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다시 사는 인생 - 162
“아빠, 비행기가 너무 쪼그매. 큰 비행기 탈래.”
“하하하, 희수는 큰 비행기가 좋은가 보구나.”
린다가 대규모의 실무진을 이끌고 일본으로 출발한 다음날 경환은 식구들과 함께 휴스턴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희수가 태어난 후 제대로 여행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경환은 부모님들의 성화와 수정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비행기를 타보는 희수는 공항 내 큰 비행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전용기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떼를 쓰고 있어 경환과 수정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용기를 빨리 인도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중동부호가 인도를 거부한 전용기를 최석현이 빠르게 구매를 했기 때문이었다. 최석현이 전용기를 구입하면서 독단적으로 처리한 내용이 하나 더 있었는데, 봄바르디에와 구매계약을 체결 시 SHJ의 각 전용기에 부여되는 코드명을 최석현은 경환과 수정의 성을 따 LK로 정한 것이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보고받은 경환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희수야. 엄마가 그러는데 비행기 안에 침대도 있데. 제니퍼도 작은 비행기 타고 왔잖아. 그러니 오빠랑 같이 타자.”
떼를 쓰는 희수를 조용히 달래는 정우를 경환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부쩍 커버린 정우는 희수가 태어난 후부터 생각이 깊어지고 나이답지 않은 조숙함마저 보여주고 있었다. 정우와 수정의 손에 이끌려 희수가 전용기에 탑승하자 그제야 한숨 돌린 경환은 배웅 나온 황태수와 마주설 수 있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회장님. 회사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부회장님이 계시는데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부회장님은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재단 설립을 검토해 주세요. 기부를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무턱대고 돈만 뿌리는 재단보다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SHJ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재단이 되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다각도로 검토를 하겠습니다.”
MS와의 지분교환으로 SHJ가 부각이 되자 SHJ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경환은 휴스턴 시정부와 라이스, 휴스턴 대학에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고 있었지만, 사회적 기여도가 약하다는 지적이 대두되면서 복지재단 설립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벌들에 대해서는 관대할지라도 사회기여도나 기부에 인색한 재벌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지탄이 쏟아지는 미국이었기 때문에 세금 공제와 SHJ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도 재단의 설립은필수불가결한 상태였다. 경환은 부의 사회 환원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할 필요성을 느끼며 전용기에 올라탔다.
“LK-1의 사무장을 맡고 있는 김혜원입니다. 회장님을 모시게 돼 영광입니다.”
“승무원 강규리입니다.”
두 명의 승무원이 고개를 숙이며 경환의 탑승을 맞이하고 있었다. 최석현의 배려로 한국항공의 베테랑을 스카우트해서인지 두 승무원의 얼굴에는 노련함이 깃들여 있었다. 좌석을 8석으로 최소화하고 침대와 샤워공간까지 갖춰져 있는 전용기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했다. 정우와 희수는 침대 석으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좌석에 앉아 있는 수정만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오래간만에 한국어를 사용하니 편하고 좋네요. 음료수 한 잔만 부탁할게요.”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경환은 수정의 손을 슬쩍 잡고는 자리에 앉았다. 김혜원이 급히 침대 석에서 놀고 있는 정우와 희수의 손을 잡고 나와 좌석에 앉히자 비행기는 천천히 활주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빠 되게 좋아. 침대도 크고. 매일 비행기 타면 안 돼?”
처음 타는 비행기가 신기해서인지 희수는 자리에 앉아서도 입을 다물지 않고 재잘거렸다. 김혜원이 건네주는 음료수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 하루나가 조용히 책 몇 권을 가져다 놓았다. 경환은 정우와 희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동안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경제서적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아빠도 책 읽으시니까, 정우하고 희수도 책 읽어야지?”
