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52화 (12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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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52

    외환위기를 힘겹게 막아내며 국가 부도사태라는 최악의 상황에선 벗어날 수 있었지만, 불패신화로 존재하던 대기업이 쓰러지고 부실 은행의 파산, 부동산과 주식의 폭락 등 만만치 않은 후폭풍으로 국민들의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어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의 터널을 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문민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는 헌정사상 초유의 여야 정권교체로 이뤄져 국민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실패한 경제정책이 국가 부도사태까지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정부는 민주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한국 경제의 기본 방침인 권위주의적 관치재벌경제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섰다. 이에 대한 실행방침으로 강력한 재벌개혁정책, 해외자본 유치, 중소기업과 자영업 육성, IT산업에 투자를 추진하며 바닥으로 떨어진 경제성장률 끌어올리고 실업률을 낮추는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37년 만에 이뤄낸 정권교체는 재벌개혁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공정한 잣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국민정부의 눈은 이미 남북 대결구도를 완화하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어 깊은 수렁에 서서히 들어가고 있었다.

    최준석은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방탕한 재벌 2세란 타이틀을 리비아 공사로 잠재운 그였지만, 금융권을 이용해 서서히 조여 오는 정치권의 압박을 견디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거래 은행장과의 통화에서도 좋은 답변을 받지 못한 최준석은 수화기를 내 던졌다.

    “회장님, 여론까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곧 검찰 수사가 진행될 거란 정보가 들어왔는데 마땅한 대처방법이 보이질 않습니다.”

    최준석은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재벌개혁이란 명분으로 서서히 죄여오는 올가미를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외화 밀반출이란 혐의는 외환위기를 겪은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고 성수대교에서 받은 신뢰를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외화 밀반출에 자유로울 수 있는 그룹이 누가 있다고 이런답니까? 자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제2금융권이 약점을 잡고 늘어지고 있지만, 리비아 정부에서 공사대금을 선 지불 해 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습니다. 그리고 한국통운의 유동자금을 활용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지만, 문제는 아동그룹의 해체를 정부가 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금융권에서 아동그룹의 자금줄을 막고 있었지만, 아동그룹은 자산이 부채보다 많았고 공사의 중단이 우려된 리비아 정부에서도 공사대금을 선 지급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어 큰 위기는 넘길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재벌개혁이란 칼을 빼든 정부는 그 끝을 보고 싶어 했다.

    “내가 호락호락 죽을 수는 없습니다. 아동그룹의 다음은 신아동과 대후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군요. 도대체 이놈의 나라는 정권이 교체돼도 같은 짓을 반복하는군요.”

    재계에선 이번 정부와 척을 진 기업들의 살생부가 은밀하게 나돌고 있었다. 최준석은 얼굴을 감싸 머리를 쓸어 올렸지만, 한국에서 집권 초기 정부에 맞서 살아날 기업은 없을 거라는 자책감에 빠져 들었다.

    “회장님, SHJ를 한번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제리 입찰 때 엔지니어링에 투자를 이경환 회장이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우선 자금압박에서 벗어나야 될 거 같습니다.”

    정기명 사장의 말에 최준석은 잊고 있던 경환의 약속이 생각났다. 단지 지나가는 말로 치부했던 경환의 약속이 물에 빠진 자신의 지푸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준석은 서둘러 SHJ로 향했다.

