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61화 (13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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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61

    빌 게이츠가 자신이 소유한 MS지분의 5%를 SHJ홀딩스의 지분 5%와 동등한 조건으로 맞교환 한다는 기사가 발표되자, MS의 주가는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PC OS를 주도하는 MS와 플랜트, CDMA, 인터넷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는 SHJ와의 협력체제 강화라는 이슈가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면서 MS의 시가총액은 5천억 불을 넘어 연일 상한가를 찍고 있었다.

    MS 주주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맞교환을 추진해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 빌의 입지는 연일 상한가를 달리는 시장의 분위기에 편승해 MS의 지배력을 공고히 다지고 있었다. 윈도 98의 실패를 SHJ와의 지분 맞교환으로 돌파했다며 빌의 사업적 감각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오자 MS 주주들의 입지는 예전과 달리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MS 주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SHJ에 쏠리고 있었지만, SHJ에선 MS와의 협력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발표 이후로는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아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었다. SHJ가 기업을 공개한다면 세계 1위 갑부는 경환이 될 거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경환의 성공담과 가족에 대한 추측성 보도가 연일 신문에 기사화 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는 달리 경환의 집무실에는 숨조차 쉬기 힘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빌의 개인 변호사를 통해 지분교환 협상이 진행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경환의 한숨에 회장실을 찾는 직원들은 표정관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경환의 왼팔이라고 할 수 있는 최석현조차도 개인적인 축하를 전한 후 엄청난 양의 지시사항이 SHJ매니지먼트에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회장실을 찾는 직원들은 지분교환에 대해 말도꺼내지 말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회장님, 커피 한잔 가지고 왔습니다.”

    “어,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커피가 생각나던 참이었는데.”

    조용히 커피를 내려놓은 하루나가 경환의 앞에 서있었다. SHJ가 그룹경영을 시작하며 회장 비서실의 인원과 기능을 대폭 강화하면서 연륜 있는 비서실장을 여럿 추천했지만, 경환은 이를 모두 고사하고 하루나를 비서실장에 앉히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서른이 안 되는 하루나의 기용은 황태수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었지만, 나이가 문제라면 삼십대 초반에 회장을 단 자신은 뭐가 되냐는 경환의 말에 황태수는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하루나는 평소와 다르게 한참을 망설이며 집무실을 나가지 않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저, 저 그게, 직원들이 많이 불편해 합니다.”

    경환 앞에서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던 하루나의 입술은 심하게 떨렸다. 경환은 손과 입술을 떨고 있는 하루나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그렇게 심했나요?”

    “아, 아닙니다. 그러나 평소 말단 직원들과도 서슴없이 어울리시던 회장님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회장실을 모든 직원에게 오픈하시겠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드린 말씀입니다.”

    경환은 사내 온라인망에 수시로 접속해 직원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눴다. 사내 온라인망으로 올라오는 많은 의견 중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직급에 상관없이 회장실로 불러 대화를 나누자 사내 온라인망에는 하루에도 수백 건씩 의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직원들의 의견을 정리하는 게 비서실의 큰 업무 중 하나가 될 정도였다. 경환은 말 수 적은 하루나까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직원들이 받았을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괜히 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했나 보네요. 하루나, 고마워요.”

    “회장님께서 잘못 하셨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단지 예전의 모습이 훨씬 회장님과 어울리시는 거 같아서요.”

    하루나의 말은 경환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경환은 인지상정이란 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SHJ가 커가고 자신의 신분이 상승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위주의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환은 마음을 다시금 고쳐 잡을 수 있었다. 경환은 하루나의 지적이 고마웠다.

    “하루나는 요새 몰라보게 예뻐지네요. 연애라도 하는 겁니까?”

    “회, 회장님. 무, 무슨 말씀이세요? 나, 나가 보겠습니다.”

    떨리는 심장을 손으로 움켜쥐고 하루나는 서둘러 집무실을 벗어났다. 사과를 하는 의미에서 스캇과 저녁식사를 했을 뿐이었지만, 하루나는 죄를 짓는 기분을 멈출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크리스토퍼라고 불러 주십시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크리스토퍼.”

