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48화 (125/264)
  • #148

    다시 사는 인생 - 148

    “아빠!”

    “아바바.”

    현관문을 열고 경환이 집안에 들어서자 희수와 그림을 그러던 정우가 현관을 향해 뛰어갔다. 아직 보행기 신세를 면하지 못한 희수는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보행기를 좌우로 흔들어가며 정우의 뒤를 따라 힘들게 현관을 향했다.

    “내 새끼들, 잘 놀고 있었어?”

    환하게 웃는 정우와 희수를 양쪽 팔로 안아들은 경환은 주방에서 나오는 수정에게 가볍게 입맞춤을 건넸다. 후속모델 디자인 작업과 공모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살피는 작업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면서도 수정은 경환의 퇴근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살림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베이비시터와 가사도우미를 고용한 와중에도 식사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우하고 희수는 아빠 힘드시니까 어서 내려와.”

    “괜찮아. 아빠 씻고 나와서 같이 그림 그리자.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보행기에 희수를 다시 내려놓자 정우는 경환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희수의 보행기를 끌고 그림 그리던 책상으로 향했다. 넥타이를 풀며 남매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는 경환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이 어서 커서 자기 앞가림을 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자기하고 둘이 오붓하게 여행하면서 지낼 수 있을 텐데.”

    경환은 양복 상의를 받아드는 수정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겼고, 수정은 싫지 않은 듯 경환의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서 씻어요. 된장찌개 끓여 놨어요.”

    한국음식만 고집하는 경환의 식성으로 한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SHJ가 중요한 기업으로 휴스턴 사람들에게 자리 잡고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하는 선에서 신경전은 일단락되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경환은 오랜만에 맛보는 된장찌개로 허기를 달래고 그림 삼매경에 빠져있는 정우와 희수 곁으로 다가갔다.

    “아빠, 이거 희수하고 같이 그린 거예요.”

    정우가 건네는 스케치북엔 우주를 날고 있는 세틀러에 올라탄 세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중간 중간엔 희수의 손길로 보이는 울퉁불퉁한 선들이 보이고 있었지만, 상당히 잘 그려진 그림이었다.

    “와, 정말 잘 그렸는데? 희수는 보행기를 타고 세틀러에 올라탔네. 그런데 정우는 어디 있는 거야?”

    “에이, 나는 세틀러를 조종하잖아요. 아빠는 그것도 몰라요?”

    경환은 정우와 희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림을 꼼꼼히 살폈다. 갓난아기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서인지 정우가 그린 그림은 또래 아이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안아달라고 보채는 희수를 번쩍 안아들은 경환은 다시 그림에 집중하려는 정우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정우는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음, 난 그림 그리는 것도 좋은데, 세틀러 조종사가 되고도 싶어요.”

    “그렇구나, 그림을 잘 그리는 우주조종사가 되면 되겠다.”

    정우는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답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웃어 보였다. 경환은 희수를 안은 채 정우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정우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우와 종일 놀아서인지 희수는 경환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그런 희수를 조용히 안아들은 경환은 침대에 희수를 내려놓고 거실로 돌아왔다.

    “커피 한잔 하세요.”

    소파에 앉아 그림그리기에 집중하고 있는 정우를 바라보고 있자 수정이 커피를 한잔 건네면 경환의 옆에 앉았다. 경환은 수정의 머리를 끌어 품안에 안고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었다. SHJ가 그룹경영과 함께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 체제가 정착되면서 경환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희수가 태어나면서 희수나 정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경환의 뜻도 포함되었지만, 책임경영을 정착시키기 위해 중요한 업무결정이나 사업방향을 제외하고는 개입을 줄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HJ 초기부터 경환과 함께 했던 초기 멤버들은 2~3%의 스톡옵션 통해 수억 불의 가치를 지닌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경환은 식구들과는 나눠먹는다는 생각으로 전문경영인에겐 계열사 총지분의 25%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5~10%의 지분을 주는 방식으로 그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전문경영인이 아니면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래리와 세르게이가 유일했지만, 전문경영인과 엔지니어를 우대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어 이후 SHJ와의 합병을원하는 기업이 줄을 잇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출품작이 많다고 들었는데 공모전은 잘 되고 있지?”

