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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59화 (136/264)
  • #159

    다시 사는 인생 - 159

    미끈하게 빠진 전용기 한 대가 휴스턴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전용기는 활주로를 천천히 지나 전용기 전용 터미널에 도착하자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멈췄다.

    “미스터 게이츠, 휴스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리.”

    첫 만남이었지만, 경환은 빌이 낯설지 않았다. IT의 공룡인 MS 회장의 얼굴을 모른다는 건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얼굴을 몰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경환은 전생에 빌을 만났던 적이 있었다. 비록 직접적인 대면이 아닌 오성전자와의 합작 건으로 방문한 빌을 멀찍이서 바라봤던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시애틀에서 날라 온 빌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환은 감회에 빠져있었다.

    “미스터 리, 옆에 계신 아름다우신 분은 혹시 부인이신가요?”

    “아! 미안합니다. 제 아내와 아이들입니다.”

    “미시즈 리, 빌 게이츠라고 합니다. 빌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갑습니다. 빌. 휴스턴에서의 일이 모두 잘되시길 바랍니다.”

    잠시 감회에 빠져 수정과 아이들을 소개시킬 타이밍을 놓친 경환을 대신해 빌이 직접 수정과 악수를 나누었다.

    “저도 아내와 같이 오고 싶었지만,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아내를 대신해 딸과 같이 왔습니다. 제니퍼, 와서 인사 해야지?”

    빌이 딸과 함께 휴스턴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경환은 수정과 아이들과 함께 빌을 마중 나왔다. 그건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자식들 교육엔 엄격한 빌과의 교감을 형성하기 위한 경환의 계획이었다. 빌의 뒤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놓는 제니퍼는 낯선 주위환경이 어색한 듯 빌의 바지소매를 붙들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경환은 그런 제니퍼를 향해 웃어주고 급히 정우를 찾았다.

    “정우도 희수 데리고 와서 인사드리렴.”

    “안녕하세요. 전 정우라고 하고, 제 동생은 희수예요.”

    정우가 희수를 데리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동양식 인사가 낯설었는지 빌은 무릎을 꿇어 정우에게 악수를 건넸다. 제니퍼는 정우와 희수가 자신의 앞에 나서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정우라고 했지? 제니퍼하고도 잘 놀아줄 수 있겠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니퍼, 우리 같이 그림 그리러 갈래?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지?”

    정우가 손을 내밀자 한참을 망설이던 제니퍼도 슬며시 빌의 바지소매에서 손을 내려 정우가 내민 손을 슬쩍 잡았고,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희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격식이 필요 없는 아이들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금세 어울리며 공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정우가 제임스를 닮았나 보군요. 다섯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낯을 가리는 제니퍼가 거리낌 없이 정우의 손에 이끌리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빌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이들이야 금세 친해지는 거 아닙니까? 공항에서 이러지 말고 자리를 옮기시죠?”

    “아, 제임스. 실례가 아니라면 SHJ타운을 방문해 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경환은 SHJ타운을 방문하고 싶다는 빌의 요청에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얼굴을 풀고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빌이 SHJ타운을 방문하려는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SHJ퀄컴 이외에는 숨길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빌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만, 아직 공사 중이라 제니퍼가 가기에는 무리라고 생각을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경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빌은 제니퍼를 생각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자신의 요청을 취소하려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정우가 희수와 제니퍼를 양손으로 잡고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아빠, 제니퍼를 집에 데리고 가서 놀아도 돼요? 제니퍼도 가고 싶어 하는데.”

    “하하하, 제니퍼가 진짜 가고 싶어 한다고?”

    전용기 안에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아이인 제니퍼가 정우를 따라 간다는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던 빌은 정우의 손에 이끌려온 제니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응, 나 정우 집에 가고 싶어. 장난감도 많다고 희수가 말해 줬어.”

    “제가 아이들을 집에 데리고 갈게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니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정까지 거들고 나서자 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빌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니퍼는 환호성을 지르며 정우와 희수의 손을 잡고 차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부인, 염치불구하고 신세를 지겠습니다. 일을 마치면 비서를 보내겠습니다.”

