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다시 사는 인생 - 163
최악의 외환위기를 넘긴 한국경제는 아동과 신아동그룹의 그룹 총수가 구속되며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99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동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투기자본만 증시와 부동산에 쏟아져 들어올 뿐, 살아나는 경제에 기폭제가 될 만한 양질의 해외자본 유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어 한국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아시아본사를 설립하기 위한 SHJ의 방한은 북핵으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한국의 정치상황과재벌개혁이 공정하지 못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호기였다.
업무보고를 마치고 대통령 집무실을 빠져 나온 김우상 비서실장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서둘러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가자 이미 김대동 경제수석과 이찬종 국정원장 이성규 재정부 장관이 도착해 있었다.
“다들 아시리라고 봅니다. 대통령님의 노기가 상당하십니다. 이경환 회장이 입국하기도 전에 이런 문제가 터진 이유가 뭡니까?”
김우상은 신경질 적으로 미국의 최고 경제신문인 월스트리트저널을 책상위로 던졌다. 신문 윗면으로 한국계인 제임스 리 SHJ 회장이 모국인 한국에 아시아본사를 설립하는 건 큰 모험이란 내용으로 한국의 실정을 꼬집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이유로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부도덕성과 뒷돈 거래를 가장 먼저 꼽았고,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다는 이유로 기업을 탄압하는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내용과 함께 시장성과 투명성을 위해서라면 일본과 싱가포르가 적격이라는 조언으로 기사는 마무리되었다.
“정보를 입수하고 있는 중이라 자세한 내용은 파악할 수 없지만, 일본정부나 미국정부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기사를 가장 먼저 접한 이찬종은 미국에 파견된 직원들을 동원해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미 국정원 직원이 대부분 노출된 상태에서 미국언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란 사실 불가능했다.
“일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정부가 나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정부가 추진하는 대북정책에 강한 불만을 표출한 거라고 판단합니다. SHJ를 유치하기 위해 우리 이상으로 일본도 적극적이다 보니 미국과 뜻을 같이 했을 거라고 봅니다.”
금창리 핵시설 의혹과 관련해서 미국정부는 대북정책에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한국정부와 심각한 의견충돌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92년 북핵문제가 터지자 미국은 북한을 선제타격하기 위한 5027계획을 세웠지만, 중국과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실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번 정권은 대북 화해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미국과의 의견충돌도 감수하며 대북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김우상은 이찬종의 분석에 어느 정도 동감을 하고 있었다.
“SHJ에선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아직 공식적인 답변은 하지 않고 있지만, 기사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이 기사가 나오자, 타케우치 코이치 사장과 박화수 사장이 급히 일본으로 출국한 사실이 포착되었습니다.”
SHJ플랜트를 이끌고 있는 코이치와 박화수까지 일본으로 출국했다면, 일본에 무게감을 싣겠다는 전략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룹 회장이 한국계라고는 하지만, 전 방위로 SHJ에 대한 비난과 미국정부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일본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SHJ의 실무진들이 이경환 회장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일본 기업들과 합작을 협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님은 무조건 SHJ 아시아본사를 한국에 유치하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입니다. 아시아본사에 투자될 금액이 50억 불이란 말입니다. 분위기를 반전시킬 방안을 말씀해 주세요.”
SHJ는 아시아본사에 순차적으로 50억 불 이상, 투자하겠다고 발표를 한 상태였다. 단순한 50억 불이 아니라, 플랜트와 퀄컴, 구글로 이어지는 SHJ의 아시아본사를 일본에 넘겨주기라도 한다면 서서히 살아나는 한국경제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는 문제였다. 미국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는 SHJ를 설득한 만한 카드는 쉽게 떠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비서실은 깊은 침묵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저, 이경환 회장이 오성그룹과 대후그룹 회장들과 회동하는 것에 주목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두 그룹에 협조를 당부하는 게 우선시 되어야할 거 같습니다만.”
