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47화 (12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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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47

    세틀러의 인기에 힘입어 SHJ퀄컴의 매출은 급격한 상승곡선을 보였고 이에 대한 반사이익이 그대로 SHJ구글까지 흘러들어, 야후를 위협하는 차세대 검색엔진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플랜트사업에서 시작해 무선통신과 인터넷으로 까지 업무를 확대한 SHJ의 성장에 아메리카드림을 이룬 경환의 성공담이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경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국의 주요인사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다.

    “세틀러의 인기에 힘입어 금년도 SHJ퀄컴은 26억 불 매출이 예상됩니다. SHJ플랜트의 예상매출은 15억 불이지만, SHJ엔지니어링의 활약에 따라 40억 불까지도 상승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SHJ구글은 사업 초기인 만큼 8천만 불 수준으로 예상되어 금년까지는 적자경영이 예상됩니다. SHJ홀딩스에서 관리하는 투자주식의 가치는 전월기준 9억 불을 유지하고 있으며 한국에 투자된 6억 불을 제외하고, 현재 그룹의 가용금액은 투자 주식 9억 불을 제외하고 6억 불입니다.”

    93년 린다를 통해 투자된 주식의 가치가 9억 불까지 상승한 이유는 IT열풍이 시작되기 전 시스코에 투자된 1500만 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SHJ타운 건설을 맡고 있는 파슨스에 지급되어야 할 10억 불을 감안한다면 가용금액 6억 불은 아슬아슬한 수준밖에는 되지 못했다. 경환의 SHJ퀄컴의 매출이익 대부분을 연구개발에 재투자하고 있었고 아직 적자를 보고 있는 SHJ구글에도 막대한 개발비를 쏟아 붓고 있어 아직까지는 SHJ플랜트가 그룹의 경영자금 대부분을 맡고 있는 실정이었다.

    “제 예상보다 빠른 성장이라고 봅니다. 제이콥스 사장님과 슈미트 사장님은 기뻐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고, 기술연구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시기 바랍니다. SHJ플랜트에 지고 있는 빚을 갚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네, 회장님.”

    폭풍 같았던 97년이 지나가고 98년의 새로운 해가 시작되자 그동안 움츠려만 있었던 SHJ가 기지개를 피기 시작해 SHJ홀딩스를 시작으로 에이전트, 시큐리티, 매니지먼트, 엔지니어링 등 신규법인을 설립하며 그룹화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것이었다. 회장님이란 호칭이 아직은 어색했던지 경환은 급히 말을 돌렸다.

    “제이콥스 사장님, 공모전은 이상 없이 진행이 되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기업과 개인부문으로 나눈 게 주효했다고 봅니다. 전 세계의 유명 디자인 업체와 디자이너들에게 큰 자극제가 된 것 같습니다.”

    수정의 제안을 받아들인 SHJ퀄컴은 총 상금액 500만 불과 함께 기업에겐 3년간의 아웃소싱 계약을 개인에겐 상금과 함께 수석디자이너 자리를 타이틀로 내 걸었다. 이런 파격적인 SHJ의 공모전이 구글의 광고를 통해 유럽까지 전해지게 되자, 디자인 업체에 소속된 디자이너들이 개인작으로 작품을 출품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 경환은 심사위원장을 맡아 외부의 입김이 작용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공정한 심사를 하십시오. 강조하지만, 경쟁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기술과 함께 디자인이 반드시 접목되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이번 세틀러의 반응을 보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AT&T와 벨아틀랜틱이 아주 몸이 달았습니다. 그런데 노키아 측이 원천기술 교환방식을 통해 CDMA휴대폰 제작에 진출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 왔는데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GSM연합에서 가장 많은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노키아 측의 제안은 의외였다. 오히려 GSM 휴대폰 제작이 절실한 상태에서 노키아 측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국을 시작으로 빠르게 퍼지는 CDMA 시장을 놓칠 수가 없었겠죠. 우리가 디자인과 기능으로 승부하게 된다면 오히려 GSM 시장을 세틀러 시리즈로 점령할 수도 있으니, 나쁜 제안은 아니군요.”