    미셸이 이끄는 경호팀의 보호를 받으며 수정이 공항을 먼저 빠져나가자, 경환은 준비된 차량으로 빌을 인도해 SHJ타운으로 향했다.

    “제임스 대단하더군요. 말로만 듣던 SHJ타운을 직접 보니 그 규모나 시설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빌은 진심으로 놀라움을 멈출 수 없었다. 그룹사옥을 중심에 두고 퀄컴과 구글 사옥을 지하로 연결시킨 모습과 최첨단으로 시공되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저택과 MS 본사의 규모도 이에 못하지 않지만, 신생기업인 SHJ가 타운조성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며 500에이커의 땅을 2차로 개발 한다는 사실이 빌의 호기심을 심하게 자극했다. 그룹사옥을 현장을 벗어나 직원용으로 조성된 주택단지의 규모와 시설을 확인한 후부터 빌의 말수는 줄어들었다. 특히 이런 고급 주택을 시세보다 저렴하게 직원들에게 판매를 하면서 무이자 대출까지 해 주고 있다는 경환의 말에 빌의 얼굴은 순간 굳어져 버렸다.

    SHJ퀄컴에서 스카우트 되어온 직원들을 통해 SHJ가 직원들의 복지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지만,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자 경환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SHJ구글의 핵심인원들이 자신이 내건 엄청난 금액에도 넘어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직원들을 철저하게 SHJ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마약 같은 복지정책과 쉽게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경환의 카리스마는많은 급여를 통해 충성심을 강요하는 MS와 근본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MS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을 해야겠지요.”

    SHJ타운 방문을 마치고 경환의 집무실로 돌아온 두 사람은 칼을 등 뒤에 숨긴 채 지루한 신경전을 펼치지 시작했다. 빌은 경환의 가벼운 응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아메리카드림을 이룩한 경환의 나이가 30대 초반이란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인간은 나이에 맞는 사고방식과 행동이 들어난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40대인 자신도 경환의 포커페이스에 말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빌은 새롭게 판을 짜야만 했다.

    “세틀러와 컴페니언, 정말 괴물 같은 것을 만들어 냈더군요. 다음 제품도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SHJ 덕분에 모토롤라의 주가가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빌의 기대를 실망시키면 안 되는데, 부담감이 많이 생기네요.”

    단지 세틀러와 컴페니언을 언급하기 위해 먼 휴스턴까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경환은 빌의 페이스에 말려 주도권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IT업계의 폭군과의 만남은 경환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경환의 얼굴은 차분하기까지 했다.

    “이번에 SHJ구글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메일서비스와 메신저가 이용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임스의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보니 제가 잠을 못 잘 정도입니다. 하하하.”

    겉으로는 빌을 따라 웃는 경환도 슬쩍 찔러오는 질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구글은 이미 MSN을 넘어섰고 이번에 출시한 구글메신저는 MSN 메신저의 이용자를 엄청난 속도로 갉아먹고 있었다. MS가 맘만 먹는다면 구글메신저를 퇴출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구글이 서비스를 시작한지 2년째입니다. 제자리에만 머문다면 이용자들이 기다려 주겠습니까? 이용자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작업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더군요. MS를 통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오호, 그렇군요. 이용자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말 기억하겠습니다. 제가 요새 고민이 많은데, 혹시 제임스가 저라면 MSN과 MSN 메신저를 살리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하겠습니까?”

    경환은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환한 웃음을 빌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의 패를 먼저 꺼내며 도발해 오는 빌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경환은 빌의 다음 수를 읽기 위해 빌의 양해를 얻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글쎄요, 넷스케이프의 안 좋은 전력이 있는 MS가 어떤 방법을 취해야 될까요? 상대방이 다른 사업의 이윤을 무지막지하게 퍼 부으며 덤빈다면 MS도 꽤 깊은 상처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뭐, 그래도 가장 좋은 수단은 자금을 쏟아 붓고 협력업체들을 협박하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숨통을 확실하게 끊는 게 좋을 거 같긴 합니다.”

