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57화 (134/264)
  • #157

    다시 사는 인생 - 157

    경환은 아무런 말없이 자료만 뒤적이고 있었다. 사업의 규모가 커졌다고 하더라도 최석현의 제안에 경환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전용기를 사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업의 규모가 커진 만큼 시간을 다투는 일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절약이 미덕이 되는 사회는 아닙니다.”

    황태수가 경환의 결정을 다그치고 나섰다. SHJ퀄컴과 SHJ플랜트는 유독 많은 해외사업으로 출장이 잦았지만, 휴스턴이 허브공항이 아닌 이유로 항공기 수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차피 세금으로 연방정부의 배를 불리기보다 전용기를 구입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 수 있었지만, 막대한 투자를 앞두고 전용기 운영비용이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최석현 사장님, 이 기종에 대해 설명을 부탁합니다.”

    “캐나다 봄바르디에의 금년 새로운 모델로 나온 BD-700 글로벌익스프레스 기종입니다. 12인승으로 5만 피트 상공에서 비행하여 6,500마일 비행이 가능합니다. 휴스턴과 서울의 직항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연료탱크를 추가해 항속거리를 8,500마일로 늘려 해결을 할 계획입니다.”

    미국에 오기 전 석우에게 농담으로 한 말이 6년 만에 현실로 나타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경환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전용기 한 대에 필요한 인원은 조종사와 승무원, 정비사를 포함 20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미국과 한국을 왕복하는 비용이 3억 원 이상 소요될 정도로 많은 경비가 소요됐지만, 경환은 경영진들이 합의한 사항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구입비용이 4천만 불이고 개조에 필요한 비용까지 합치면 5천 5백만 불이 되겠군요. 승인하겠습니다. BD-700 기종으로 세 대를 구매하세요. 이왕 전용기가 필요하다는 결정이 났다면 저질러 봅시다. 전용기 운영에 필요한 인원은 SHJ매니지먼트에서 주관을 하십시오.”

    “세, 세 대를 말입니까?”

    “정작 필요한 곳은 제가 아니라 출장이 잦은 퀄컴과 플랜트 아닙니까? 세 대로 운영을 해야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 대로 시작해서 늘려갑시다.”

    단지 한 대를 구입하자고 의견을 냈던 최석현은 세 대를 구입하라는 경환의 지시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경환의 지시에 수긍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회의에 참석한 경영진들은 공항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큰 기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봄바르디에 담당자를 불러 구매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SHJ가 주목을 받게 되면서 전용기 제작업체들의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봄바르디에는 부사장까지 파견하며 적극적으로 SHJ를 유치하기 위해 공을 들였고 가장 합리적인 가격과 개조비용으로 최석현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경환의 승인을 받은 최석현은 중동부호가 막대한 위약금까지 지불하며 인도를 거절한 전용기 한 대가 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주말을 맞은 경환은 최석현의 요청을 받아들여 식구들과 함께 SHJ타운 건설현장을 찾았다. 마무리 공사가 진행하고 있는 SHJ구글과는 달리 그룹사옥은 지하 공간의 난공사로 인해 전체공정의 70%만 진행된 상태였다. SHJ퀄컴의 넓은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정우와 희수의 바라보는 경환의 곁으로 최석현이 다가왔다.

    “회장님, 오늘 모신이유는 저택이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어서입니다. 한번 보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2차 주택단지 공사는 무리 없이 진행이 되고 있죠?”

    “파슨스에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저희가 500에이커의 땅을 확보하고 타운 2차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인지 수의계약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SHJ는 전체공사대금 30억 불 중에서 18억 불을 지급한 상태였고 유동자금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파슨스에 8억 불의 선 지급을 약속해 파슨스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SHJ가 시 정부에게 500에이커의 땅을 다시 확보해 대규모의 2차 타운을 조성한다는 소식은 건설업계의 화두로 떠오르며 엄청난 로비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공사를 맡고 있는 파슨스는 회사의 역량을 SHJ타운에 쏟아 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야, 희수 데리고 빨리 이리로 와. 우리가 살집 보러가자.”