    미국과 한국을 시작으로 세틀러의 인기몰이를 GSM의 강자인 노키아와 에릭슨, 모토롤라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단지 벨소리와 컬러액정 등 기능적인 면을 강조한 후속 모델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뿐, 디자인에는 기존 콘셉트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최석현 사장님, 금년 SHJ퀄컴 입주엔 지장이 없겠습니까?”

    “일정대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10월 입주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 정부와 추가 되는 750에이커에 대한 협상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SHJ는 주택단지 확보와 사설비행장을 운용하기 위해 시 정부와 협의를 하고 있었고 경환은 리 브라운과의 물밑 접촉을 통해 이미 합의를 끝낸 상태였다. 개발 시기는 불투명하지만, 도시가 확대되기 전에 선점을 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최석현의 제안을 경환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계열사 업무보고를 마친 회의실엔 일부 직원들과 함께 박희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새롭게 SHJ퀄컴미디어란 이름으로 합병이 되면서 수석 연구원을 맡고 있던 박희철은 손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첫 미국출장의 긴장감보다도 모든 계열사 사장들인 모인 회의실의 분위기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하는 박희철 곁으로 경환이 다가와 인사를 청했다.

    “박희철 연구원이시죠? 이경환입니다. 한국어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회, 회장님.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을 살갑게 대하며 악수를 청하는 경환에게 고개를 숙인 박희철은 회장이란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을 실감하고 있었다. 박희철은 디지털시스템의 수석 연구원으로 세계 최초 MP3인 가칭 F10 개발을 주도해 왔었다. SHJ는 합병을 성사시킨 후 대대적인 투자를 집행해 한새그룹에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당한 설움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 이번 미국 출장은 시제품인 모델명 F10을 직접 설명하라는 경환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자리였다. 탁자 위엔 이미 두툼한 두께의 F10이 놓여있었다.

    “흠.”

    경환은 둔탁해 보인다고는 설명할 수 없는 F10을 만져보며 깊은 신음을 흘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박희철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MP3는 오성전자의 YP시리즈와 애플을 바닥에서 건져낸 아이팟과 스마트폰 기억이 전부인 경환에겐 F10은 어딘가 모르게 둔탁해 보인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두 회사를 합병하고 원천기술에 대한 라이선스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치고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경환의 인상이 굳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박희철은 급히 입을 열어 F10의 제원을 설명하고 나섰다.

    “모델명 F10은 16MB의 플래시메모리를 장착했고, PARALLEL 전송방식(프린터포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보다도 상업성에 중점을 둬야 되기 때문에 제가 작년 출시를 막았습니다. 이점 이해해 주세요.”

    SHJ가 인수 작업을 진행하면서 F10의 출시를 막은 아무런 이유 없이 막았다. 하루라도 빨리 결과물을 보여주지 위해 노심초사하던 박희철은 아직도 출시를 막은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F10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노래 한곡이 평균 3MB라고 한다면 F10에 최대 8곡 밖에는 저장이 안 된다는 단점과, PARALLEL방식의 낮은 전송속도, 그리고 건전지를 이용한 충전방식이 매출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지적이 나왔던 부분이라 박희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업성까지 고려하는 날카로운 지적이 박희철을 궁지로 몰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계최초로 발명된 제품을 평가절하 할 생각은 없으니 너무 의기소침 하지 마세요. 제이콥스 사장님, F10의 단점을 보완하는 작업은 진행이 되고 있나요?”

    회의실 정면에 위치한 프로젝터에 F10의 단점을 보완한 MP3의 도면이 펼쳐졌다. 기존 F10보다 슬립하면서 모서리를 곡선으로 처리해 둔탁한 모양이 한결 부드러워진 모양이었다. 도면 위에 적혀진 컴페니언(COMPANION)이란 이름이 박희철의 눈에 들어왔다.

    “새롭게 선보일 컴페니언 시리즈는 기본 32/64MB로 저장능력을 향상시키고, USB전송방식과 내장형배터리를 장착했습니다. 다음 달부터 미국과 한국시장에 동시에 출시할 예정입니다.”

    “MP3의 발전은 무궁무진 하다고 생각합니다. SHJ구글에서는 컴페니언 시리즈를 관리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개발을 서둘러 주세요. 음악부터 시작해 동영상과 영화, 서적까지 분야를 넓혀가야 됩니다.”