“안 됩니다. 오성그룹이야 협조를 하겠지만, 대후는 이미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SHJ가 무슨 이유로 대후와 회동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후를 전면에 나서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재정부의 수장인 이성규가 대후 불가론을 펼치자, 이찬종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국정원 인사와 관련해 대통령의 뜻을 거절하며 경질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있어 이찬종의 발언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대후 회장과의 친분으로 대후 해체에 반대를 하고 있는 이찬종이 경질되면 대후그룹 해체가 본격화 된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김우상이 급히 손으로 제지하며 두 사람의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히려 했다.
“자, 자. 지금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만약 아시아본사가 일본으로 확정된다면 SHJ엔지니어링과 플랜트, 퀄컴이 빠져나갈 수도 있어요.”
“그렇습니다. SHJ엔지니어링만 하더라도 작년 30억 불이 넘는 해외공사를 성공시켰습니다. 올해는 사우디 해수담수화 공사를 포함해서 규모가 더 커질 거로 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SHJ퀄컴에서 생산하는 휴대폰과 MP3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고요. 만약 일본에 아시아본사가 설립된다면 점진적으로 일본으로 사업장을 철수 할 것입니다. 우리 경제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김대동의 발언에 세 사람은 큰 한숨과 함께 허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SHJ가 빠져 나간다면 SHJ의 협력업체들의 도산은 불 보듯 뻔했고 IT를 육성한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비서실의 분위기는 무거워만 갔다.
“이경환 회장도 한국인인데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 일본에 뜻이 있겠습니까?”
“이것 보세요. 이 장관. 이경환 회장이 한국정부와 악연이 깊다는 거 모르십니까? 특히 재경부와는 상극입니다. 그리고 GIVE AND TAKE가 이 회장의 신조라고 합니다.”
이찬종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성규는 헛기침을 하며 무안한 감정을 숨기기에 바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비서실을 나서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SHJ 아시아본사를 유치하기 위한 회의는 길어지고 있었다.
나리타공항 입국장으로 선글라스를 낀 십여 명의 서양인들이 자리를 잡고 입국장을 살피자, 그 뒤로 일본경찰들이 입국장에 모인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입국장 문이 열리고 캐주얼 복장을 한 경환과 수정이 정우와 희수의 손을 잡고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정부에서는 VIP이용을 제안했지만,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주기 위한 홍보전략 차원에서 이를 거절하고 일반 입국장을 이용해 일본에 발을 내딛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희수가 놀라며 금방이라도 울듯 한 표정으로 경환에게 안겼다. 경환과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지만, 경환은 웃는 얼굴로 손만 흔들 뿐, 일본경찰들과 경호팀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회장님! 일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공항을 빠져나가려는 경환의 뒤통수를 강타하자 경환은 고개를 돌렸다. 경찰의 팔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는 여자 기자가 눈에 들어오자 경환은 알과 함께 천천히 그 기자를 향했다.
“어느 소속이시죠?”
“저, 아, 아사히신문의 사노 유코라고 합니다.”
작은 키의 유코가 급히 마이크를 경환의 입을 향해 올리자 주위의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어가 서툰 다른 기자들은 경환과 유코의 대화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미스 사노. 저는 기업가지 정치가가 아닙니다. 그래도 질문에 제 개인적인 생각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은 기술력도 높고 상당히 매력적인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주변국들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번 일본 방문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환은 답변을 마치고 멍한 표정의 유코를 뒤로하고 공항을 빠져 나갔다. 유코와의 짧은 인터뷰에 자극받은 다른 기자들이 서투른 영어로 질문을 퍼 부었지만, 경환은 일절 대꾸를 하지 않았다. 경환이 준비된 리무진에 오르자 일본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인 친잔소 호텔로 향했다.
“회장님, 그 여기자에게 한 발언이 호도될까 걱정입니다.”