    전형적인 집사 차림인 크리스토퍼의 안내를 받아 저택에 들어서자 좌우에 정렬한 하우스메이드들이 무릎을 가볍게 구부리며 경환의 식구들을 맞이했다. 영국 왕실의 부수석 집사였던 크리스토퍼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에 환멸을 느껴 왕실을 떠나 영국의 한적한 시골에 정착을 했다. 조용하게 전원생활을 즐기려던 크리스토퍼의 계획은 SHJ매니지먼트의 인사 책임자의 방문으로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들어보지도 못한 SHJ란 기업의 제안을 매번 거절했지만, 인사책임자의 끈질긴 설득과 자신과 같이 영국왕실을 나온 안토넬라 프레소노레가 이미 하우스메이드 책임자로 채용이 되었다는 말에 크리스토퍼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말았다.

    크리스토퍼의 안내를 받으며 집안을 살피던 경환은 슬쩍 수정의 손을 잡았다. 집안 구석구석 수정의 손이 안간 곳이 없을 정도로 수정은 처음으로 갖는 집에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쏟아 부었다. 정우와 희수는 예쁘게 꾸며진 자신들의 방에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집안 인테리어 하느라 고생했어.”

    “아니에요. 정말 즐거웠어요. 이런 집을 갖게 해 줘서 고마워요.”

    눈물을 글썽거리는 수정을 돌아 세운 경환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살포시 수정을 품에 안아 주었다.

    “회장님, 아랫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너무 풍기문란 하시는 거 아닙니까?”

    경환과 수정의 오붓한 포옹이 최석현의 등장에 깨져 버리자, 수정은 황급히 경환의 품을 떠나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수정에게 점수를 따보려는 경환의 노력이 최석현의 방해로 물거품이 되자, 경환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최석현을 바라봤다.

    “최 사장님 요새 많이 바쁘시죠?”

    경환의 음흉한 미소에 최석현은 등골이 서늘해지며 불안감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 있었다. 가뜩이나 지분교환 건으로 엄청난 양의 지시사항을 수행하느라 밤잠을 설쳤던 최석현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가 너무 최 사장님을 혹사시키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제 입장에선 아쉽지만, 최 사장님까지 한국방문에 동행시키는 건 포기해야 되겠습니다.”

    “헉! 회장님, 제가 좀 바쁘긴 하지만, 전용기 정비사를 스카우트 하는 업무와 알의 부탁도 있고, 제가 꼭 가야 됩니다.”

    정비사 채용과 SHJ시큐리티에 한국 특수부대 출신들을 채용하는 문제는 굳이 최석현이 아니더라도 지장이 없는 업무였다. 미국에 온 이후 최석현은 한국에 갈 기회가 없었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만 매진한 최석현에게 미안했던 경환은 포상차원에서 최석현과 케이티의 동행을 지시했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최석현은 이번 한국방문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다. 경환이 치사하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경환의 뒤끝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는 최석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나는 경환을 향해 사정조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회장님. 죽을죄를 졌습니다. 저 요번에 꼭 가야 됩니다.”

    “하는 거 봐서요.”

    경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굽실거리며 따라가는 최석현의 모습을 크리스토퍼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갑부의 대열에 합류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겸손하고 부하 직원들과도 허물없이 농담을 하는 모습에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SHJ의 아시아본사를 선정한다는 목적 하에 한국과 일본, 중국, 싱가포르의 방문계획이 발표되자 방문이 예정된 국가에서는 치열한 물밑경쟁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SHJ와의 합작을 제안하는 기업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둘째 치고 미국 주재 각국 대사관들까지 나서 경환과의 회담일정을 잡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MS와의 지분교환은 협상을 완료 했습니다. 조인식은 회장님의 시애틀 방문에 맞추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제가 삐딱하게 대한 점 이해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출장은 아시아에 SHJ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인 만큼 신경을 써 주십시오.”

