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다시 사는 인생 - 149
이형우는 노련했다. 한국 재계순위 1위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경환은 이형우의 날카로운 눈빛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표정하나 흐트러짐 없이 커피를 입에 넘긴 이형우는 조용히 커피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글쎄요.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 군요. 오성그룹의 손을 잡을 기업들은 SHJ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그건 SHJ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많은 부문에서 오성과 SHJ는 경쟁을 해야만 된다고 생각하지만, 역으로 본다면 많은 부문에서 협력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두 기업 모두 IT강자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회장님도 저와 같은 고민을 하시리라 생각되는데요.”
세틀러의 출시로 새로운 바람을 휴대폰 시장에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만큼 GSM은 아직까지는 넘기 힘든 철옹성이었기 때문이었다. SHJ가 연구개발에 올인하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CDMA 2000 1X는 GSM의 아성을 파고들게 만드는 중요한 기술인만큼 CDMA 종주국인 한국, 특히 오성그룹과의 협조 내지는 지원이 경환으로써도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형우의 답변은 현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이형우는 경환의 도발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SHJ의 아픈 곳을 찌르고 들어갔다.
“회장님의 고견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만드시네요. CDMA 칩셋을 개발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경쟁의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겠고요. 저희는 오성의 칩셋이 우리의 기술을 침해했다고 보고 법률적인 검토를 시작했습니다. SHJ 내부에서는 중대한 계약위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CDMA의 시장성을 확인한 오성에서는 몇 년 전부터 칩셋 개발을 시작해 완료단계에 와 있었다. SHJ의 경고에도 자체기술력을 확보한다는 이형우의 방침 하에 진행된 칩셋이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SHJ에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가랑비에 옷 젖을 수도 있다고 경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하하, 제가 원래 욕심이 좀 많습니다. SHJ의 원천기술을 침해하지는 않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SHJ퀄컴의 칩셋의 시장을 잠식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하고요. 좋습니다. 비록 개발이 완료되었긴 하지만, 깨끗하게 포기하겠습니다.”
꼬투리를 잡아 이형우를 몰아세우려던 계획이 깔끔하게 포기하겠다는 이형우의 말에 경환은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IMT 2000이라는 3세대 무선통신 경쟁에서 GSM의 WCDMA 방식에 참패를 기록하게 되는 CDMA 2000 방식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도 오성그룹과의 업무제휴가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칩셋을 포기하겠으니 넌 무엇 주겠냐는 식의 이형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 제가 파 놓은 함정에 오히려 저를 빠트리게 하시니, 회장님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SHJ와 어떤 관계를 원하시나요?”
경환이 엄살을 피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형우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런 허허실실 전법을 통해 상대의 허점을 집요하게 노리고 들어와 한순간에 역전을 시키는 경환의 전략은 오성그룹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오성은 메모리반도체의 강점을 가지고 비메모리반도체 부문에 그룹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0년 이후 발전하는 IT분야에 오성그룹과 SHJ가 동반자 역할을 하며 개척해 나가고 싶습니다.”
“흠, 현재 TSMC에서 생산 중인 칩셋 물량을 원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아울러 건설과 중공업의 플랜트 합작도 필요하시겠죠?”
SHJ에서는 R&D(연구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오성그룹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선정하고 끊임없는 구애에도 칩셋 생산물량을 주지 않고 있었다. 말을 돌리며 자신의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는 이형우의 전략에 경환은 직설화법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런 식의 대화라면 밤을 새도 본론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과 이형우에게 끌려 다닐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경환의 판단이 주요했는지 이형우의 입 꼬리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경환은 급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칩셋 물량과 플랜트 합작 당장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성그룹에 쌓여가는 기술이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제 목을 날릴 수도 있는데, 동반자가 되자는 회장님의 말씀만 가지고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네요. 회장님이 저라면 어떤 판단을 내리시겠습니까?”
이형우는 쉽게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CDMA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고 플랜트의 다크호스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에서 호시탐탐 1위의 자리를 노리는 기업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기술을 넘겨준다는 것은 경영자로써는 실격이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골치 아픈 답변을 원하십니다. 저라면 칩셋물량을 주지도, 합작을 하지도 않을 겁니다. 이 회장님 말씀대로 부메랑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렇게 긴장감을 맛본지가 언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의외의 솔직한 답변에 경환은 살짝 당황하며 묘한 웃음을 입가로 흘렸다.
“솔직한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이 회장님 말씀대로 변화하는 IT산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독불장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조건을 들어 주신다면 TSMC와의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물량의 반을 오성에 넘기는 것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그러나 플랜트 부문은 대현중공업과 겹치지 않는 분야에서의 합작만 가능하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현전자의 휴대폰제조를 인수하면서 대현중공업과의 업무제휴를 약속한 경환은 우선권을 대현중공업에 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대현그룹과의 관계가 오성보다는 밀접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형우는 경환의 내민 조건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대현그룹과의 관계는 잘 알고 있습니다. SHJ의 조건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저는 플래시메모리 개발에 진출을 하고 싶습니다. 뭐 생산시설을 갖추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SHJ는 이 분야에 상당한 연구개발비를 할당해 놓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플래시메모리 사업에 적극적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오성과 공동으로 연구하며 플래시메모리에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세계 최초로 1G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면서 강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오성그룹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올려놓으려는 경환은 급할 것이 없었다. 지금은 이형우가 자신보다 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한대로 이형우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지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은 곳을 바라보며 코도 풀지 않고 플래시메모리에 진출하려는 경환이 괘씸했다.
