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45화 (122/264)
  • #145

    다시 사는 인생 - 145

    오늘도 보고서를 챙기고 내일의 스케줄을 파악하고 나서야 회사를 나설 수 있었다. 어둠이 깔린 휴스턴의 밤거리는 고요하기까지 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간단히 저녁을 해결할 샌드위치를 챙겨 엘리베이터에 올라 습관적으로 9층 버튼을 눌렀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고 언제부터인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늦어지고 있었다.

    “저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주차장 끝에서 급한 외침과 함께 사내가 허겁지겁 뛰어 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급히 정지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멈춰 사내를 기다려 주었다.

    “헉, 헉. 감사합니다. 저도 9층인데 같은 층이네요. 전 904호에 삽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통 땀에 젖은 사내가 건넨 인사에도 대꾸를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자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9층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사내는 연신 헛기침을 하며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기분이 쳐져 있는 오늘만큼은 가벼운 인사조차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땡.’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무의식적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앞에 섰다.

    “어? 903호에 계신 분이군요. 하하, 이것도 인연이네요.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적응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어서인지 사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열쇠를 꽂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에도 사내의 목소리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저는 스캇 리라고 합니다. 스캇 리요.”

    승연은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좀 전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입가로 흘렸다. 첫 눈에 빠져든다는 표현이 지금 자신의 심정과 똑 같다는 생각에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이미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큰 포부를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찾겠다는 생각은 출근 첫날부터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대학에서의 전공수업과 나름대로 미국 원서를 구해가며 다방면으로 공부한 것도 래리의 특별교육 앞에 처참할 정도로 박살이 났다. 같은 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래리의 지식은 승연의 상상을 뛰어 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을 각오로 파 들어가면 래리의 발끝엔 도달할 수 있겠지.’

    승연은 뺨을 세차게 내리 친 후 래리가 건네준 책을 펼쳐 들었다. 9시를 훌쩍 넘긴 시계의 시침을 확인한 승연은 집중하기 위해 책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도대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무슨 샴푸를 쓰기에 냄새가 지금까지 나는 건지.’

    승연은 한참을 망설이다 벽에 귀를 대 보아도 벽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맥주를 집어 목 안으로 넘긴 승연은 머리에 찬물을 적시고 책에 집중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미국에 온 이후 회사와 집만 오가며 세 시간 이상 잠들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면서 준비 한 것도 인정을 두지 않는 래리의 문답식 교육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승연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생각으로 절망감을 끈기로 승화시켜 죽을 각오로 래리에게서 전달된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정리된 노트와 책을 가지고 씨름하던 승연의 휴대폰엔 래리의 이름이 찍힌 번호가 뜨며 울려대고 있었다.

    “래리, 무슨 일이야?”

    ‘스캇, 네 집근처 바에서 세르게이와 맥주한잔 하고 있는데 나와.’

    “둘이 마셔. 네가 내준 숙제하느라 정신없어.”

    ‘내가 너 보스라는 사실 잊었어? 환영회도 못했는데, 어서 나와.’

    여러모로 오늘은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는 생각에 펼쳐놓은 책을 덮으며 승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을 나선 후 903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연은 도착음과 함께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집에 돌아온 하루나는 저녁으로 준비한 샌드위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샤워부스로 들어가 쏟아지는 물줄기를 알몸으로 맞고 있었다. 물에 젖은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전면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나신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흠집하나 없는 굴곡진 몸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려가며 마치 자신을 희롱하는 듯 감정 선을 건드리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삶이 경제적으로 풍요롭다하더라도 모든 걸 채워주는 건 아니라는 것이 하루나의 마음을 공허함에 빠지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각오를 하고 온 미국행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하루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양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 하루나는 터져 나오는 설움에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무너져 갔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와 하루나가 쏟아내는 눈물은 서로 섞이지 못한 채 타일 바닥에 떨어졌고 하루나는 오랫동안 바닥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하.’

    감정을 추스른 후 맥주를 꺼내 단번에 들이켰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순간 옆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루나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스캇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사내의 밤늦은 외출에 왜 자신이 신경을 쓰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던 하루나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기 위해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팟.’

    모든 전등이 일시에 꺼지자 웅성거리던 행사장은 일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의자가 배치되어 있지 않아서인지 자리에 서있던 참석자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며 비상구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어느 은하계의 모습이 단상 뒤의 대형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참석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주의 장대한 아름다움에 참석자들의 탄성이 들려올 즈음, 거대한 우주함선이 쏜살같이 스크린을 스쳐 지나갔고, 영상은 선미에서 시작해 우주함선 전체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와, 저거 엔터프라이즈 아니야?”

    “오, 넥스트 제너레이션 시리즈야.”

    화면은 급히 바뀌어 전투 지휘실을 비추기 시작했고, 함장인 장뤽 피카드와 부함장인 윌리엄 라이커, 전술장교인 워프 등 넥스트 제너레이션을 이끈 등장인물들이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현재는 딥 스페이스 나인 시리즈를 방영하고 있었지만,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등장인물이 나타나자, 행사장은 환호와 흥분으로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 전투지휘실은 급박한 상황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엔터프라이즈의 정면으로 정체불명의 거대한 우주선이 나타나 광자포를 쏘기 시작하면서 화면은 전투지휘실의 혼돈과 함선의 방어막이 급격히 피해가 누적되는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곧이어 엔터프라이즈도 페이저 뱅크 레이저를 발사하며 맞대응을 시작하자, 적 함선은 엔터프라이즈의 측면과 후미를 공격하기 위해 검은색의 전투기를 출격시키기 시작했다. 다시 전투지휘실을 비친 영상은 전투기 출격명령을 내리는 장뤽 함장의 모습이 나타나자, 빠르게 출격하는 타원형 모양의 은색 전투기들이 적 함선의 전투기들과 맞서는 장면이 숨 쉴 틈도 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권선징악의 스토리대로 은색 전투기들의 활약으로 전투는 승리하게 되고 전투기를 조정한 윌리엄 부함장과 장뤽 함장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끝으로 대형스크린의 불이 꺼졌다. 5분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신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스타트렉에 대한 향수때문인지 행사장을 찾은 참석자들은 화려한 쇼케이스 시작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엔터프라이즈에 전투기가 있었어?”