    경환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 수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삐죽 내미는 수정이 마냥 귀여웠던지 경환은 수정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전문 심사위원들이 참여를 하고는 있지만, 일차로 걸러진 작품들 모두 저에게 오고 있어요. 디자인 전공도 아니고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세틀러도 자기가 말한 걸 그린 거 밖에는 없잖아요.”

    세틀러 도안자가 수정이란 것이 알려지게 되자 SHJ내부나 외부에서는 수정을 SHJ 수석 디자이너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정은 사람들의 이런 생각에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긴 잘할 거야. 출품작 선정하는 거 같이 봐 줄까?”

    “그럴래요? 자기가 봐 주면 나도 힘이 날 거 같아요.”

    경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정은 노트북을 펼쳐들고 사진으로 찍어 전달된 출품작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수많은 작품들이 노트북 화면으로 지나가고 있었지만, 기존의 틀을 깨며 새로운 발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자기가 보기엔 어때요? 간혹 눈에 띄는 작품이 보이긴 하지만, 세틀러를 이길 만한 작품은 없어 보이지 않아요?”

    “흠. 나도 자기 생각과 같아. 휴대폰은 이래야 된다는 선입견이 너무 강한 작품들밖에 없는 거 같아. 아직 출품기간이 남아있으니까 포기하지는 말자고.”

    울상을 짓는 수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경환은 아직도 그림그리기에 집중하고 있는 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츠미와 저녁을 함께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나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비워지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SHJ엔지니어링이 설립되고 본격적으로 해외 입찰준비를 하게 되자 코이치는 식구들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하루나는 같은 일본인이면서 자신을 친동생처럼 대해주던 나츠미가 서울로 이주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좋은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츠미는 SHJ 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날 때까지 밝은 표정을 지으며 한국으로 떠나는 나츠미를 축하해줄 수밖에 없었던 하루나의 눈으로 가느다란 눈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빵, 빵’

    신호가 파란 등으로 바뀐 것도 모른 채 멍한 상태로 핸들을 잡고 있었던 하루나는 뒤차의 경적을 듣고서야 급히 차를 움직였다. 텅 빈 집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하루나에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하루나는 뒤따라오는 인기척에 긴장하며 발걸음의 속도를 서서히 높였다.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애써 무시하려 애쓸수록 인기척은 점점 가까워져 하루나의 불안감을 서서히 자극하기 시작했다. 뛰다시피 달려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사정없이 눌러대며 문이 열리기만을 간절히 바랐지만, 엘리베이터 보다는 인기척이 빨랐다. 이마에서 떨어지는 식은땀과 함께 눈을 감아버린 하루나의 귀에 어눌한 영어가 들려왔다.

    “바쁘셨나 봐요. 그동안 통 얼굴을 볼 수가 없던데.”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하루나는 구석진 곳으로 급히 몸을 숨긴 후 그제야 자신에게 말을 건넨 사내를 바라 볼 수 있었다. 몇 주 전 옆집으로 이사 온 사람이란 것을 확인한 하루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9층이시죠?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저는 스캇 리라고 합니다.”

    나츠미의 한국행으로 쳐진 기분은 스캇이란 사내의 질문에 대꾸하는 거조차 허락하고 있지 않았다. 스캇이란 사내는 하루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나의 입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하루나는 사내의 시선을 무시하고 열쇠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이봐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어도 쳐다봐 주는 게 사람의 도리입니다. 싫으면 싫다고 말이라도 한 마디 해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옆집에 살면서 이거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사내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하루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하루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몇 번이고 사내를 밀치고 집에 들어가려 했지만, 힘으로 이길 수 없었던 하루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 휴대폰을 핸드백에서 꺼내들었다.