수정의 말에 정우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지만, 희수는 창밖으로 보이는 활주로가 신기했던지 수정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희수가 창밖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동체를 세우며 LK-1은 활주로를 이륙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오카다 마사토는 전세기가 도착하는 나리타공항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SHJ가 그룹경영을 시작한 후부터 SHJ동경사무소는 인원과 기능을 확대하여 SHJ플랜트 사무소가 아닌 그룹의 전반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SHJ 동경사무소는 세틀러와 컴페니언, 구글스토어의 일본 매출이 급증하면서 사무소의 기능에서 탈피, 법인작업을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경환과 대규모의 본사 실무진 방문에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나리타공항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마사토는 전세기가 도착했다는 직원을 말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본사의 지시에 의해 석 달 전부터 은밀히 준비하던 경환의 일본 방문은 일본 정부와 각 기업들의 무수한 러브콜로 이어졌고, 마사토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사장님, 동경사무소의 오카다 마사토입니다. 일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카다 소장님 수고 많으셨어요. 우선 회장님이 묵으실 호텔을 확인하고 싶으니 안내를 부탁합니다.”
SHJ의 대규모 실무진이 방일한다는 소식에 일본 경제계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수많은 기자들이 공항에 모여 SHJ 실무진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했지만, 린다는 간단한 인사성 멘트만 남긴 후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 준비된 차량을 이용해 숙소로 향했다.
“좋군요. 동경 한 복판에 이런 정원을 가진 호텔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동경의 특급호텔들은 MS와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SHJ의 방일 팀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지만, 마사토는 석 달 전에 이미 최적의 호텔과 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SHJ와 계약을 체결한 친잔소 호텔은 3개 층을 SHJ에 할애하고 특히 경환의 가족이 머물 프레지덴셜 룸은 가전가구를 재배치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 린다의 만족스러운 답변에 호텔 총 지배인과 마사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사장님, 총리관저에서 회장님과의 만남을 하루 연기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불가합니다. 일본 총리와의 만남은 우리의 요청이 아니란 점을 강조하세요. 회장님께서 굳이 총리와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SHJ를 유치하기 위해 경환을 하루 더 일본에 잡기 위해 꽁수를 부리자, 린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본정부는 SHJ의 아시아본사 유치를 일본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한 계기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었지만, 린다는 일본정부에 끌려 다닐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소니 사장단이 도착할 시간입니다.”
“그래요. 회장님이 도착하시기 전에 할 일은 마무리를 지읍시다.”
12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에도 지친기색도 없이 일정을 진행하는 린다가 왜 지독한 여전사로 불리는지 알 것만 같았다. 마사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린다를 쫒아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비 많은 도시로 유명한 티를 내는지 부슬부슬 내리는 시애틀 공항으로 BD-700 한 대가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천천히 활주로를 돌아 전용터미널에 도착한 전용기의 문이 열리자, 잠에 빠져있는 희수를 안아들고 경환의 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제임스. 시애틀에 온 걸 환영합니다. 미시즈 리의 미모 때문인지 공항이 다 환해지는 거 같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빌.”
잠든 희수를 수정에게 맡기고 경환은 그리 반갑지 않은 빌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제니퍼가 급히 정우에게 뛰어갔다.
“정우오빠, 우리 집 가자. 희수는 왜 자는 거야?”
제니퍼가 달려오자 정우는 재빨리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제니퍼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정우의 곁을 맴 돌았고 그런 모습이 빌의 눈에 들어왔다.
“제니퍼가 정우와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하하하.”
“네? 거 참. 둘째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자 공항에서 이러지 말고 출발합시다. 아이들과 부인은 집으로 먼저 출발을 시키고 우린 사무실로 갑시다.”