    강남역 뱅뱅 사거리에 있는 15층 규모의 건물을 300억이란 헐값에 구입한 SHJ는 계열사들의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해 매입한 건물로 이주를 시켰다. SHJ의 아시아 본부를 한국이 유치할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과 기존의 한국기업에서 볼 수 없는 복지정책과 자유로운 근무 환경은 취업 준비생들의 1순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까다로운 인성검사 통과와 철저한 실무능력 검증이라는 인사 채용 정책에 따라 일류대학 졸업자라도 실무능력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쉽게 입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장님, 아동그룹 최준석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경환으로부터 SHJ엔지니어링의 지분 10%를 부여받은 코이치는 JSC의 서자라는 한 맺힌 딱지를 벗어버리고 SHJ엔지니어링을 플랜트 업계의 강자로 만들기 위해 온 정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첫 작품으로 사우디의 열병합발전소 프로젝트를 잭의 도움을 받아 성공시킨 코이치는 두 번째 입찰을 준비하느라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쓸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경환의 지시를 받아 아동그룹과의 만남을 계획하고 있던 코이치는 연락도 없이 쳐 들어온 최준석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이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요즘 힘드시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한국어가 유창하십니다. SHJ가 휴대폰과 MP3라는 제품을 선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JSC 서울사무소장 시절부터 배운 한국어는 어눌하긴 했지만,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최준석의 방문 목적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던 코이치는 경환의 지시를 상기하며 최준석과 자리를 마주했다.

    “이경환 회장님의 생각을 저 같은 노가다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바쁘신 회장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양수겸장을 당한 최준석이 찾아온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여기밖에 찾아올 곳이 없는 최준석이 한편으로 애틋하게 느껴졌지만, 코이치는 동정심을 빠르게 털어냈다. 자신은 최준석을 통해 이득을 취하기만 하면 되었고 정권의 눈 밖에 나 그룹을 통째로 말아먹게 만든 잘못은 최준석 스스로 감당해야 될 짐이었기 때문이었다.

    “잡다한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알제리 입찰 때 약속된 투자를 집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엔지니어링이라는 단서를 이경환 회장님이 붙이긴 했지만, 일시적인 유동자금만 해결된다면 아동그룹은 다시 재기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새롭게 들어선 정부와 척을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SHJ는 현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동그룹과 관련해 저희 회장님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SHJ는 외환위기를 경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현 정부의 지속적인 러브콜을 받고 있었지만, 정치권과 1원 한 장 거래하지 말라는 경환의 엄명에 따라 일절 응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코이치가 명백한 거절의사를 보이자 최준석의 안색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모든 기업들과 금융권이 서슬 퍼런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태에서 SHJ마저 등을 돌린다면 아동그룹은 살아남기 어렵다는 생각이 최준석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다른 방도가 없겠습니까?”

    한국 10대 재벌이란 체면도 조여 오는 검찰수사와 정부의 압박을 감당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최준석의 사정에 코이치는 깊은 탄음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회장님의 사정을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요. 자금압박을 해결하지 못하면 아동그룹은 해체가 되고 리비아공사는 연대보증을 선 한국통운으로 넘어가게 될 텐데, 유동자금만 확보하시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 그렇습니다. 아동그룹은 부채보다 자산이 많습니다. 쉽게 무너질 그룹이 아닙니다.”

    코이치는 경환의 지시를 다시금 상기했다. 여성편력이 심한 최준석은 이미 정치권 실세의 눈 밖에 난 상태로 이번 정권 밑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최준석은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코이치의 다음 말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코이치는 애가 타는 최준석을 아랑곳하지 않고 뜸을 들인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이경환 회장님을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동엔지니어링을 인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리비아 공사가 아동건설의 손에서 마무리 될 때까지 아동엔지니어링에 속한 원천기술의 사용을 인정한다는 조건입니다.”

    아동엔지니어링은 대수로 공사의 핵심 설계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최준석은 코이치의 제안에 쉽게 답변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검찰 조사가 시작되고 자신의 구속이 결정된다면 그룹의 해체를 막을 수단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최준석은 굳게 닫았던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 대신 인수협상을 빠르게 진행을 합시다.”

    의외로 최준석의 빠른 결정은 코이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수로 공사의 핵심기술을 확보함으로 중동 세일즈에 탄력을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기쁨에도 코이치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정권에 의해 잘 나가는 기업도 한 순간에 무너지는 한국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세틀러의 뒤를 이어 출시한 컴페니언은 SHJ의 여유자금에 파란불을 켜주며 구글스토어를 통한 구글의 동반성장을 이끌어 주고 있었다. 적자가 예상되었던 SHJ구글은 구글스토어와 애드센스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가입자 수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려 설립된 지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서는 경영실적을 보여주게 되었다.

