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46화 (123/264)
  • #146

    다시 사는 인생 - 146

    쇼케이스의 반응은 SHJ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세틀러의 반응이라기 보단 쇼케이스에서 방영된 스타트렉이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공중파들이 앞 다투어 판권을 가지고 있는 파라마운트와 SHJ에 정식으로 방영을 요청을 해 오기시작하면서 부터였다. SHJ가 제안한 세틀러의 제원과 일정기간 동안의 무료광고 조건을 방송사가 받아들임으로서 미방영분까지 더해 30분짜리의 스타트렉 세틀러가 전국으로 방송을 타기 시작했고 스타트렉 골수팬을 중심으로 세틀러의 입소문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스타트렉의 향수를 가지고 있는 시청자들은 현재 방영 중인 딥 스페이스 나인 시리즈와는 별개로 시리즈 종료된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재제작을 강력히 요구하는 상황까지 벌어져 제작사인 파라마운트를 고민에 빠트리게 만들었다.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방송사의 토크쇼들은 스타트렉 세틀러에 출연한 배우들을 모셔가기 위해 전용기까지 제공하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발생했고 토크쇼에 출연한 배우들은 하나같이 SHJ퀄컴의 세틀러를 손에 쥐고 토크쇼를 진행해시청자들의 궁금증을 부풀리는데 일조를 하고 나섰다. 이것은 SHJ의 요청이 아닌 잊혀져가는 자신들을 다시 한 번 화려하게 복귀시켜 준 SHJ에 보답하려는 자발적인 순수한 의도였다.

    9시가 되려면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스프린트 매장 밖으로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매장 밖으로 많은 인원들이 몰리자 스프린트는 일부 직원을 배치해 번호표를 나눠주며 입장순서를 정하는 촌극이 빚어지고 있었다.

    “젠장, 나 같은 놈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80번이 뭐냐고.”

    “네 놈이 서둘렀으면 이 번호표 순서는 한자리 숫자였을 거야. 더워 죽겠으니까 불평은 나중에 하라고.”

    “그나저나 CDMA로 갈아타도 문제가 없을까? 신호가 터지지 않는 지역도 있다고 하던데.”

    “난 상관 안 해. 당분간 뉴욕을 떠날 일도 없고, SHJ가 스프린트와 손을 잡았는데, 곧 해결되지 않겠어?”

    친구로 보이는 두 사내의 대화가 이어지려 할 때 매장 문이 열리고 입장이 시작되었다. 여러 종류의 휴대폰을 모두 무시한 채 모든 고객들이 SHJ퀄컴의 부스로 향하자, SHJ에이전트의 직원뿐만 아니라 스프린트의 직원들까지 고객들을 응대했지만, 몰려드는 고객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스 안에는 세틀러 시리즈와 함께 오성전자의 OSH-290 시리즈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스를 찾은 고객들은 세틀러-1 이외의 제품에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SHJ는 처음부터 이동통신사 파트너를 스프린트로 선정한 것은 아니었다. SHJ의 적극적인 설득에도 AT&T, 벨아틀랜틱, 나이넥스, GTE는 GSM의 안정적인 수입원을 두고 불안정한 CDMA 서비스에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며 확답을 뒤로 미루고 간보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 무료 핸드폰을 제공하는 등 과열된 무선통신업체들의 경쟁에 돌파구를 찾기 위한 전략으로 스프린트가 SHJ에 합작을 제안했고 SHJ는 다른 방도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 남은 선택까지 놓칠 수 없었다. 아직 서비스가 안 되는 지역이 남아 있었지만, SHJ의 대대적인 투자와 맞물려 미 개통지역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동안 정상을 지켜오던 모토롤라의 스타텍의 인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세틀러가 조금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PCS 서비스가 시작된 지도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오성전자를 비롯해 금성전자와 폰택의 삼파전은 각 이동통신사들의 경쟁과 맞물려 극도의 긴장감을 보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5월부터 시작된 한국경제의 추락은 환율이 1600원을 찍은 후 소강상태를 보이며 1300원 대로 후퇴를 하고 있었다. 급격한 경제정책 변화의 첫 타깃인 부실한 종금사들은 정부의 강경한 법집행으로 사주까지 구속시키며 업무정지와 퇴출의 칼날을 들이대자 급격히 위축되어갔다. 이와 동시에 박재윤이 직접 나서 BIS 8%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은행들을 퇴출시킬 수도 있다는 발언이 나오자 종금사 사태를 목격한 은행들 간의 합병이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합병작업에도 참여를 못하는 부실은행 두 곳을 정부가 본보기로 퇴출시키자 금융권과 국민들은 경악했고 야당의 장외투쟁과 노조의 파업이 잇따랐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여당과 야당의 대선후보들이 나서 정부의 독주에 경고를 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박재윤 장관을 경질하라는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었다.

