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다시 사는 인생 - 160
“오빠, 제니퍼 그림 잘 그려.”
제니퍼는 거실 탁자에 앉아 정우가 건네준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큰 저택에서 혼자 또래 없이 지내던 제니퍼에겐 정우와 희수와 같이 노는 시간이 즐겁기만 했다. 희수가 자신을 칭찬해주자 제니퍼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으쓱하며 정우의 눈치를 슬쩍 살피기 시작했다. 희수와 똑같이 자신을 대해주는 정우는 제니퍼에게 있어서 신세계를 만난 기분을 들게 하고 있었다.
“희수, 왜 정우한테 오빠라고 불러? 오빠가 무슨 뜻이야?”
“몰라. 그냥 정우오빠야. 너도 정우오빠라고 불러.”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정은 오빠의 뜻을 설명해 주려다 아이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슬며시 간식거리만 탁자에 올려놓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예절에 익숙한 제니퍼를 보며 수정은 빌의 가정교육이 엄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우는 간식으로 나온 쿠키를 집어 희수와 제니퍼에게 건네주었다.
“희수, 제니퍼. 하나씩 먹어. 우리엄마가 직접 만든 거야.”
“정우오파, 고마워.”
“오파가 아니라 오빠라고 해야지.”
제니퍼에겐 오빠라는 발음이 너무 어려웠지만, 제니퍼는 희수의 발음을 따라하며 열심히 오빠를 익히고 있었다. 정우 방으로 자리를 옮겨 놀고 있을 때 수정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니퍼, 널 데리러 오셨다. 어서 준비하고 나와야지.”
제니퍼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정우가 선물로 건네준 스케치북을 손에 꼭 쥔 채 수정을 따라 현관문을 나서면서도 뒤에 서 있는 정우와 희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우오빠, 희수하고 꼭 우리 집에 놀러 와야 돼? 알았지?”
“응. 알았어. 꼭 갈게.”
희수에게 배운 대로 정우와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하던 제니퍼는 까치발을 하며 정우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을 뛰쳐나갔다. 정우는 갑작스런 제니퍼의 뽀뽀에 연신 입술을 손으로 닦기 시작하자 희수가 수정에게 안기며 크게 소리를 외쳤다.
“엄마, 제니퍼가 오빠한테 뽀뽀했어.”
주식을 교환하자는 경환의 제안은 빌을 당황시키며 냉랭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휘몰아 감쌌다. 경환의 황당한 제안에 빌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도저히 경환의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플랜트가 모기업이라고 해도 200억 불 이상의 가치가 한계선이고, 그나마 CDMA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퀄컴을 2천억 불로 예상했을 때, SHJ홀딩스의 기업 가치는 3천억 불이 그 한계선이라는 답이 나왔다.
빌은 고개를 흔들었다. PC OS시장을 확실히 잡고 있는 MS의 가치와 SHJ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지만, 빌은 경환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경환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SHJ와의 주식교환을 하자고 하면 주주들이 날 잡아먹으려고 안달이 날겁니다. 제임스의 제안은 받아들이기 힘들겠네요. 대신 SHJ구글의 5%를 50억 불까지 올릴 의향은 있습니다. 50억 불 이상은 저로써도 어쩔 수 없네요.”
빌은 자신이 준비한 최고의 액수인 50억 불이면 경환도 쉽게 거절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주식 맞교환이라는 생각하지도 못한 카드로 20억 불을 끌어올린 수단에 빌은 경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빌만의 생각이었다.
“이해합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SHJ홀딩스의 가치는 3천억 불 정도의 계산밖에는 나오지 않겠죠. 50억 불이 큰돈이긴 하지만, 전 돈 보다는 MS와의 협력을 먼저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제임스의 생각이 뭡니까? 우리와의 협력을 원한다면서 내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SHJ구글로도 MS의 시가총액은 넘길 수 있다는 말을 해 봐야 미친 놈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모바일 OS에 대한 정보가 애플에 들어간 상태에서 MS라는 공룡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지만, 빌을 설득할 마땅한 방법이 보이지는 않았다.
