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55화 (132/264)
  • #155

    다시 사는 인생 - 155

    “누가 자네를 미행한단 말인가?”

    얼굴색을 바꾸며 정색을 하고 나서는 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환은 위스키를 입으로 넘겼다. 니글니글한 딕의 면상에 위스키를 퍼붓고 싶었지만, 추측만 할뿐 딕이 배후에 있다는 증거는 사실 없었다.

    “무선통신과 관련해서 국방부가 신경을 쓰는 거 아닌지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신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를 꺼낼 때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개입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이 국방부로 책임소재를 넘기는 건 문제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라 판단한 딕은 경환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이런 썩어빠질 민주당 놈들 같으니라고. 펜타곤에 연줄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함 나서보세.”

    민주당으로 책임을 돌리는 딕을 바라보던 경환은 이정도로 문제를 덮을 생각이었다. 딕의 입장에서 SHJ를 곤란하게 만들 방법은 많았지만, 대선이 2년 앞에 두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자제할 것이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딕이 백악관에 부통령으로 입성한 후였다.

    “이번 일을 당하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저만 떳떳해서는 안 되더군요. 제 정치적인 성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딕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선통신과 인터넷이 21세기를 주도하는 분야라는 것은 여러 경로의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중동의 판세를 새롭게 짤 계획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플랜트와 무선통신, 인터넷으로 사세를 넓히는 SHJ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떠오르는 SHJ를 자신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공화당 후보경선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속보이는 짓을 할 정도로 딕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시민권을 취득했으니 자네의 정치적 성향을 밝히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네.”

    “우선은 공화당과 민주당에 매년 500만 불씩 정치후원금을 기부할 생각입니다.”

    딕은 입맛을 다셨다. 경환을 압박해 자신의 손아귀에 쥘 계획이었지만, 홍콩계좌와 미행을 먼저 거론하자 페이스를 잃어 버렸다. 똑같은 정치후원금을 기부해 어디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생각한 딕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경환의 머리에 총이라도 겨누고 싶었다.

    “기업가라면 어디 한곳에 치우치지 않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지. 자네의 생각을 십분 이해하네.”

    “하하하, 이해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딕. 사실 SHJ의 정치후원금이 한곳에 몰리게 된다면 까다로운 일들이 많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딕의 불편해하는 표정을 확인한 경환의 입 꼬리가 살짝 말아 올려졌다. 잔을 들어 위스키 향을 맡던 경환은 감았던 눈을 떴다.

    “제 개인적으로 AEI(미국기업연구소)에 매년 200만 불의 후원금을 기부할 생각입니다. AEI가 추구하는 방향이 제 마음에 들더군요.”

    미국의 자유와 자본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AEI는 미국 공화당의 싱크탱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연구소였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네오콘이 AEI를 장악하면서 AEI는 신보수주의 집단의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네오콘의 실질적인 정책 연구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경환이 AEI에 관심을 보이자 딕은 반갑긴 했지만, 전적으로 경환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자네가 AEI에 기부할 생각을 할 줄 몰랐네. AEI에서 자네의 기부를 상당히 반길걸세. 그런데 말이지, 제임스 자네는 차기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명분만 얻을 수 있다면 중동이나 동북아시아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당근보다 채찍이 효과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경환의 입에서 의외의 답변이 나오자 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AEI에서 차기 행정부의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아직 외부에 알려질 내용은 아니었다.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결정이 되고 민주당의 차기 주자로 확실시 되는 앨 고어와의 정책대결에 맞춰 준비하고 있던 팍스아메리카의 재건이 경환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딕은 입을 닫은 후 탄음을 흘렸다.

    “대화를 통해 북핵이나 중동사태를 해결하려는 민주당에 국민들은 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 단지 국민들의 마음을 읽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미국 위주의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AEI의 방향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위스키를 마시며 한참동안 경환을 바라보던 딕이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제임스 자네가 나보다 더 과격한 사람일 줄 짐작도 하지 못했었네. 그동안 자네의 의중을 내가 몰랐었어.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자치 정부의 수장이라면 북핵을 어떻게 처리하겠나?”

    경환의 입으로 묘한 미소가 순간 흐르다 사라졌지만, 딕은 눈치 채지 못했다.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어야 될 시기가 왔다는 것을 느낀 경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국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다면 선제타격으로 북핵을 지워버려야 된다고 봅니다.”

    예상했던 대답과는 다른 답변이 나오자 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하지만, 한국계인 경환의 입에서 선제타격을 거론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일정부분 한국이 국지전의 피해를 볼 수도 있을 텐데, 자넨 선제타격을 찬성하다니 의외로군.”

    “문제는 중국을 설득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중국을 설득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선제타격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그 여파에 휩싸이게 되지 않겠습니까? 클린턴 행정부도 선제타격을 강행하지 못한 이유가 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군수업체를 등에 업은 네오콘은 강력한 선제타격으로 끊임없이 클린턴 행정부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자신들도 선제타격은 최악의 선택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국민들의 여론을 얻고 민주당 정부의 힘을 빼기 위한 정치적 술수에 불과했다. 입으로는 선제타격을 외치지만, 선제타격이 어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피력하는 경환의 주장을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제임스 자네의 식견에 감탄했네. 주지사가 다음 달에 휴스턴을 방문하게 되는데 주지사와 식사나 같이 하세나.”

    “저야 영광이지요. 그리고 제가 GSM의 WCDMA와 경쟁을 하는 걸 아시리라 봅니다. 그동안 유럽이 장악하던 무선통신을 이젠 미국이 선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외람된 말이지만, 전 은원관계가 확실한 사람입니다. 혼자 죽지도, 그렇다고 혼자 살지도 않을 겁니다.”