수정과 아이들이 탑승한 리무진이 공항을 출발하자 경환은 빌과 함께 그 뒤를 쫒아 시애틀을 벗어났다. 시애틀을 벗어나 북쪽을 향해 얼마가지 않자 대학 캠퍼스를 연상하는 MS 본사가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SHJ타운은 500에이커의 땅을 개발하기 전까지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MS 본사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경환은 MS본사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우지 못했다. 경환은 빌의 안내를 받아 조인식이 준비된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경환과 빌이 회의실에 들어가자 준비된 자리에 앉자 에릭과 변호사들이 합의된 주식교환 문서를 건네주었다. 이미 시애틀에 오기 전 세심한 검토를 마친 상태였기에 경환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 있었다. 경환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계약서를 빌과 교환하자 여기저기에서 카메라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15년 동안 매매가 금지되었다고는 하지만, 260억 불을 손에 거머쥔 사람 얼굴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같네요? 기자들도 많이 왔으니 좀 웃어요. 하하하.”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다보니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저는 260억 불을 벌었는데 빌은 도대체 얼마를 번겁니까?”
빌은 두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대답을 대신했고, 경환은 쓰린 속을 달래며 기자들의 요청에 오랫동안 빌과 손을 맞잡고 있어야만했다. 조인식을 마친 두 사람은 브리핑을 에릭과 스티브에게 맡기고 빌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빌, 이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누가 손해인지 계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SHJ와 MS가 한 배에 탄 이상, 최대의 시너지를 발휘했으면 합니다.”
“하하하, 제임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시장의 반응이 아주 뜨겁습니다.”
주식 맞교환은 빌에게 엄청난 이득과 함께 MS의 말 많은 주주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효과를 보고 있었다. MS와의 협력체제 구축이란 성과를 경환에게 가져다주긴 했지만, 빌도 큰 손해를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제임스, 우리는 모바일OS 개발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습니다. 제임스가 보는 걸 내가 좀 훔쳐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뭘 보는지 저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빌 덕분에 애플이 땀을 내고 있을 테니 부지런히 저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MS에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아무리 우호관계가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빌에게 속마음을 열 정도로 바보짓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미 모바일OS에 대한 시장성까지 조사를 마친 마당에 빌의 호기심을 채워준다면 빌은 안면을 바꿔 강력한 경쟁자로 나설 거라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럽시다. 아쉽기는 하지만, 제임스가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SHJ의 아시아본사는 일본이나 한국이 될 거 같은데 어떻습니까?”
“아직 결정된 사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무진들이 잘 판단을 하겠죠. 저는 기다릴 뿐입니다.”
빌은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경환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은 생각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경환과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바쁜 스케줄을 변경해 경환의 비즈니스 투어에 동행하려 했지만, 경환은 중국과 싱가포르를 제외한 일본과 한국의 동행은 극구 거절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경환의 의중이 일본과 한국에 있음을 알 수 있었던 빌은 중국에서 합류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제임스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선 술이 필요할 거 같네요. 제 집사람과 제니퍼가 종일 음식을 준비했다고 하니, 서둘러 집으로 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배 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입니다. 염치불구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빌의 강력한 요청에 경환은 예약했던 호텔을 취소하고 빌의 저택에서 묵기로 결정을 내렸다. 빌의 요청은 제니퍼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을 경환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게스트 룸이 별채로 따로 떨어져 있을 줄은 몰랐어요.”
빌 가족과의 저녁식사는 일을 떠나 사적인 대화로 주제를 삼아 식사가 끝날 때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빌의 비서로 부인이 된 멜린다는 미모뿐만 아니라 경영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수정을 배려해 미술과 디자인에 초점을 맞춰 대화를 이끌어 갔다. 식사를 마치고 제니퍼와 희수가 같이 자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경환과 수정은 둘만 게스트 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만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정에게 와인을 건넨 경환은 수정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물기에 젖어 있는 수정의 몸은 경환의 심호흡을 거칠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기 일루와 봐. 아무래도 오늘 희수 동생을 만들어야 할 거 같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자기 왜 그래? 피곤할 텐데.”
수정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경환을 더욱 자극시키자 급하게 수정을 안아들은 경환은 불을 끌 새도 없이 침대로 수정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