경환은 50억 불까지 부르는 빌의 의도를 알기 위해 전체 판을 머리에 떠올렸다. MS OS로 PS 시장을 장악한 MS는 대체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검색엔진인 구글이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기존 포털사이트와 같은 수준으로 인식만 할 뿐 특별한 관심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구글이 획기적인 검색방법과 애드센스로 가입자의 수를 증폭시킨 후, 컴페니언과 연계된 구글스토어를 발표하며 음반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자 MS도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MS 입장에서 구글메일과 구글메신저로 입은 타격은 그리 크지 않은 입장에서 50억 불이라는 배팅을 하는 빌의 속내가 무엇인지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빌, 혹시 말입니다. SHJ구글이 모바일 OS에 성공하게 되고 상용화에 성공한다면 과연 천언 불의 기업 가치로만 끝난다고 봅니까? SHJ구글의 지분 75%를 관리하고 있는 SHJ홀딩스의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 군요.”
“미안합니다. 난 제임스와 의견이 좀 다릅니다. 컴페니언이 시장을 확실히 선점하고 있긴 하지만, 후발주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오성전자나 애플이 쉬운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빌은 모바일 OS의 개발과 상용화가 성공하더라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빌은 단지 모바일 OS개발을 바탕으로 MS가 독점하고 있는 PC OS개발에 나설 것이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세틀러에 추가되는 기능과 컴페니언 시리즈로 입지를 다진 SHJ구글이 MS의 경쟁자로 나선다면 골치 아플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정부분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던진 인수제안이었을 뿐이었다. 쉬울 줄만 알았던 경환과의 협상이 팽팽한 기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는 상황이 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빌, 한 가지 약속은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SHJ에 남아있을 때까지는 PC OS시장에 진출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남의 뒤를 따라 갈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경환의 말이 정곡을 찔러오자 빌은 순간 흠칫했다. 빌은 진중한 성격의 경환이 쉽게 이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이 이미 경환에게 읽혔다고 판단한 빌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쳐놓은 덫에 경환을 몰아넣으려던 계획이 사실은 자신이 경환의 덫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빌은 SHJ의 다음 행보가 모바일 OS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SHJ구글 지분은 넘길 생각이 없는 겁니까?”
“상호 맞교환이 아니라면 어떠한 경우라도 SHJ구글의 지분은 확보할 수 없을 겁니다.”
MS와의 피 튀기는 전쟁까지 각오를 한 경환은 평정심을 찾아가고 있었다. MS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보지도 않고 도망만 가려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반성을 하며 빌을 바라봤다.
“빌, 아이맥으로 재미를 본 애플이 현재 MP3와 인터페이스 개발에 열을 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아이북 SE과 아이맥 DV를 올 겨울이나 내년 초에 출시한다는 정보가 있더군요. 저는 좀 신경이 쓰이는데 빌은 태연한가봅니다.”
아이맥이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MS의 아성에 도전할 정도라고는 생각했지만, 경환은 은근히 빌의 경쟁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정보분석 팀의 보고로 애플의 개발 진행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경환처럼 제품의 이름까지 파악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만만치 않다고 느끼는 경환이 경쟁업체의 정보입수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자, 50억 불을 걷어차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MS와 SHJ가 전략적인 제휴관계를 맺어 애플을 초기에 무력화 시키자는 겁니까?”
