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65화 (14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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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65

    일본 입국 때와 마찬가지로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경환의 별도의 인터뷰 없이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갔다. 한국 언론에서는 산케이신문의 사설을 근거로 한국계인 경환에 대한 인신공격을 대서특필하며 SHJ 아시아본사의 일본유치 부당성을 연일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SHJ에서는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아 궁금증을 키우고 있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눈들도 많고 경호팀에서 호텔 투숙을 권장해서 이쪽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찮다. 집 앞에도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더구나.”

    MS와의 주식 맞교환을 성사시킨 SHJ는 한국의 가장 뜨거운 뉴스거리였다. 그중에서도 아메리카드림을 이룩한 경환의 방한은 의도적인 한국정부의 띄우기와 맞불려 방송과 신문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경환의 조언과 충고가 없었다면 외환위기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경환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의 경쟁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 까닭에 본가에 머무르려던 계획은 알의 충고를 받아들여 급히 실무진이머무르는 힐튼호텔 프레지덴셜 룸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청와대에서 몇 번 연락이 왔었다. 내가 아는 게 없어 거절은 했다만, 괜찮은 게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당하게 큰소리 치셔도 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가 실린 이후 경환과의 직접 연락이 차단되자, 한국정부는 SHJ 고문을 맡고 있는 경환의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집요할 정도로 접근을 했지만, 경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거절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경환은 자신의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한국정부의 행태에 웃고 넘길 수만은 없었다.

    “할아버지.”

    “오냐, 희수야.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구나. 허허허.”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희수가 뛰어와 할아버지 품안에 얼굴을 묻으며 안겼다. 할아버지가 낯설어서인지 정우는 수정의 손만 매만지며 벌쭘하게 서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희수는 할아버지에게 안겨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순간 경환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달려와 재롱을 부릴 세 살짜리 아이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으로만 뵀는데도 희수가 아버님을 기억하나 보네요. 어머님 섭섭하시겠어요.”

    “희수 저것도 전주 이 씨라고 핏줄 따라 가는가 보다. 그나저나 정아 결혼식엔 참석할 수 있는 게냐?”

    “참석해야죠. 중국과 싱가포르는 저 혼자만 갈 거예요. 승연이는 결혼식에 참석하긴 힘들 거예요.”

    경환은 수정의 말을 믿으며 희수의 돌발 행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 위해 고개를 한번 좌우로 저었다. 정아는 오랜 약혼기간을 끝내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주위의 관심을 받기 싫다는 이유로 호텔엔 오지 않았다.

    “아버지, 애들과 같이 있어 주세요. 저는 일정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들어오겠습니다.”

    “그래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리고 가급적이면 네가 한국에 투자를 했으면 좋겠다.”

    경환은 말없이 고개만 숙인 후 급히 호텔에 마련된 접견실을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SHJ의 방한에 맞춰 오성그룹에서 경영하는 나신호텔은 SHJ를 유치하게 위해 그룹 회장인 이형우까지 직접 나섰지만, 경환의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대후그룹이 경영하는 힐튼호텔과 계약을 체결해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국 일정의 첫 시작을 오성그룹 회장인 이형우를 만나는 일로 시작하는 경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형우와의 회담을 진행했다. 이미 SHJ퀄컴과 오성전자 간 한국이 추진하는 IMT 2000에 CDMA 2000 1X가 선정되도록 공동 추진하겠다는 합의를 돌출한 상태에서 두 회장 간의 만남은 형식에 그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형우는 한국정부의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며 SHJ 아시아본사가 한국에 유치될 수 있도록 경환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형우와의 회담을 SHJ와 오성그룹과의 합작에 한정지으며 경환은 답변을 회피해 버렸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번 방한 일정에는 대현그룹과의 면담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FPSO 공동 입찰을 제안하며 정상길 대현중공업 사장은 집요하게 경환과의 면담을 시도했지만, 경환은 정부의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며 대북사업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대현그룹과 선을 긋고 있었다.

    “하하하, 이 회장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오성그룹은 SHJ의 결정에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SHJ도 오성그룹과의 합작이 성공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협조를 하겠습니다.”

    SHJ와 오성그룹의 총수들의 만남을 취재하기 위해 힐튼호텔에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을 위해 두 사람은 간단한 포즈를 취했다. 경환은 이형우가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SHJ의 원동력이 약해지거나 SHJ를 넘어설 획기적인 무기를 손에 쥔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안면을 바꿀 사람이 이형우란 것은 회귀 전부터 수없이 겪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CDMA 로열티 일부를 주식으로 대체하고 외환위기로 반 토막 난 오성전자의 주식을 집중 매집한 이유도 오성전자의 발목을 잡기 위한 조치라는 걸 이형우가 알았을 때의 표정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린다, 오성전자의 주식은 어느 정도 확보를 했습니까?”

    “작년 한화 3만 원대에서 집중매입을 했습니다. 또한 오성중공업 회사채를 오성전자의 주식으로 대체하면서 총 3.4%까지 확보했습니다.”

