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66화 (14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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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66

    경환의 장고는 깊어만 갔다. 자신의 계획을 설사 김현태가 받아들인다 해도 한국정부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사면초가에 빠지는 건 대후가 아닌 자신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었다. 통역을 통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린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내들었다.

    “현재 SHJ는 한국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대후의 일에 관여를 한다면 역풍이 불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후와의 합작은 전향적으로 검토를 할 수 있겠지만, 한국정부의 보증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요. 이 부문을 대후에선 해결할 수 있으신가요?”

    뜬금없이 한국정부의 보증이 린다의 입에서 나오자 김준성이 급히 반문을 하고 나섰다. 과거 해외실적이 전무한 한국기업을 위해 정부가 이행보증을 선 전례가 있긴 하지만, 대후에게 보증을 설 정도로 한국정부와 밀접한 관계는 아니었다.

    “해외공사에 한국정부의 보증을 원한다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전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불가능한 조건입니다.

    “그럼 주거래은행의 이행보증은 받으실 수 있다는 말씀이겠군요.”

    “그, 그게.......”

    김준성은 린다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없었다. 정부가 대후의 자금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거래은행의 이행보증을 받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동의가 없다면 SHJ와 합작을 하게 된다하더라도 대후를 위해 이행보증을 설 은행들은 국내에 없다고 보는 게 진실이었다.

    “그럼 시공과 관련한 P-BOND(이행보증금)는 어떻게 처리를 할 계획입니까? 대후증권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김준성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갔는지 린다는 처음부터 대후증권을 분리시켜 버렸다. 린다와 사전에 입을 맞추긴 했지만, 린다의 집요함에 경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린다의 계속된 질문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김현태와 김준성은 SHJ와의 합작이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 회장님, 한국정부에서는 SHJ 아시아본사가 유치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혹시 변수가 생기더라도 한국의 생산시설이 타국으로 이전되는 것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한국정부를 대신해 전달해 드립니다.”

    SHJ와의 합작을 포기한 듯 김현태는 정부와의 관계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급히 선회를 했다. 지금까지 본 경환의 성격으로 자신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김현태는 불편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제가 한국인이란 사실로 아시아본사를 한국에 설립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미국기업인 SHJ가 미국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 아니겠습니까? 김 회장님, 혹시 대후를 살릴 방도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든 걸 다 던지고라도 대후를 살리고 싶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대후를 살릴 수 있다는 소리에 김현태의 눈빛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동안 접견실에는 김현태의 고함과 탄식이 교차되며 늦은 오후까지 접견실을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서방, 바쁜지 뻔히 아는데 우리까지 불러줘서 고맙네. 사실은 나도 정우와 희수가 보고 싶어 밤잠을 다 설쳤다네. 허허.”

    김현태와의 긴 회의를 마치고 호텔 룸으로 돌아온 경환은 양가 부모님들과 오붓한 저녁식사를 마련했다. 주위의 이목을 의식해서인지 주문한 음식은 프레지던트 룸 안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식탁에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

    “사돈도 저와 똑 같으셨네요. 저도 아이들이 눈에 밟혀 일이 손에 안 잡히더군요.”

    “하하, 그러셨습니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이들을 가까이 둔 부모들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경환은 죄송한 마음으로 두 분의 얘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에서 살고 싶은 생각에 밤잠을 설치는 건 경환도 마찬가지였지만, 환생의 조건이었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일을 핑계로 소홀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미국에 오셔서 사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아니야, 이 서방. 내가 괜히 해본 소릴세. 난 친구들이 있는 한국이 좋아. 시간이 되면 수정이와 아이들은 좀 자주 한국으로 보내게.”

    경환은 두 분께 공손히 술을 따라 올렸다. 수정은 두 어머님들과 함께 수다 삼매경에 빠진지 오래되었고 희수는 외할아버지가 낯선지 친할아버지의 품을 벗어나지 않았다. 희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마몬을 떠올려 봤지만, 지금까지 성장해 온 희수의 모습에서는 어떠한 의심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경환은 자신이 너무 과민하다는 생각에 급히 화제를 바꿨다.

    “아버님, 조만간 미국과 한국에 재단을 설립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한국 쪽을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환아, 그게 좋겠다. 사돈이야 사회경험도 풍부하시고 공정하시기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시니 사돈이 맡으시는 게 당연한 일이지.”

    대기업 임원을 지내다 은퇴한 장인은 한가로이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열정을 바쳐 일에 매진한 사람이 은퇴생활을 즐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환은 아버지를 SHJ 고문으로 초빙할 때부터 장인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항시 가지고 있었다. 수정은 장인에게도 신경을 써 주는 경환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살짝 미소를 보냈다.

    “일에서 손을 뗀지가 오래 되었는데, 괜히 자네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고민이 많네만, 기회가 된다면 다시 사회생활을 해 보고는 싶네.”

    “미국에 돌아가면 세부적인 계획이 나올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버님께 따로 전달 해 드리겠습니다. 재단은 투명하게 경영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버님께서 맡아 주신다면 저도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경환의 장인은 공항에서 경환을 처음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학벌도 변변치 않고 가진 것도 전혀 없었던 경환이 무조건 싫었다. 수정과 이미 몸을 섞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해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지만, 딸 하나 버린 셈 친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허락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의 경환은 한국정부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성공해 있었고 가족을 생각하는 한결같은 마음 또한 변치 않는 모습에 경환의 장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에서의 첫날밤은 가족들과의 재회와 함께 서서히 저물어 갔다.

