 이런 중국정부의 막나가는 식의 노력으로 인해 기술력의 차이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있었다.

“중국과 협상을 진행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중국이라면 알레르기반응을 보여 왔던 경환의 지시를 놀랜 눈을 한 린다가 되물었다. 본래 중국에 생산기지를 만들자던 자신의 의견을 매번 경환이 반대를 했기 때문에 이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분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디자인을 제외한 휴대폰 제조기술은 이미 다른 업체를 통해 확보를 했을 겁니다. 최신기종이 아니라면 중국도 그 대상에 포함을 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경환이 두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톡톡거리며 다시 지시를 내리자, 린다는 경환의 의도를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한국정부와의 회담이 부정적인 결론이 난다는 가정 하에 대책을 준비하세요. 그 대책은 철저히 SHJ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됩니다.”

회의를 마치자 코이치는 플랜트실무진들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기 위해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린다는 북경에 도착한 어윈과 에릭에게 새로운 지시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국정부와의 협상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김현태에게 전한 경환은 별다른 일정 없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한국일정을 마무리 했다.

일본과 달리 대통령과의 만남이 이뤄진 후에도 SHJ의 공식발표가 나오지 않자 호텔에 모여 있던 기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SHJ와 한국정부와의 이상기류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한 코이치와 플랜트 실무진이 급히 일본으로 출국까지 하자,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런 소문에 대한 청와대와 SHJ의 논평을 요구했지만, 청와대나 SHJ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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