    출장일정을 최종 점검하기 위해 경환은 황태수와 린다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무게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룹 부회장인 황태수를 동행시켜야 했지만, 경환의 빠진 자리를 메우기 위해선 황태수는 휴스턴에 남아야 했다. 또한 투자를 집행하고 치열한 머리싸움을 펼쳐야 하는 일에는 린다가 제격이라는 판단이 들은 점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저는 직원들을 이끌고 먼저 출발 하겠습니다. 조인식은 에릭이 회장님을 보좌 할 겁니다.”

    SHJ는 이번 출장에 플랜트와 퀄컴, 구글은 물론이고 매니지먼트와 에이전트 등 전 계열사의 사장단과 실무진을 포함시켰다. 세 대를 주문한 전용기는 아직 한 대만 인도된 상태였기에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경환은 전세기를 계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비용적인 문제가 있긴 하지만, 경호팀까지 포함해 백 명이 넘는 인원이 공항에서 진을 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직원들은 경환의 배려에 감사하며 열의를 다졌지만, 경환의 생각은 달랐다. 직원들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치열한 협상에 최선을 다해 이익을 만들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하세요. 전 시애틀 일정이 끝나면 바로 동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출장에 펜타곤의 존 해밀턴 대령이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SHJ퀄컴이 펜타곤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어 거절 할 수 없었습니다.”

    예전 주지사가 개최한 모임에서 존과의 만남을 떠올린 경환은 인상을 구겼다. 펜타곤에 소속되었다고는 하지만, 존에게서 NSA나 CIA의 냄새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수의 난처한 표정을 바라보던 경환은 존의 문제는 딕에게 맡겨 투자한 돈값을 받아 낼 생각이었다.

    “알아서 움직이라고 하십시오. 직원들이 존 대령과 접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주세요. 혹시라도 정보를 주는 직원이 나온다면 해고를 하겠다는 제 뜻을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당황하는 거 같습니다.”

    경환의 부모가 아직 한국에 있고 SHJ의 해외법인이 한국에 몰려 있다는 점을 들어 아시아본부의 한국 유치는 당연하다고 판단했던 한국정부는 일본과 중국, 싱가포르까지 포함해 다각적으로 검토를 하겠다는 SHJ의 발표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입만 벌리고 있으면 감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국민들은 생각 안하고 자기 밥그릇만 지키려는 행태에 욕지거리가 납니다.”

    “사장님이 일본으로 향하고 계실쯤이면 한국정부가 뒤집어 질 겁니다. 준비는 다 끝냈습니다.”

    경환은 아시아본사를 한국에 설립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고 싶지 않았지만, 끝끝내 한국정부가 자신과 평행선을 가게 된다면 계획을 수정할 생각이었다. 한국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황태수가 작전을 짜고 있었지만, 성공할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번 출장을 성공시키기 위해 세 사람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고 있을 때 노크소리와 함께 하루나가 급히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회의 중이신데 죄송합니다. MS에서 급한 전문이 들어왔습니다. 회장님께서 확인을 하셔야 될 거 같아서요.”

    경환은 하루나가 건넨 팩스를 읽으며 어이가 없는 듯 연신 헛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경환에게서 건네받은 MS의 전문의 내용을 확인한 황태수와 린다의 표정도 경환과 같아질 수밖에 없었다.

    “빌 게이츠만 하더라도 일 년 단위의 스케줄로 움직일 텐데, 갑자기 우리와 같은 일정으로 각 국을 방문하겠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MS는 SHJ와 같은 일정으로 일본과 한국,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전문을 보냈고, SHJ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빌 게이츠의 개인자격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동행하여 SHJ의 서포트역할만 수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빌의 의도를 알지 못한 경환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스포트라이트가 회장님이 아닌 빌 게이츠에게 쏠릴 수도 있습니다. 별로 좋은 제안은 아니라고 봅니다.”

    “간다는 놈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일본과 한국은 어렵다는 뜻을 확실히 밝히세요. 중국과 싱가포르라면 빌의 동행을 환영한다고 하시고요.”

    자꾸 SHJ의 밥그릇에 수저를 올려놓으려는 빌이 못마땅한 경환은 심호흡을 내쉬며 감정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SHJ홀딩스의 지분 5%를 빌의 입에 던져줄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일이 빈번한 지금, 빌은 계속해서 경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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