    경환이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내용이 지역 방송을 통해 보도되면서, 휴스턴 시민들은 SHJ가 진정한 휴스턴 기업이 되었다며 찬사를 보내주었다. 경환은 이런 분위기가 달갑지 않았던지 모든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장님, SHJ퀄컴의 이주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고급 마감재를 사용해서 그런지 주택단지에 입주한 직원들의 반응도 괜찮습니다. 단지, 소음으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하는 직원들이 제법 많습니다. 파슨스와 대책을 협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랜만에 본사를 찾은 최석현은 이주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서부지역에서 생활 터전을 일궜던 직원들을 동부로 이주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혜택에도 회사를 떠나는 직원들이 속출해 경환의 애간장을 녹였지만,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출시로 더 이상의 이탈은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생활환경이 바뀜으로 인해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많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최 사장님은 작은 부분이라도 직원들의 불편을 사전에 해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최우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퀄컴이 이주를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본사와 구글을 이전하기 위해서는 내년 말까지 공사를 진행해야만 했다.

    “쿡 사장님, 공사비 지불은 마친 상태겠죠?”

    “네, 회장님. 2차 대금 지불은 완료했습니다. 파슨스에서 오히려 놀라더군요.”

    컴페니언의 매출 증가와 SHJ엔지니어링의 입찰 성공은 SHJ의 여유자금을 증가시켰고 시스코에 투자된 주식을 건드리지 않고도 2차 공사대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SHJ의 급성장에 놀란 각종 펀드와 금융권은 제안한 투자액을 세 배로 증가하여 SHJ를 설득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가 보유한 IT관련 주식은 내년 상반기에 모두 처분하세요. 우리가 외부 투자로 보유한 원천기술은 모두 SHJ홀딩스로 이관작업을 마치시고요.”

    “알겠습니다. 저도 IT열풍은 끝자락에 다다르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아동엔지니어링 인수제안이 들어 왔는데 계획대로 진행을 하겠습니다.”

    SHJ엔지니어링이 설립된 후라 아동엔지니어링이나 대후엔지니어링은 사실상 경환의 관심을 더 이상 끌지 못했지만, 헐값에 합병을 할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에 경환은 코이치에게 두 기업의 동향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회장님, MS의 빌 게이츠 회장이 은밀하게 만남을 제의해 왔습니다. 웃긴 일이지만, 애플에서도 같은 제안을 해 왔고요. 세틀러보다는 컴페니언과 구글스토어에 반응을 보이는 거라 생각합니다.”

    두 기업의 제안을 동시에 받은 어윈은 회의가 끝나갈 무렵에야 경환에게 보고를 할 수 있었다. 어윈의 보고를 받은 경환은 MS와 애플의 현재 상황을 비교하며 SHJ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에릭에게 질문을 던졌다.

    “슈미트 사장님. 두 기업을 무시할 정도로 우리의 입지가 크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겠습니까? 저는 전적으로 슈미트 사장님의 의견에 따를 생각입니다.”

    MS OS의 독과점이나 맥 OS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에릭의 의견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에릭은 한참을 고민한 후 입을 열 수 있었다.

    “MS나 애플 모두 우리가 넘어야 될 벽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여력이 아직 거기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면 MS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MS의 빌 게이츠도 탐탁지는 않지만, 독선적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보다는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경환은 수시로 MS의 독과점에 울분을 토해내던 에릭이 MS를 선택하라는 의외의 답변을 듣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SHJ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에릭을 경환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MS의 빌 게이츠 회장과 만남을 주선해 보세요. 제이콥스 사장님과 슈미트 사장님은 저와 동행을 해 주시고요.”

    자신의 생각과 다르지 않는 에릭의 답변에 힘을 얻은 경환은 애플이 MP3 시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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