    한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대만과 홍콩이 외환공격을 받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태국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가 연이어 무너졌다는 소식에 국민들은 정부가 경고한 외환위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백기를 들어 투항하자 일본을 시작으로 한국에 투자된 해외자본이 급격이 빠져나가며 환율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준비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던 상황으로 환율은 급격히 상승하며 1400원을 가볍게 넘어서면서 기업과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지만, 정부는 현 상황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리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데 주력했다. 가용외환이 급격히 줄어들자 정부는 그동안 준비했던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박재윤은 장관에 임명된 후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 통화스와프 체결을 위해 협상에 나섰지만,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와는 통화스와프 거래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미국으로 인해 협상은 난항이 지속되었다. 박재윤은 정부가 보유한 미국 국채 전부를 국제결재에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는 말로 미국을 협박하자 이 협박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은 한국과 100억 불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주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호주와 100억 불, 일본과 150억 불, 중국과 50억 불 규모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수 있었다.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총 450억 불의 통화스와프 자금이 들어오자 환율은 1600원을 찍은 후 서서히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환율의 폭등은 기준금리의 인상을 가져왔고,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한 기업들이 쓰러지고 부동산의 폭락을 가져오게 되었다. BIS가 낮은 은행들도 한두 곳 문을 닫으면서 국민들의 체감경기는 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구제금융이나 디폴트, 모라토리엄까지 진행이 되지 않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지만,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형우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토해내기 시작했다. 기아자동차 합병 계획이 정부의 강력한 경고에 무산된 후로 야심차게 준비했던 휴대폰 사업도 강력한 적군의 출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들 도대체 뭣들 하는 인간이야? 이세일 사장, SHJ의 휴대폰 제작은 실패할 거라고 한 말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이게 실패한 건가?”

    회의탁자 위로 세틀러를 신경질적으로 던져 놓은 이형우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이세일을 노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SHJ가 이 정도까지 준비가 되어있었는지 몰랐습니다. STN-LCD 컬러액정이나 4POLY 벨소리는 협력업체들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내용인데 어떻게 SHJ가 먼저 출시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세틀러는 저희의 콘셉트와 너무 흡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콘셉트를 훔쳤다고 SHJ를 고소라도 하잔 소리야 뭐야!”

    이세일은 쏟아지는 질책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콘셉트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STN-LCD만 하더라도 오성전관과 협의만 진행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 이년 내로는 시제품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탁 실장, 지금 상황을 가감 없이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줘 봐.”

    평소 사장단에게 존칭을 썼던 이형우였기에 그의 반말은 사장단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탁주훈은 머뭇거림 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기획실의 분석 자료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세틀러의 출시 이후 판매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생산된 세틀러를 출시한다는 SHJ의 발표에 소비자들의 기대심리가 작용, 휴대폰 구매를 미루고 있다는 것이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야심차게 준비했던 미국진출이 부진하다는 것과 샤프의 STN-LCD 패널이 SHJ를 통해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특단의 조치가 없는 이상 세틀러의 독주는 사실상 막기 어렵다는 판단입니다.”

    PCS 서비스 시작으로 크게 판을 벌려 놓은 한국시장을 세틀러를 등에 업은 SHJ에게 내준다면 그동안의 막대한 투자로 키운 휴대폰사업이 휘청거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오성전관이 국내시장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STN-LCD 액정이 샤프에게 잠식되는 것은 막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이형우의 고민을 키우고 있었다.