    웃음기를 거두고 자신을 노려보는 경환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딕은 시선을 돌렸다. 은밀하게 조사되던 홍콩 자금내역을 시작으로 AEI의 정책방향까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환이라면 자신의 치부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자신이 가한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펜타곤에서도 밝히지 못한 정보조직과 다시 거래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딕은 인상을 찡그렸다. 지난번 만남과는 전혀 다른 사람과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경환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그 조직과 다시 손을 잡았다면 그동안 불법적으로 저질러온 자신의 치부가 경환의 손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환이나 그 조직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 휴스턴에서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딕의 고민은 깊어졌다.

    경환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고 대결구도로 갈지 많은 생각이 딕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위스키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한 딕이 오랜 침묵을 깨고 나섰다.

    “하하하, 나도 자네의 의견에 동감하네. 미국 기업인 SHJ가 유럽 놈들한테 끌려 다닐 수야 없지 않겠나. 공화당이 정권교체를 이루게 된다면 SHJ의 해외시장 개척에 큰 도움을 주게 될 게야. 그리고 자네도 SHJ에 우호적인 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하하하, 역시 제가 딕을 선택하길 잘한 거 같습니다. 아울러 중동이 재편된다면 SHJ플랜트가 복구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다리를 놔 주십시오. 아직 SHJ의 기업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면 우선적으로 딕에게 정보를 주겠습니다.”

    경환이 중동 복구사업을 언급하자 딕은 기가막힌 표정으로 경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뒷배경인 정유와 군수업체들의 도약을 위해 중동에 개입한다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었지만, 경환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혼자 죽지 않겠다는 경환의 말이 딕의 귓전을 때리면서 복잡한 문제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벌집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경환이 제공하는 사전 정보를 입수해 SHJ의 지분을 확보한다면 남는 장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나 하면서 애기를 해 보세.”

    딕과의 신경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로 준비된 음식들이 오르고 두 사람은 긴장감을 풀고 긴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긴장감이 풀어져서인지 아니면 급하게 마신 위스키의 취기가 올라와서인지 경환은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경환이 걱정이 되었던지 알이 생수를 건넸다.

    “딕은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 손을 잡으셨습니까?”

    “한국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란 말이 있습니다. 딕은 곧 백악관에 입성하게 될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최소한 딕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막았다고 생각이 드네요.”

    경환은 이 말을 끝으로 잠에 빠져들었고 알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정신을 겨우 차린 경환은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섰지만, 거실의 불은 꺼져 있었다. 디자인연구소 고문으로 참가하고 있는 수정은 연구소 일과 가사 일을 병행하고 있어 평소와 다르게 경환을 기다리지 못하고 일찍 잠에 취해 있었다. 조용히 옷을 갈아입은 경환은 깊은 잠에 빠져있는 수정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자기 왔어요?”

    눈도 뜨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수정을 경환은 다시 침대에 눕혔다.

    “더 자. 난 아이들 얼굴보고 올 테니까.”

    다시 잠에 빠져든 수정을 확인한 경환은 조용히 아이들 방에 들어섰다. 이불을 발로 차 버렸는지 맨몸으로 자고 있는 정우에게 이불을 다시 덮어 준 경환은 정우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경환의 계획과는 다르게 세상에 나온 정우였기에 경환은 정우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애틋한 감정에 경환은 정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빠, 희수 안아.”

    경환의 모습을 확인해서인지 희수가 눈을 손으로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환은 급히 희수에게 달려가 조용히 가슴을 토닥였지만, 희수는 양팔을 벌려 안아달라는 시늉을 하자 경환은 희수를 안아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래, 아빠가 희수 재워줄게. 우리 공주님은 잠도 없네.”

    “희수는 아빠 좋아.”

    부쩍 말수가 많아진 희수는 경환의 품에 안겨 이 한마디를 끝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아빠도 희수 많이 사랑해. 늦었으니까 오늘은 빨리 자고 내일 아빠랑 또 놀자.”

    희수가 잠들 때까지 희수를 안은 채 거실을 서성이던 경환은 다시 잠에 빠진 희수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소파로 향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곁을 끝까지 지켜준 희수는 경환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다. 비록 자신의 영혼이 마몬의 소유로 되어버렸지만, 경환은 후회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희수를 품 안에 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환의 가슴은 벅차오르고 있었다.

    경환은 잠들어 버린 희수의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예전의 모습 그대로 자신의 품에 다시 안겨 잠든 희수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두 번 다시 희수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힘든 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단지 희수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각오로 선택한 회귀였지만, 예전과는 다른 인생을 희수에게 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경환의 머리를 스쳤다. 바쁜 일상에 얽매여 희수와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 나가는 길이 옳은 일인지 경환은 잠든 희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깊은 사념에 한숨을 내쉬었다. 경제적인 풍요만 있을 뿐 전생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경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순간, 경환의 눈으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기 안자고 뭐해요? 희수는 왜 또 안고 있어요?”

    “희수가 잠이 깼더라고. 침대에 눕히고 들어갈게.”

    안방에 들어오지 않는 경환이 걱정된 수정은 희수를 안고 소파에 앉아 있는 경환을 발견하고 놀랐다. 수정은 경환의 눈에서 흘리는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경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한참을 경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하다고만 생각한 경환의 눈물을 바라본 수정은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것을 느꼈다. 수정은 희수를 안고 일어서는 경환의 등을 조용히 감싸 안았다.

    “자기가 내 남편이고 애들 아빠라는 게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경환은 수정의 체온을 느끼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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