    정우가 도망 다니는 희수를 쫒아가고 있을 때 수정이 경환의 팔짱을 살며시 끼며 최석현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정우가 어렵게 희수의 손을 잡고 차에 올라타자 알의 지휘에 맞춰 차량은 중앙에 위치한 그룹사옥을 지나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알의 무전을 받은 검문소 보안직원들은 바리게이트를 치워 경환의 차량을 무사통과 시켰다.

    “와, 아빠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공사 중인 저택에 도착하자 정우는 탄성을 지르며 뛰어 나갔고 희수가 뒤뚱거리며 정우의 뒤를 쫒아 나갔다. 골프클럽하우스가 연상될 정도로 고풍스러운 저택이 눈앞에 펼쳐지자 경환의 가슴은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설계도로만 확인했을 뿐 오늘 처음 눈으로 확인한 저택은 상상이상으로 거대했다.

    “4,300평방미터로 지상 2층, 지하 2층 구조입니다. 지상 층은 침실 8개를 비롯해 정우와 희수의 공부방과 놀이방,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소형극장은 따로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회장님의 사생활을 최대한 보호하는 차원에서 주방과 집사와 하우스메이드들이 머물 숙소는 독립적으로 조성이 됩니다. 지하 1층은 서재와 회의실, 헬스장이 들어서고 수영장은 지하 2층과 실외 두 곳에 설치될 예정입니다. 현재 경호팀과 보안팀의 숙소를 저택과연결시키는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평수로 1,300평이나 되는 저택은 중세의 성 자체였다. 경환은 저택에 들어가 하나하나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정우와 희수의 안전을 위해 차마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자기 보기에는 어때?”

    경환은 엄청난 규모의 저택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수정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수정의 볼에 입을 맞췄다.

    “놀,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어요. 정말 우리가 살집이 맞는 거예요?”

    “맞습니다. 사모님. SHJ 회장님이 머무실 곳인데 이 정도는 돼야죠. 인테리어와 관련해 직원이 사모님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석 달 후면 이곳에서 생활을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직원을 보내시기 전에 미리 연락을 주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최 사장님.”

    최석현에게 고마움을 전한 수정은 아직 공사 중인 저택 주위를 뛰놀고 있는 정우와 희수가 염려되었던지 급히 아이들 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경환은 주택단지 안에 자신의 저택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최석현과 린다, 황태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SHJ 회장의 저택은 상징성을 지녀야 된다는 세 사람의 의견과 경호를 위해서는 주택단지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알의 제안에 경환도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저택에서 바라보는 SHJ타운의 전경은 경환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남들보다 한 발짝 앞서며 성공가도를 달려왔지만, 점점 그 간격이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MS의 견제와 애플과 오성의 추격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 SHJ타운은 푸근함을 경환에게 선사하며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지하공간은 5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파슨스의 인력을 배제하고 SHJ플랜트가 독자적으로 공사를 수행하다 보니 일정보다 많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조급해 하지 마세요. 보안이 더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가셔야 될 거 같습니다.”

    손짓으로 수정을 부른 경환은 더 놀고 싶어 칭얼거리는 정우와 희수를 안아들고 차에 올라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SHJ타운을 빠져나갔다.

    한국은 정부 주도의 재벌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아동엔지니어링을 SHJ에 넘긴 아동그룹도 서슬 퍼런 정부의 칼 앞에 최준석이 구속되며 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었고 2월이 되자 소문으로 떠돌고 있었던 신아동그룹의 회장을 외화밀반출 혐의로 구속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공정한 잣대를 적용하지 않고 정부의 입맛대로 진행되고 있는 재벌개혁은 살아나려는 경제에 큰 불안감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IT산업을 미래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아래 벤처열풍이 한국을 몰아치고 있을 때, IT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SHJ의 투자와 대외 홍보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한국정부는 수차례 경환의 방한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공정하지 못한 재벌개혁에 실망한 경환은 이를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신아동그룹 회장이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있던 경환은 하루나의 보고를 받으며 급히 컴퓨터 모니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김준성 사장님. 하루나는 황태수 사장님을 불러주세요.”