    “질문에 대답해 드리죠. 싫어요. 싫다고요! 더 이상 방해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으니 빨리 집 앞에서 물러나 주세요.”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사내의 손을 밀치고 나서야 하루나는 집에 들어설 수 있었다. 급히 문이 닫히는 것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내는 얼굴을 찡그리며 발길을 돌렸다.

    ‘젠장, 내가 앞으로 너한테 말을 걸면 사람새끼가 아니다. 지가 예쁘면 얼마나 예쁘다고 사람을 무시해. 쓰벌, 쪽 팔려 죽겠네.’

    제대로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사내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세르게이, 너 때문에 얼굴을 들고 회사를 못 다니고 있거든. 지금 너희 집 쳐들어가니까 술이나 준비해 놔. 내가 오늘 래리한테 플레이보이 잡지까지 선물 받았다. 오늘 너 죽고 나 죽어 보자고, 이 인간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SHJ 회의실 전체를 감싸며 회의실로 향하는 긴 행렬을 맞이하고 있었다. 경환은 린다와 황태수를 이끌며 앞서 나가 악수를 건넸다.

    “SHJ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형우 회장님.”

    “하하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경환 회장님.”

    회의실에 마주 앉은 두 그룹의 임원들은 덕담을 서로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경환을 얕보다 여러 번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이형우는 아들과 비슷한 나이인 경환을 기업가의 시선으로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재벌 2세란 핸디캡을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기기로 털어버린 이형우를 경환도 만만히 대할 수 없었다.

    “이번 오성중공업 회사채 발행에 SHJ가 참여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28%의 이자를 보고 참여를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겠습니까? 좀 심하시긴 하셨습니다. 우리 판단으로는 회사채를 발행할 정도의 위기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는데, 역시 정부의 눈을 돌리는 방법은 회사채 발행이 제격이지 않겠습니까?”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로 오성물산과 오성중공업을 통해 28%의 이자로 회사채를 발행했지만, 경환은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판단을 내리고 급히 1억 불의 자금을 투자해 오성의 회사채를 매입해 버렸다. 경환과의 끈을 연결하기 위해 회사채를 부각시키려던 이형우는 뼈있는 말로 응수하는 경환의 능글거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정부의 눈을 돌리다니요. 그건 회장님이 오해를 하신 거 같습니다.”

    이형우를 대신해 탁주훈이 나서자 경환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탁주훈을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고 있음을 느낀 황태수가 급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탁주훈을 지적하고 나섰다.

    “지금 이 자리는 탁 실장님이 나설 자리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럼 제가 오성그룹 회장님께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탁 실장! 내 얼굴에 먹칠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자중 하세요. 이경환 회장님, 제 직원을 대신해 사과를 드립니다.”

    탁주훈을 통해 경환의 반응을 살피려던 이형우는 초반부터 SHJ가 만만치 않게 반격해 오자 급히 머리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경환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들뻘인 자신에게 머리까지 숙이는 이형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과거 이형우에 대한 소문만 가지고 판단을 내리려 했던 경환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이형우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딕 체니가 자신의 뒤를 신경 쓰이게 하고 있는 지금 오성그룹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경환은 굳었던 얼굴을 풀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좀 민감했나 봅니다. 실무자들끼리 할 얘기가 많을 거 같은데, 회장님은 저와 따로 자리를 하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커피를 아주 잘 내립니다.”

    “하하하, 그게 좋겠습니다. 이 회장님이 내려주시는 커피를 맛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요.”

    경환은 황태수에 실무협상 진행을 맡기고 하루나를 앞세워 이형우를 자신의 집무실로 인도했다. 경환은 직접 커피를 내려 이형우에게 건네고는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SHJ 회장님이 내려서 그런지 커피가 아주 맛있습니다. 하하하.”

    이형우의 너스레를 웃으며 바라보던 경환은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 SHJ와 오성그룹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동안은 오성그룹의 작전을 SHJ가 방어하면서 역공을 펼쳤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틀러의 출시는 회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도 하고요. SHJ와 오성그룹이 어떤 관계를 만들어야 된다고 보십니까?”

    미소를 머금고 커피의 향을 즐기던 이형우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경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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