    여기에서 밀린다면 빌의 다음 노림수에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환은 MS와의 대결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빌에게 전달했다. 뜻밖의 강공에 당황한 빌은 경환을 잠시 노려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쉬운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전면전을 각오한 듯 강하게 밀어붙이는 경환을 보자 살짝 질리기까지 했다.

    “하하하,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네요. 그리고 MS도 상처를 입는다는 조언 깊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좀 달리 생각을 해 봤습니다. MS가 상대방의 지분을 일부 인수해 우호 관계를 구축한다면 서로 WIN-WIN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빌에게서 나오자 경환은 잠시 주춤했다. SHJ구글의 지분을 확보하고 싶다는 빌의 제안은 경환의 성격상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쉽게 지분 인수를 꺼낼 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빌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경환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빌은 경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제임스,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애플에서 MP3 제품과 이를 관리할 인터페이스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엔 모바일 OS 개발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시간이야 몇 년 걸리겠지만, 스티브 잡스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란 것은 제임스도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경환은 그제야 빌이 휴스턴까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알려지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눈에 띄는 개발 성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빨리 빌에게 정보가 들어가고 말았다. 시기적으로 애플이 모바일OS 개발에 뛰어든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정보를 입수한 MS에서 SHJ와의 경쟁을 위해 애플에 정보를 흘렸다고 판단을 했지만, 빌을 다그칠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빌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경환은 분노를 참으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좋은 정보를 주신 빌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이정도로 자극을 줬으면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한 빌은 태연한 경환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보였다.

    “제임스, 정말 지독하군요. 우리와 손을 잡고 애플을 견제합시다. 우호관계 차원에서 SHJ구글의 지분 5%를 30억 불에 인수할 의향이 있습니다.”

    SHJ구글의 기업 가치를 6백억 불로 인정하겠다는 빌의 제안은 야후의 시가총액이 9백억 불이 안 되는 상태에서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만, 경환이 생각하는 SHJ구글의 기업 가치에는 한참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애플이 모바일 OS 개발에 뛰어든다면 우호세력이 없는 SHJ에겐 큰 타격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경환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빌, 5년 전 MS의 시가총액은 4백억 불 수준이었습니다. IT버블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5천억 불을 넘어섰고요. SHJ구글의 가치가 야후에도 못 미치는 고작 6백억 불 수준으로 밖에 보지 않다니 좀 실망스럽군요. 지금 상장을 하더라도 AOL보단 높지 않겠습니까?”

    내년부터 IT버블이 깨지면 시가총액은 바닥으로 떨어지겠지만, 지금은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AOL의 시가총액이 1천 4백억 불 수준이란 기억을 떠올리며 빌의 제안을 과감히 거절했다.

    “빌, 저도 MS와의 협력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만약 SHJ홀딩스를 상장한다면 어떤 대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자 빌은 MS가 손해를 보더라도 SHJ구글과의 전면전 혹은 애플과의 전략적 협조관계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SHJ홀딩스의 기업공개를 거론하는 경환의 의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플랜트를 시작으로 퀄컴과 구글,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지금이야 MS에 약간 미치지 못하겠지만, 잠재성은 MS에 버금간다고 생각합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겠습니다. 시장의 반응은 우리 생각과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죠.”

    빌은 퉁명스럽게 경환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선 팔짱을 긴 채 경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MS와 SHJ의 전략적 파트너십엔 저도 찬성을 합니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드립니다. SHJ홀딩스의 지분 5%와 MS의 지분 5%를 평등한 조건으로 맞교환 하는 걸 제안 드립니다.”

    경환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빌은 그동안의 포커페이스도 잊은 채 손에 쥐고 있던 안경을 떨어트렸다. 경환은 경환대로 퀄컴과 구글만 가지고도 MS를 넘어설 수 있는 SHJ홀딩스 지분을 맞교환 하는 게 속이 쓰렸지만, MS와의 협력체제 구축은 애플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하나의 전략적인 수단이었기에 쓰린 속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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