    사장단의 업무보고를 시작으로 둘째 날을 시작하는 경환은 SHJ퀄컴과 SHJ구글 실무진을 먼저 중국으로 출국시키고 린다와 SHJ플랜트는 자신과 일정을 동일하게 수행하도록 지시하자 많은 추측이 기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SHJ에서도 실세인 린다가 한국에 남음으로서 중국의 아시아본사 유치는 사실상 물 건너갔고 한국과 일본의 경쟁으로 좁혀진 게 아니냐는 내용이었지만, SHJ에선 어떠한 내용도 확인시켜 주지 않고 있었다. 일본 일정과 또 하나 다른 점은 합작과 투자가 이뤄진 일본일정과는 달리 오성전자와의 합작이외에는 특별한 투자나 합작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회장님, 리무진이 대기 중입니다. 청와대 경호팀도 이미 도착했습니다.”

    수정이 입혀주는 양복 상의를 걸친 경환은 하루나의 보고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고 경제적으로 박식한 지식을 갖고 있는 정치 9단의 대통령과의 만남에 경환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요. 린다, 같이 내려갑시다.”

    힐튼호텔에서 청와대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가까워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어느새 청와대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신분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차량은 정문을 지나 청와대 본관까지 단숨에 도착하자 관례를 깨고 본관 앞까지 나와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확인한 경환은 서둘러 차문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통령님. SHJ를 맡고 있는 이경환입니다.”

    “하하하, 청와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김환기입니다.”

    옆집 할아버지와 같은 인상 좋은 김환기가 청하는 악수를 받으며 경환은 굳었던 인상을 풀고 환하게 웃음을 보여줬다. 김환기의 소개로 이번 면담에 참여할 인원들을 소개받은 경환은 간단히 사진을 찍은 후, 청와대 비서들의 안내를 받으며 접견실로 향했다.

    “저는 한국인인 이 회장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재작년에 있었던 외환위기가 이 회장님의 조언으로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정부를 대신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겠습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한국 정부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더 많은 희생을 강요받을 국민들을 위해 최소한의 조언을 했을 뿐입니다.”

    김환기는 경환을 한국인으로 묶으려고 했고 경환은 한국정부를 위해 한 일이 아니라는 말로 선을 그어버렸다. 기업인들과 달리 정치인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피곤했다.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본심을 감추는 정치인들은 직설적인 경환을 피곤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호흡을 내쉰 경환은 김환기와의 머리싸움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선공을 선택했다.

    “SHJ가 미국기업이긴 하지만, 미국 언론에 휘둘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SHJ아시아본사를 결정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경환은 김환기의 표정을 살폈지만, 손톱만큼의 변화도 김환기의 얼굴에서 찾아낼 수 없었다. 역시 정치 9단은 나이순으로 따는 게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모든 일은 공정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한국은 IT산업을 핵심 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중입니다. 미국 언론에서 말하듯이 투명하지 못한 관료체제가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합니다만, 그건 어느 나라나 조금씩은 안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은 그런 구습을 척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경환은 김환기의 유수처럼 흐르는 답변에 혀를 내두르고 싶었다. 자신이 계획한 판 안으로 김환기를 끌어들이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김환기에게서 느껴지는 연륜은 경환도 쉽게 넘을 수 없어 보였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님의 박식한 지식은 전부터 동경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개 기업인에 불과하다 보니 국가보다는 제 노력의 결정체인 SHJ의 이득에 눈이 먼저 간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런 이유로 일본에서 제시한 조건을 한국이 넘어설 수 있을지 저도 확신이 없습니다.”

    서로 공치사하는데 정력을 소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경환은 김환기와의 만남을 오래 끈다면 결국엔 김환기가 파놓은 덫에 자신이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선공에 이어 정공법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김환기의 표정은 여전히 돌부처처럼 묘한 미소가 보인 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일본이 제시한 조건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한국정부는 SHJ에게 마냥 퍼 줄 수도 없는 입장입니다. 일본의 조건이 월등하다면 SHJ의 이익을 위해서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겠죠. 이 회장님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경환은 처음으로 김환기에게서 벽을 느낄 수 있었다. 갈 생각이면 가라는 식의 김환기의 답변에 경환은 말문이 막혔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거만큼 추한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경환은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내심 마음에 결심을 굳혔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무거웠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SHJ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제 뿌리가 한국이란 사실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김환기는 김환기 나름대로 경환이 쉽게 엮여 들어오지 않자, 태연한 표정과는 달리 당황하고 있었다.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가라고 하면 미련 털고 가겠다는 경환의 직설적인 답변은 김환기의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SHJ가 이전을 선택한다면 수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휴대폰과 MP3의 생산 공장이 있는 경기지역과 SHJ플랜트가 위치한 경남 마산지역의 경기가 위축되고, 이것은 심화되는 지역감정에 불을 지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김환기는 엷은 미소를 흘렸다.

    “결정은 SHJ가 하는 거겠지만, 아직 한국 정부는 어떠한 조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회장님께서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평소 지론이 WIN-WIN이라고 들었는데, 좀 당황스럽군요.”

    경환은 당혹함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저히 말로써 김환기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경환은 김환기와의 만남 전부터 고민해 온 비수를 꺼내 들었다. 이 비수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미련을 버릴 생각이었다.

    “제가 대통령님의 말씀을 오해했나 봅니다. 사실 SHJ는 휴스턴의 SHJ타운의 2차 개발까지 완료시킨 후 제 2의 SHJ타운을 조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이 아시아가 될 수도 있고 유럽이 될 수도 있지만요. 저는 연륜이 짧다보니 직설적인 표현을 좋아합니다. 대통령님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허허, 저를 뒷방 노인네 취급을 하십니다. 저도 직설적인 표현 좋아합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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