    어윈과 에릭은 그제야 경환이 퀄컴과 구글에 애정을 보이며 대규모의 투자도 망설이지 않는 이유를 서서히 체감하고 있었다. 기존의 카세트테이프와 CD플레이어는 MP3인 컴페니언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고 이를 관리할 인터페이스는 온라인 마켓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수도 있다는 예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박희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퇴근시간을 넘긴 후에야 회의는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승연은 여러 파트 팀에 속하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는 팀에 참여하면서 인터페이스 개발 팀에 속해 하루가 언제 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래리의 혹독한 교육 덕분인지 승연의 실무 능력은 빠르게 향상되었고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어눌할 영어에도 불구하고 팀원들과 격이 없이 지내고 있었다. 승연은 자신의 뒤로 접근하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해 있었다.

    “스캇, 퇴근 좀 해라. 직원들이 너 땜에 스트레스 받는다고 불평하는 거 못 들었어?”

    긴 회의에 갈증을 느꼈는지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든 세르게이가 승연의 어깨를 손으로 누르며 장난을 쳐 왔다.

    “뭔 회의를 그렇게 길게 한 거야? 그리고 나 오버타임 수당 안 받고 있으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좀 말라고 해.”

    승연은 자신의 모자란 지식을 쌓기 위해 저녁 시간을 활용해 공부에 매진하며 시간외수당을 청구하지 않았다. 세르게이의 농담에 뼈있는 말로 되받아치자 세르게이는 두 어깨를 들썩여 보이고는 승연의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근데 한국인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야? 너도 그렇고 우리 보스인 제임스도 그렇고 무섭다 무서워.”

    “리 회장이 뭐 어떤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승연은 자신의 형 얘기가 나오자 자판에서 손을 떼 의자를 세르게이에게 돌렸다. 자신이 동생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승연은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아, 스캇 너는 제임스를 아직 못 봤지? 너와 같은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카리스마 죽이거든. 퀄컴을 인수할 때만 해도 무모한 투자라고 비난을 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철저히 계획된 투자였다는 것이 오늘 밝혀졌어. 아직 보안이라 너한테는 말해줄 수 없지만, 인터페이스 작업이 완료되면 놀랄 일이 생기게 될 거야.”

    인터페이스 개발 팀과 작업은 같이 하고 있었지만, 일부 핵심 직원을 제외하고는 컴페니언에 대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르게이의 평가가 싫지 않았던 승연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컴퓨터의 자판기에 손을 얹었다.

    “스캇, 넌 연애도 안 해? 네가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은 장식품 이외의 기능은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거 같더라. 야. 너 혹시?”

    세르게이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승연의 자리에서 떨어지며 옷매무시를 바로 잡는 시늉을 하자 승연은 기가 막혔는지 주먹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일 없으면 빨리 퇴근이나 해. 괜한 헛소문 퍼트릴 생각 하지도 말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여자 때문에 고민 많은 사람한테 뭔 소리야!”

    순간, 입 싼 세르게이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자책감에 승연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특종을 잡은 세르게이는 역시나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너 뭐야? 좋아하는 여자 생긴 거야? 그런 당연히 나한테 조언을 구했어야지. 누구야? 어떻게 생긴 여자야?”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세르게이의 질문에도 승연의 입이 열리지 않자, 세르게이는 회사에 소문을 내겠다는 협박으로 승연의 자백을 받아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승연은 세르게이의 어르고 달래는 전략에 빠져 그동안의 일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거 무지 도도한 여자구만. 너 정도면 뭐 A는 아니더라도 B정도는 되는데 말이지. 당분간 일찍 퇴근해서 문 앞을 지켜. 뭐가 되었건 얼굴을 봐야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거니까. 흠, 생김새를 들어보면 제임스 비서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경환의 비서와 비슷하다는 말에 승연의 눈이 반짝거렸다.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되지 않아 승연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과 함께 승연의 계획이 서서히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잠시만, 스캇 너 혹시, 아직 동정이야? 푸하하, 네 표정을 보니 내 말이 맞는 거 같은데? 햐, 스캇이 동정이었다니 이거 무지 큰 뉴슨데?”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세르게이가 빠르게 승연의 자리를 벗어나자,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승연은 내일부터 회사에 퍼지게 될 소문을 생각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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