    “회장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들고 왔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경환은 대후건설의 사장으로 승진한 김준성을 반갑게 맞이했다. 며칠 전 면담을 요청한 김준성의 제안에 많은 고민을 하던 경환은 순순히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알제리 입찰에서 김준성의 도움을 잊을 수 없었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제리 이후 대후에 소홀했던 점, 이해 바랍니다.”

    “SHJ엔지니어링을 설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SHJ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대현중공업과 오성건설이 SHJ에 중요한 파트너인 것은 알지만, 대후에게도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김준성의 말은 경환의 양심의 가책이란 걸 느꼈다. 알제리 입찰은 대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성공하지 못했다는 걸 경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제리 입찰 이후 대후와는 더 이상 합작 사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건 플랜트 공사가 짧게는 2년에서 4년까지 가는 장기 공사가 대부분인 상태에서 대후그룹의 몰락으로 모든 부담을 SHJ가 떠안을 수 없다는 경환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일 때 황태수가 들어와 반갑게 김준성과 인사를 나누었다.

    “어이쿠, 제가 김 사장님을 많이 섭섭하게 했나 봅니다.”

    “회장님, 섭섭한 건 절대 아닙니다. 단지, 그룹사정이 워낙 좋지 못하다 보니.......”

    금융권을 압박하며 대후의 자금줄을 막는 한국정부에 목줄을 빼앗기기 일보직전인 대후의 사정에 대해 알고 있던 경환은 웃음기를 거두고 김준성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신아동그룹 회장님이 구속되고 다음은 대후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군요. 김 사장님께서 오늘 저를 만나시려는 목적이 그 소문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신아동이야 정치자금 문제로 정부의 눈 밖에 난 기업이지만, 대후는 다릅니다. 이번 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의 지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토사구팽이라니 말이나 됩니까?”

    국민의 정부와 대후의 밀월은 80년에서 시작돼 경제적 지원과 정책지원을 대후에서 맡아 줄 정도였다. 정권교체가 성공하자 대후는 유동성 자금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쌍용자동차를 인수해 재계를 놀라게 했지만, 그때부터 대후는 서서히 몰락의 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부채도 자산이라는 주장으로 경제 관료들의 집중 견제가 시작되고 관료들에 의한 청와대와 대후의 분리작업이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었다. 대후에 타격을 주기 위해 경제부처에서는 CP(기업어음) 발행한도를 규제함과 동시에 회사채 발행한도까지 줄여버리자 대후의 자금압박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침을 튀기는 김준성의 분노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대후그룹도 떳떳한 입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회사채와 CP까지 막혔다고 들었습니다. GM과의 50억 불 합작에 올인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GM이 과연 대후를 도와주겠습니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GM 역시 우리를 노리고 있으니까요.”

    대후의 세계경영은 30년간 협력관계에 있던 GM과 대립관계를 만들었고, 동유럽으로 무섭게 진출하는 대후자동차에 의해 GM은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 기댈 곳이라고는 GM밖에 없었던 대후는 GM과의 50억 불 합작에 목을 매달고 있었지만, GM은 역으로 대후자동차를 인수할 작전을 짜며 한국 정부와 물밑협상을 하고 있었다. 경환이 안타까움에 빠져들고 있을 때 갑자기 김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회장님,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김 사장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김준성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경환과 황태수는 급히 김준성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김준성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저는 대후맨이란 자긍심을 지금 이 순간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분식회계에 외상 수출 등으로 많은 문제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후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IT산업과 관련해 회장님의 방한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정부를 설득해 주십시오. 대후자동차를 GM에 넘겨 줄 수는 없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그 전에는 아무 대답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겨우 김준성을 일으켜 자리에 앉혔지만, 경환은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자동차 업계와 한국정부가 얽혀져 있고 경제 관료들이 대후 죽이기에 나선 상태에서 경환으로써도 대후를 살릴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준성에게 진 빚은 여전히 경환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조만간 부모님을 찾아 뵐 예정으로 있습니다. 한국정부와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말은 건네 보겠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김준성을 경환은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회사를 위해 무릎까지 꿇는 김준성에게 경환은 어떠한 위로도 해 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