“판단은 빌이 하시길 바랍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SHJ는 MS의 영역에 도전할 생각이 없습니다. 따라서 MS도 SHJ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빌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직접적으로 계획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경환의 계획이 자신이 생각한 거 보다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MS의 독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SHJ의 영역에 들어오지 말라고 당당히 말하는 경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빌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50억 불로 시작해 서서히 SHJ구글을 MS화 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이 어리석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주위에선 나를 탐욕스럽고 음흉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제임스가 더 탐욕스럽고 음흉하네요. 우선 실무진을 통해 MS와 SHJ 간의 협력관계 구축을 협의해 봅시다. WIP를 공동 연구한 경험이 있으니 그 경험을 살린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한 경환은 그제야 얼굴을 풀고 환한 표정으로 빌을 대할 수 있었다. 기업 간의 협력관계는 상황에 따라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MS와의 문제를 일단락 하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전용기에 제니퍼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빌은 서둘러 경환과의 만남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임스, 기회가 된다면 시애틀을 방문해 주세요.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만간 한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때 시애틀을 경유하도록 일정을 조정해 보겠습니다. 빌의 초대를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하하, 그땐 좀 편한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리고 제임스가 제안한 주식 맞교환은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MS가 아닌 내 개인적으로 SHJ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닐 거 같아서요.”
멍하게 빌을 바라보는 경환을 뒤로하고 빌은 빠르게 SHJ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은 말이 안 되는 거래라고 빌을 나무라고 있었지만, MS를 키웠던 자신만의 감각은 SHJ의 지분을 탐내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경환의 똥씹은 얼굴을 확인한 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빌의 마지막 말을 상기하며 경환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회장님, 빌 게이츠가 지분을 교환하는데 긍정적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빌과의 대화내용이 궁금했던지 린다와 황태수가 경환을 찾았다. 빌을 배웅하면서 빌의 마지막말을 들을 수 있었던 두 사람은 환한 얼굴로 서로 축하를 나누고 있었다.
“MS와의 협력체제 구축은 합의를 했습니다. 실무진을 구성해서 MS와 협상을 진행하세요.”
“MS의 지분 5%를 확보하게 된다면 엄청난 일 아닙니까? 회장님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린다가 경환의 신경을 건드리고 나섰다. 아직 결정된 일은 아니지만, 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MS의 지분을 이용해 거래에 응해 온다면 먼저 말을 꺼낸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구글 하나만 가지고도 MS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경환으로써는 이불을 싸고 드러누울 판이었다.
“린다, 퀄컴이나 구글이 MS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나요? 난 구글 하나로도 MS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물며 세틀러와 컴페니언, CDMA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퀄컴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네?”
린다는 뭐라 말을 하려다 급히 입을 닫았다. 퀄컴의 인수와 구글의 설립은 온전히 경환의 판단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고 자신은 항상 부정적인 의견을 내 놓았지만,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환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분은 한국방문 일정에 신경을 써 주세요.”
명백한 축객 령에 뻘쭘해진 두 사람은 조용히 경환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짙게 깔린 어둠을 뚫고 시애틀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빌은 경환과의 만남을 되새기며 SHJ가 단시간에 플랜트와 IT의 강자로 부상하는 중심에는 경환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큰 도박이 될 수도 있겠지만, SHJ홀딩스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쁜 패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정우가 선물한 스케치북만 바라보는 제니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니퍼, 재밌게 놀았니?”
“응, 희수가 나 그림 잘 그린데. 정우오빠도 나 칭찬했어.”
“오빠? 오빠가 뭐지?
“그냥, 정우오빠라고 불러야 돼. 정우오빠.”
다행히 경환의 아이들과 잘 어울렸는지 제니퍼는 밝게 웃었다.
“제니퍼 너 정우가 좋은가 보구나?”
“응, 아빠 다음으로 좋아. 나 정우오빠하고 결혼할거야. 뽀뽀도 했어.”
“뭐? 그 자식이 너한테 뽀뽀를 했다고?”
빌은 감히 제니퍼의 입에 뽀뽀를 한 정우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비행기를 돌려 경환과 정우의 멱살을 쥐어 잡고 싶은 충동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충격적인 말이 제니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 내가 했어. 아빠도 엄마하고 뽀뽀하잖아.”
빌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제니퍼를 안아들었다. SHJ가 자신의 예상대로 커진다면 제니퍼의 짝으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에 빌은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