“그러라고 한 말입니다. 아사히신문이야 좌익신문으로 소문이 자자하니 제 발언을 그대로 보도하겠지만, 우익언론들은 내정간섭이라고 난리를 치겠지요. 일본 총리와의 만남이 살짝 기대가 되네요.”
한국에서 급히 달려와 호텔 앞에서 경환을 맞이한 코이치가 걱정스럽게 경환을 바라봤지만, 경환은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린다는 바쁜가 보네요.”
“쿡 사장님은 어윈 사장님과 함께 도시바와 미팅 중에 있습니다. 협상이 좀 길어지는 거 같습니다.”
“일이 우선이지요. 그나저나 호텔이 정말 아름답네요. 동경 한복판에 이런 정원을 가지고 있는 호텔이라니. 오늘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해야겠습니다.”
공항에서 많이 놀란 희수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경환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 호텔 앞으로 숲이 우거지고 정자와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정우와 함께 잔디밭으로 뛰어나갔다. 호텔 주위는 일본 경찰들이 순찰을 강화하고 있었고, 알이 합류한 경호팀은 밀착 경호를 하고 있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우와 희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작년에 있었던 참의원 선거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자 하시모토 류타로의 뒤를 이어 오부치 게이조가 새 총리로 선출되었다. 평범하고 온건하다는 비판 속에서도 은행들의 악성채무를 줄여주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고, 세금을 줄이면서 소비를 늘리는 경제정책으로 일본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한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협력을 담은 공동선언까지 발표하며 외교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총리, 내일 자 산케이신문의 사설입니다. 역시 이 회장이 공항에서 한 발언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급히 총리실을 찾은 노나카 히로무 관방장관이 ‘기업인은 정치인이 아니다’는 제목으로 경환의 발언을 비판한 우익대표 신문인 산케이의 사설을 게이조에게 건넸다.
“다른 신문의 논조는 어떻습니까?”
“아사히를 포함해 다른 신문들은 대체로 사실만을 보도하며 이 회장이 일본을 매력적인 나라로 표현한 것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게이조는 두통을 줄이기 위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산케이신문의 사설이 보도된다면 자민당 내 우익보수파들은 경환을 초정한 자신을 압박할 거란 사실에 게이조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었다. 무선통신과 IT의 신흥 강자인 SHJ를 일본으로 유치해 자민당 내의 파벌싸움에서 우위를 접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단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이 회장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발언을 한 건지. 답답하네요.”
“산케이 신문에 협조를 요청하고는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월스트리트저널에서 한국 투자의 부당성을 보도했다는 겁니다. 이 회장도 미국 여론을 무시하고 한국투자를 쉽게 결정하지는 못할 거라고 판단됩니다.”
“기업들의 협조를 받아서 사설이 실리지 않게 조치를 취하세요. 차려진 밥상을 엎으면 안 됩니다.”
SHJ 아시아본사에 투자될 50억 불이 탐나는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경제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에 해외자본과 기업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성장 동력을 중국에 빼앗기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다.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감이 일본인들 사이에 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SHJ 아시아본사마저 한국이나 중국으로 유치가 된다면 살아나는 경제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경환과의 만남이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회담 분위기를 망칠 기사는 사전에 봉쇄할 필요가 있었다.
“이 회장은 어떤 일정을 보내고 있나요?”
“호텔에서 가족들과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 회장을 제외한 SHJ실무진들은 일본기업들과 합작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니와 MP3 원천기술 사용계약을 시작으로 JSC와 미쓰이조선과 플랜트 합작을 협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쓰비시중공업이 부탁을 해 오고 있는데 SHJ는 강경한가요?”
히로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민당 실세를 동원해 SHJ와의 합작을 추진하려던 미쓰비시중공업은 SHJ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며 뒷방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LNG와 FPSO 입찰로 JSC와 미쓰이조선과 합작을 추진하는 것과는 반대로, SHJ는 공공연하게 미쓰비시중공업에게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있을 경환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총리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경환은 가족들과 함께 여유 있는 휴식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