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64화 (141/264)

#164

다시 사는 인생 - 164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정우와 희수는 아침도 거른 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장단들과 간단히 조찬을 같이 한 경환은 어제 미뤘던 보고를 받기 위해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JSC와 파푸아뉴기니 LNG플랜트 건설에 공동 입찰키로 합의를 했습니다. 2억 불로 입찰가는 높지 않으나, 총 사업비가 100억 불이 되는 만큼 첫 스타트가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미쓰이조선에서 제안한 나이지리아와 앙골라의 FPSO 합작은 오성중공업과 대현중공업의 조건과 비교 중에 있습니다.”

코이치의 보고를 받은 경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SHJ에 의해 위기에 빠졌고 SHJ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 JSC는 대규모의 구조조정과 개혁을 통해 옛 명성을 되 찾아가고 있었다. LNG 기술을 이전받았다고는 하지만, LNG플랜트에 대한 기술력은 SHJ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런 의미에서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JSC와의 합작은 경환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코이치를 시작으로 아시아국가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진출을 확정했다는 에릭과 일본 휴대폰 제조업체와 공동기술개발, MP3 원천기술 사용계약을 체결했다는 어윈의 보고가 줄을 이었다. 일본사무소의 법인작업이 곧 마무리 된다는 마사토의 보고를 끝으로 짧은 티타임을 마쳤다.

“린다는 한국으로 넘어가기 전 SHJ와 일본기업과의 합작내용을 발표하세요. 제가 일본총리와 만나기 전에 이뤄져야 됩니다. 그리고 산케이신문의 기자들은 회견장 근처에도 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하세요.”

경환은 하루나가 번역해 넘겨준 산케이신문의 사설을 읽고 있었다. 우익신문의 대표답게 공항에서 있었던 발언을 문제 삼아 힐난한 비판과 함께 한국계인 경환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고 있었다. 의도된 행동이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비하하는 기사를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한국정부에서 민감하게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주재 대사관을 동원해 사실과 다른 기사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회장님의 일정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입니다.”

“우선은 일정을 변경할 계획은 없다고 전달하세요. 일본기업과의 합작내용을 확인하면 아마 다른 조치가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린다는 최소한의 일정만 소화하시고 오늘은 직원들과 서울에서 푹 쉬도록 하세요.”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는 한국정부를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단지 SHJ뿐만 아니라 한국의 해외자본 유치에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 해외 공관들을 동원, 해명기사를 신문에 광고하는 등 적극적인 대처를 지시하고 있었지만, 그 효과는 미지수였다. SHJ의 아시아본사 유치를 낙관하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면서 SHJ가 한국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한국정부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산케이신문 기자들의 거친 항의에도 SHJ 회견장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린다가 주재한 회견은 예상외의 합작과 투자가 발표되면서 SHJ 아시아본사가 일본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와 함께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린다는 아시아본사는 4개국 방문이 끝난 뒤 최종 결정한다는 답변으로 일축해 버렸다. 일본 기자들 사이에서는 산케이신문의 비난이 아시아본사 유치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마지막 결정은 총리와 경환과의 만남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총리관저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리무진 두 대가 천천히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완공한지 70년이 넘어서인지, 철골 콘크리트로 지어진 총리관저는 그 규모에 비해 음산할 정도의 한기가 돌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개전이 이 관저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관저 주변을 살피는 경환의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리무진에서 내린 경환은 총리 비서의 안내에 따라 서쪽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 회장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리님. SHJ를 맡고 있는 이경환입니다.”

총리실의 통역가와는 별개로 경환의 통역은 하루나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최소한의 인원을 추려 총리와의 만남을 준비한 경환은 관방장관 및 게이조의 측근들과 인사를 나눈 뒤 포토타임을 거쳐 준비된 접견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산케이신문의 사설을 막지 못한 히로무의 얼굴을 굳어 있었다. 기사를 막기 위해 기업들의 협조까지 얻어 산케이신문을 압박했지만, 자민당 내 보수파와 오부치 내각의 반대 파벌의 벽에 부딪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일본정부의 요청을 받아 경환의 방일이 이루어졌지만, 첫 단추부터 어긋나 버렸다.

“호텔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밤 보내셨습니까?”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호텔의 경치에 제 아내와 아이들이 푹 빠졌습니다. 총리와의 만남까지 그 기분을 살리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습니다.”