    “오성전자의 주주인 시티은행과 교분을 나누면서 꾸준히 매입하세요. 당분간 로열티도 전량 주식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오성전자와 협의를 하시고요. 저는 대후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SHJ에 뒷덜미를 잡혀있다고는 하지만, 반도체와 플래시메모리, 가전에서 강세를 보이는 저평가된 오성전자의 주식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경환은 이형우의 한방을 대비하기 위해 서서히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힐튼호텔 정문에 대후그룹 회장인 김현태와 김준성의 모습이 나타나자 기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정치부와 경제부 기자들 사이에는 대후그룹이 쉽게 살아나기 어려울 것이란 루머가 퍼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SHJ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현중공업을 밀어내고 대후그룹을 선택한 SHJ의 의도에 대해 기자들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많은 억측을 쏟아내고 있었다. 김현태는 빗발치는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굳게 입술을 걸어 잠근 채, 서둘러엘리베이터로 사라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김현태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현태와의 만남은 경환을 호기심과 착잡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고 있었다. 김현태 개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뉠 정도로 호불호가 갈리는 스타일이었지만, 최후의 순간, 해외도피를 선택한 김현태에게 후한 점수를 줄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김현태와 동행한 김준성에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경환은 린다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대현그룹을 물리치고 회장님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억측들이 난무한다고 들었습니다. 회장님은 어떠셨습니까? 제 퍼포먼스가.”

    처음부터 경환의 도발이 강하게 들어오자 김현태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직설적이고 급한 성격의 김현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을까 김준성의 조바심이 깊어지고 있을 때, 안경을 추켜올린 김현태가 입을 열었다.

    “이 회장님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젊으신 나이신대도 SHJ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강한 추진력에 탄복을 했습니다.”

    우문현답. 어리석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는 김현태의 성격이 녹아난 답변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세계경영을 모토로 전 세계를 제집 안방처럼 누비고 다닌 김현태의 기세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환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함을 표현했다.

    “회장님의 칭찬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남의 돈 빌려 쓰지 않으면서 SHJ를 키웠다는 자긍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김현태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불편한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경환은 김현태의 기를 살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국내부채 60조, 해외부채 30조 원으로 대후의 총 자산 60조 원을 넘은지 오래였고 외환위기로 유동자금이 막히고 정부의 제재로 자금조달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대후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만큼은 SHJ가 손해라는 계산이 경환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 죄송합니다. 김 회장님. 어려운 시기에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나 이건 대후만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대후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독 대후만 피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김현태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경환은 김현태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체 기술력을 높여 대후의 브랜드 가치를 세우기보다는 대출을 통해 기업을 인수하며 외형만 키웠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경환은 보고 있었다. 경제가 호황기에 있던 80년대는 이런 전략이 성공한 듯 보였지만, 기술력의 가치가 높아지는 불황기를 뚫고 나갈 동력이 대후에겐 없어 보였다.

    “한국 기업의 관행이라고는 하지만, 여러 외압에도 버텨내지 못한다면 일차적인 책임은 대후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건방지다고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흠. 흠.”

    김현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자신의 아들 정도의 나이밖에 먹지 않은 경환의 훈계가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청와대의 요청만 없었다면 이 자리에 나올 생각도 없었던 김현태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경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회장님의 충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죠. 현재 SHJ엔지니어링에서 FPSO와 해수담수화플랜트, LNG플랜트를 추진한다고 들었습니다. 대후건설은 SHJ와 합작을 진행한 경험도 있고 SHJ의 파트너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알제리 건으로 대후의 신세를 진거는 인정을 하겠습니다. SHJ가 추진하는 세 건 모두 고도의 기술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입니다. 그 점에서 대후와의 합작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대후그룹이 해체된다는 소문이 현실로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그 리스크를 SHJ가 독박 쓸 수도 있는데, 회장님이라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경환의 직설적인 표현에 김현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FPSO나 LNG에 대한 기술력은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만약 SHJ와 합작이 성공한다하더라도 모든 기술력을 SHJ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자신이 경환의 입장이라도 절대 대후와는 합작을 할 수 없었다.

    “SHJ와 기술제휴를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비용은 저희가 부담을 하겠습니다.”

    “이 회장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FPSO나 LNG는 2000년대를 이끌 플랜트의 핵심 기술입니다. SHJ가 대현중공업이나 JSC와 손을 잡는 게 수월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는 김현태를 보자 경환은 웃음을 거둬들였다. 김준성이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않았다면 이 자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경환은 계획성 없는 대출로 그룹을 위기에 빠트린 김현태나 이를 빌미로 소액주주나 개인투자자들을 무시한 채 대후를 해체시키려는 한국정부 모두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김 회장님. 돈 줄이 막힌 상태에서 대후가 살아날 방법이 있다고 보십니까? GM과의 50억 불 합작은 제외하시고요.”

    “대마불사라고 했습니다. 대후나 나 김현태, 쉽게 죽지 않습니다. 잠시 간의 어려움은 곧 해결될 겁니다.”

    아직도 큰소리치는 김현태를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국민들의 막대한 피해를 감안하지 않고 몇몇의 이익을 위해 대후해체를 공식화 하는 한국정부에 반대해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경환의 후회는 깊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김준성이 급히 끼어들었다.

    “이 회장님, 제가 나설 자리는 아니지만, 대후는 이번 SHJ와의 합작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아직은 기술력이 부족할 수는 있지만, 대후는 저력이 있는 기업입니다. SHJ의 어떠한 조건이라도 경청하겠습니다. 회장님.”

    말을 마친 김준성은 간절한 눈빛을 담아 김현태를 바라봤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대후의 회생은 사실상 끝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현태의 굳었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흠, 내가 좀 심했던 거 같습니다. 이 자리를 만든 게 이 회장님이니 좋은 의견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세이경청하겠습니다.”

    김준성의 간절함에 한풀 꺾였는지 말을 마친 김현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허세를 부려봐야 경환에게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세 높게 덤벼들던 김현태의 풀 죽은 모습에 경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현태의 사정을 봐 줄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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