“물론 SHJ의 기술력이 더해진다면 개발속도는 빨라지겠지만, 많은 투자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을 아시리라 봅니다.”
명백히 거절의 뜻을 보였다. 경환으로써도 MP3의 출시가 얼마 남지 않았고 스마트폰을 생각한다면 플래시메모리 분야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형우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경환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라도 회장님과 같았을 겁니다. 그러나 플래시메모리의 강자는 아직은 도시바란 것을 회장님도 부인하시지 못하실 겁니다. 제가 오성과의 합작을 제안했듯이 도시바에선 우리에게 손을 내밀더군요. 오늘 회장님과의 대화 즐거웠습니다.”
이형우의 머리는 복잡해져 갔다. SHJ가 도시바와 손을 잡고 플래시메모리 분야에 진출하게 된다면 상황은 자신의 예측을 벗어나 혼전양상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형우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틀러에 의해 휴대폰 생산에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한 이형우는 SHJ가 도시바와 손을 잡는 것은 막아야만 했지만, 쉽게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허허, 이 회장님을 당할 수 없군요. 그러나 쉽게 답을 드리지 못하는 것도 이해를 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옵션을 하나 추가하겠습니다. CHINA UNICOM과 계약을 하면서 수입 설비업체를 SHJ가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자격을 맞춰 주신다면 오성에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오성도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이형우는 빠르게 머릿속에 있는 계산기를 두들겼다. CDMA는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비롯해 동유럽으로 진출을 하고 있었고 CDMA 설비를 중국에 공급하게 된다면 이 분야의 선두에 올라 설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올가미를 쳐오는 경환의 철저함에 이형우는 혀를 내둘렀다.
“좋습니다. 실무진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이 회장님과 신경전을 벌였더니 허기가 드네요. 좋은 곳에서 밥이나 한 끼 사십시오.”
“하하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모실 테니 같이 나가시죠.”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형우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큰 틀의 합의를 마친 상태에서 오성그룹 실무팀은 린다와 황태수의 집요함과 철저함을 경험할 차례였다. 오성중공업의 회사채와 플래시메모리까지 오성그룹의 밥그릇에 SHJ의 입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스캇, 요즘 정시에 퇴근하던데 그 여자와는 진도 좀 나갔어?”
승연은 두들기던 자판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세르게이 덕분에 자신의 연애사와 특히 아직 여자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회사 전체에 퍼져있었다. 직원들은 승연을 희귀한 동물을 대하듯 했고 특히 여자 직원들은 동정을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승연은 화제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다. 인터페이스 개발에 정신이 없는 승연에게 래리가 곁으로 다가왔다.
“래리 너까지 그러기야? 세르게이에겐 꼭 복수를 하고 말겠어.”
씩씩거리는 승연의 어깨를 치며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많은 반대에도 자신의 고집으로 채용한 승연은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고 있어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직 핵심 연구원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긴 하지만, 두 개의 프로젝트 팀에 참여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하하, 내가 세르게이에겐 입 조심하라고 했잖아. 악의는 없으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스캇의 진가를 몰라주다니 그 여자도 대단하네.”
“말도 마. 포기했어. 스토커도 아니고 싫다는 여자 꽁무니 따라 다닐 생각 없어.”
승연은 하루나의 얼굴이 떠오르자 경기를 일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다는 여자를 따라다닐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여자에게 꼬리를 흔들 정도로 승연의 마음이 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승연의 인상이 구겨지는 걸 재미있는 눈으로 바라보던 래리가 화제를 급히 돌렸다.
“컴페니언이 다음 주에 구글에 오픈되는 거 알지? 보스가 인터페이스 진행상황을 확인하길 원하더라고, 내일 브리핑이 있을 거니까 너도 준비해.”
“내가 왜?”
아직 팀의 중심 연구원이 아닌 자신이 브리핑 자리에 참석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며 출시시기를 저울질 하던 컴페니언의 출시 일정이 확정되면서 승연도 시제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틀러의 인기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시기에 전혀 다른 컴페니언의 출시가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비교적 젊은 인재들로 구성된 SHJ구글에선 그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보스가 인터페이스 개발 팀원 전체를 소집했어. 뭐, 격려를 해 주려는 거 아니겠어?”
승연의 얼굴이 편치는 않았다. 아직 경환은 자신이 여기서 일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직 보여줄 만한 실력을 구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환의 앞에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난 정식 팀원도 아니고 프로그래밍 팀에서의 일도 아직 남아 있는데 좀 빠지면 안 될까?”
“무슨 소리야? 다른 직원들은 제임스를 못 봐서 안달인데 너는 왜 그래? 잔말 말고 인터페이스 팀에 가기나 해. 브리핑 준비한다고 너 찾고 있으니까.”
에릭이 사장으로 경영을 맡게 되면서 구글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비록 올해 적자경영이 예상되긴 하지만, 그건 이윤을 생각하지 않고 연구개발에 무지막지한 투자를 진행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적자였다. 경환은 에릭의 공격적인 영업과 기술개발에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어 SHJ구글 직원들의 사기는 경쟁업체를 누르고도 남았다.
친구처럼 지낸다고는 하지만, 래리는 엄연히 자신의 상사였다. 승연은 래리의 지시에 노트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래리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승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스캇, 너무 기죽지 말고. 내가 수제자인 너를 그냥 놔두겠냐? 네 눈이 돌아갈 정도의 여자를 소개시켜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너도 진정한 남자가 되어야지.”
승연은 순간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한번 돌아봤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 래리를 확인한 승연은 큰 한숨을 내쉰 후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