미소를 짓는 경환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격으로 웃으면서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는 경환을 보며 게이조는 어색한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이해를 해 주십시오. 일본은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언론을 통제하는 국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산케이신문의 사설을 명백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경환은 게이조의 노련함에 입가로 미소를 흘렸다. 산케이신문의 사설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로 우익보수파와의 충돌을 피하면서도 언론을 통제하지 않는다는 말로 한국과 중국을 견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정적을 물리치고 일본이란 경제대국의 총리자리에 오른 게이조의 얼굴엔 여유마저 흘렀다.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만, 해외기업에 배타적인 일본의 정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SHJ경영진들 사이에 팽배해 있어 문제긴 합니다. 서둘러 투자와 합작내용을 발표한 이유도 이런 부정적인 의견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게이조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한 채 경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환에 대한 정보를 보고받으면서 어린 나이라고 방심하지 말라는 보좌진들의 조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의 만남이 끝난 후 합작내용을 발표 해 달라는 요청을 SHJ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전에 서둘러 회견을 마쳐 버렸다. 산케이신문에 대한 항의라는 걸 게이조도 모르지 않았지만, 경환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하하, 이 회장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일본정부는 SHJ의 아시아본사를 유치하는데 적극적인 자세로 협조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총리님의 지지 감사합니다. 일본 시장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IT산업은 한국과 인도에 추월을 당했고, 수시로 발생하는 주변국들과의 외교마찰로 인해 고민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중국시장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이조는 산케이신문의 주필을 씹어 먹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미국 언론의 후방지원까지 받으며 조성된 분위기가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게이조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이 회장님께서 오해가 있으시네요. 우리 일본은 작년 한국과의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올해 중국과의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쎄요. 한국이 외환위기를 어렵게 극복하는 과정에서 향후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어업협정을 체결하셨더군요. 기업가인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일본의 치밀한 전략적 승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민정부의 버르장머리 발언을 시작으로 일본은 치밀한 전략을 수립 독도를 포함한 잠정공동수역 안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행사하다 1965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1월 일방적으로 종료선언을 했다. 한국의 두 손을 묶어 놓은 상태에서 한일 간의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명분하에 선심 쓰듯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뒤로는 독도를 중간 수역에 포함하는 새로운 어업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며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경환의 강공에 정치 9단인 게이조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하하하, 총리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신문지상에서 하도 욕을 먹다보니 감정이 격해졌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흠, 흠. 아닙니다. 이 회장님이 국제 정세에도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계신가봅니다.”

접견실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접견에 참가하고 있던 히로무는 좌불안석이었다. 인신공격까지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경환은 시종일관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이를 제지할 마땅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정치나 외교는 어렵군요.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SHJ는 이번 방일로 15억 불 이상의 합작을 일본기업과 체결 내지는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경사무소를 법인으로 승격시켜 일본시장에 적극 진출할 계획입니다.”

경환이 화제를 급히 바꾸자, 게이조는 마지못해 굳었던 인상을 풀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15억 불이라고는 하지만, SHJ의 직접적인 투자는 법인작업에 투자되는 자본금 외에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게이조의 머릿속엔 휴대폰과 MP3의 생산기지를 일본으로 이전시킬 묘수를 찾고 있었다.

“큰 결정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SHJ의 투자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협조할 생각입니다.”

“어떤 협조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저는 총리님이 말씀하신 실질적인 협조가 무엇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원론만 내세우는 게이조를 경환은 한 번 더 몰아세웠다. 린다의 회견으로 생색은 냈지만, 경환도 일본시장을 크게 보지는 않았다. 배타주의가 강한 일본에 대규모의 투자를 해 봤자 남는 건 별로 없다는 계산이 이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경환에게 있어 계륵과도 같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을 더 끈 후에야 총리관저를 나온 경환은 기자들의 인터뷰 수많은 요청에 ‘총리와의 만남은 대단히 유익했으며 SHJ는 일본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겠다.’는 짤막한 답변만 남겼다. 호텔로 돌아온 경환은 오후 스케줄을 모두 취소한 채, 가족과 함께 아사쿠사의 회전초밥집을 방문, 저녁식사를 하는 것을 끝으로 일본 일정을 마무리 했다.

“회장님, 이경환 회장과의 만남에 대후의 미래가 걸려있습니다.”

대후그룹 회장인 김현태는 김준성의 충언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역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김현태의 약해진 모습에 김준성은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잡기 위해 사방에서 죄여 들어오는 것을 피부를 느끼고 있었다. GM과의 합작으로 시간을 벌고는 있었지만, 합작이 성공하리라고는 자신도 믿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을 SHJ에게 걸어야 된다는 현실을 김현태는 쉽게 받아들이지못하고 있었다.

“김 사장. SHJ가 막힌 상황을 풀 수 있다고 보는 건가?”

“GM과의 합작이 물 건너 간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대출과 CP, 회사채 발행이 모두 막힌 상태에서 계열사 간 돌려막기로 근근이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지만, 자금이 바닥을 보이며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는 상태였다. 대출로 기업을 인수하고 인수한 기업으로 대출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대후의 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고 외환위기가 닥치며 그룹의 재정 상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회장님, SHJ플랜트에서 FPSO 2기와 해수담수화 프로젝트 입찰을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FPSO가 각 25억 불, 해수 담수화 프로젝트가 15억 불 규모입니다. 우리가 전체 시공을 맡게 된다면 GM과의 합작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SHJ가 입찰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

김준성은 부쩍 약해진 김현태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조인트도 서슴없이 날리던 과거의 모습이 너무나 그리웠다.

“회장님, SHJ는 사우디 SWCC(해수담수청)와 물밑 작업을 마쳤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SHJ의 정보력과 기술력을 본다면 3건 중 2건은 성공을 할 것입니다. SHJ가 가장 어려웠을 시기 우리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점을 최대한 이용하십시오.”

김현태의 고민은 깊어갔다. SHJ를 설득해 공동 입찰을 성공시킨다 해도 이번 정권과의 틀어진 매듭을 풀지 못한다면 회생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출로 대출이자를 막는 악순환의 고리는 쉽게 끊을 수 없었다.

“이경환 회장이 성인군자는 아닐 거고, 우리의 목숨을 연장시켜 주는 조건으로 무엇을 요구할 것으로 보는가?”

“그, 그게.......”

김준성은 고개를 떨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무릎까지 꿇으며 매달리긴 했지만, 철저하게 SHJ의 이익을 쫒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대후 입장에서는 SHJ와 상호 이익을 교환할 아무런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김준성의 입은 침묵만 지킬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