    “국내 이동통신사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제일텔레콤과 신세계가 공급계약을 체결한 상태입니다. 다른 이동통신사들도 SHJ퀄컴에 사정을 하는 상황이지만, 주파수광역대의 차이로 시간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세틀러로 인해 가입자들의 이탈을 걱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이형우는 휴스턴을 방문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일정까지 잡아 놓은 상황에서 기아자동차가 문제가 부각되고 연이어 터지기 시작한 외환위기 상황으로 한국을 벗어날 입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 미국행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장님, 이번 판은 뒤집을 방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획기적인 모델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GSM 방식의 휴대폰생산에 주력하면서 국내 PCS는 저가공세로 파이를 형성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됩니다.”

    “이 사장, 당신 마지막 기회란 것을 기억해야 될 거야. 세틀러를 바닥에 처박을 수 있는 신개념의 휴대폰을 일 년 안에 개발하지 못한다면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없을 거란 걸 명심하시오.”

    이세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명백히 자신의 퇴출을 언급하고 있는 이형우의 쏘아지는 눈빛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이세일의 의기소침에 탁주훈은 묘한 미소를 보이며 급히 말을 꺼냈다.

    “SHJ는 신규법인 설립을 마무리하고 그룹경영 선포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축하사절단을 이끄시고 휴스턴을 한번 방문하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탁 실장이 SHJ에 의사를 전달해 보세요.”

    이성을 다시 찾아가는 이형우는 세틀러를 열어 한참을 살피더니 중간부분을 잡아 꺾어버렸다.

    세틀러의 급격한 매출신장은 SHJ를 전 미국에 알리는 가교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었고 애드센스 서비스를 시작한 구글은 세틀러의 광고를 통해 가입자를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후속 제품의 디자인 시안이 늦어짐에 따라 경환의 고민은 점차 가중되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난 희수가 몸을 뒤척이자 경환은 희수를 안아들어 입을 가볍게 맞춰주었다.

    “아바바바.”

    “희수 배고픈가 보구나. 우리 엄마한테 같이 가 볼까?”

    희수는 돌이 가까워지면서 제법 소리를 내는 일이 빈번해졌고 서로 말이 통하지는 않은 상태에서도 둘의 대화는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고 있었다. 희수를 번쩍 안아들은 경환은 정우를 재우고 나와 점심을 준비하는 수정에게 다가갔다.

    “희수가 배고픈가 봐. 내가 희수 먹이면서 같이 먹을 테니까 준비 좀 해줘.”

    “누가 딸바보 아니랄까봐, 희수를 끼고 사네요. 정우가 소외감 느끼지 않게 요령껏 잘 해요.”

    희수를 무릎에 앉혀 희수의 입에 밥을 떠 먹여주던 경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수정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승연이를 더 따르는 거 같아. 사내놈은 좀 강하게 키우고 싶은데. 참, 디자인 작업은 잘 되는 거야?”

    디자인이란 말에 수정의 얼굴엔 그늘이 지기 시작하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생각보다 힘들어요. 세틀러를 넘어서야 된다는 부담감에 샌디에이고 직원들도 방향을 잘 잡지 못하는 거 같고요.”

    세틀러 후속시리즈에 장착될 기능의 업그레이드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문제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자극할 만한 디자인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디자인이 기업 간의 경쟁을 좌지우지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경환 자신은 디자인과는 인연이 전혀 없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나보다는 자기가 잘 알거 아냐.”

    “흠. 디자인은 소비자의 욕구 창출과 피드백, 그리고 미래의 트렌드를 얼마나 빨리 읽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우선 디자인 공모전 같은 것을 열어서 능력 있는 디자이너를 채용하고 기회를 봐서 전문 디자인연구소를 세우는 방향으로 가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정의 말을 되새기며 생각에 빠져들자 자신의 입에 들어오던 밥이 중단되고 있단 사실을 인지한 희수가 식탁을 손으로 두들겼다.

    “어, 어, 희수야 미안.”

    급히 밥과 반찬을 희수의 입에 넣어준 경환은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한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방법일 거 같은데. 난 젊고 신선한 디자이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공모전 그거 괜찮겠다.”

    예전 디자인 팀장과 같이 두 번 실패는 하고 싶지 않았다. 전 세계의 젊은 디자이너를 대상으로 공모전을 연다면 예상외의 좋은 결과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