    “아니 없던 걸로 아는데, 장뤽이 전투기를 세틀러라고 부르는 거 같던데.”

    영상의 여운이 가시지도 전에 단상위로 청바지 차림의 어윈이 등장하며 대형스크린에는 은색의 전투기 한 대가 변신을 시작하며 세틀러-1이라는 글씨와 함께 SHJ퀄컴의 새로운 휴대폰이 여러 각도로 비춰지고 있었다.

    “행사장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타트렉은 제 삶이기 합니다. 이 영상을 만들기 위해 일주일동안 제임스를 설득하느라 고생을 했더니 목이 다 멥니다.”

    “하하하.”

    어윈의 농담에 행사장은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윈은 청바지 주머니에서 은색의 휴대폰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대형스크린으로는 어윈의 손에 들려진 휴대폰이 확대되어 보였고 어윈은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휴대폰을 열었다. 기존의 휴대폰보다 확연히 큰 액정화면이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하하하, 제가 눈이 침침해서 화면을 좀 키워 봤습니다. STN-LCD 패널을 이용해 컬러를 좀 생각해 봤습니다.”

    직선이라고는 전혀 없는 곡선의 핸드폰은 지금까지의 여러 핸드폰과는 디자인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특히 검은색 일색에서 벗어나 화려한 은색을 사용했다는 것과 컬러액정을 소형화해 휴대폰에 이용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휴대폰이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의 휴대폰은 소비자들의 실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으며 여러분들의 품격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까만 벽돌을 들고 다니시겠습니까?”

    참석들의 표정은 좀 전의 영상에 나온 적 전투선이 모토롤라의 스타텍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SHJ의 광고 전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어윈은 세틀러를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액정화면에 나타나는 컬러화면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어윈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한 손을 이용하여 번호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제임스?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전화 좀 빨리 받으세요.”

    어윈은 짝 다리를 짚으며 구두바닥으로 바닥을 ‘탁. 탁’치고 있을 때 귀에 익은 팝송이 울려 퍼지며 조명이 경환을 비추기 시작했다. 경환은 어깨를 들썩이며 양복 호주머니에서 세틀러를 꺼내 천천히 전화를 받았고, 참석자들은 그동안 단음 벨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벨소리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영화까지 찍게 해 줬는데.”

    “하하하.”

    휴대폰과 연결된 스피커로 경환과 어윈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경환의 농담에 행사장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어윈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세틀러를 노려보았다.

    “제가 주연으로 나서겠다는 걸 반대한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연기학원까지 다녔는데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무슨 말입니까? 어윈이 선택한 거 아닙니까? 영화 주연을 하려면 4POLY의 벨소리 연구를 포기하라고 했잖습니까? 난 잘못 없습니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어윈은 세틀러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나 어윈은 정신을 차렸는지 세틀러를 다시 집어 들어 액정을 급히 확인하는 모습이 대형스크린으로 실시간으로 참석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제임스는 제가 영화계로 진출하는 걸 질투하는 거 같습니다. 세틀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또한 세틀러의 시리즈는 스타트렉과 함께 영원히 지속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후 세틀러-1과 함께 세틀러-2의 제원을 설명하는 화면이 나타나며 화려했던 쇼케이스는 막을 내렸다.

    “제임스, 쇼케이스를 직접 하지 않은 이유라도 있나요?”

    경환의 곁을 지키고 있던 린다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쇼케이스의 주인공이 경환이 돼야 한다고 강력한 린다의 주장에도 경환은 어윈을 단상에 세우도록 지시를 내렸다.

    “아이디어는 제가 제공을 했지만, 어윈의 피나는 노력과 연구가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어윈이 되는 게 맞습니다.”

    어윈은 세틀러를 개발하기 위해 샤프와의 공동연구로 휴대폰에 적용할 수 있는 STN-LCD 소형패널 개발을 완성시켰고 벨소리를 향상시키는 작업에 많은 투자를 집행했다. 경환은 이에 보답을 하기 위해 화려한 쇼케이스를 김창동에게 준비시킴과 동시에 난색을 보이는 파라마운트를 설득해 스타트렉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단 5분의 짧은 영상이지만, 이에 투자된 금액은 웬만한 영화 한편을 찍을 수 있는 150만 불이다 보니 쇼케이스를 준비하기 위해 투자된 금액은 상상을 초월했다.

    대규모의 투자에 난색을 표시한 린다와 황태수를 실패를 하더라도 SHJ에 대한 이미지는 남는다면 큰 손해는 아니라는 말로 두 사람을 설득했지만, 4년이나 앞서 출시된 세틀러-1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행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참석자 대부분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행사장 곳곳에 설치된 SHJ에이전트 부스로 이동해 신제품을 조작하며 눈으로 살피느라 행사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SHJ직원들은 참석자들의 질문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고 있었다.

    “행사장의 열기가 그대로 구매로 직결했으면 좋겠군요.”

    “저는 이제야 제임스가 쇼케이스에 노력을 기울인 이유를 알겠어요. 스타트렉이 압권이었네요.”

    “자, 그만 나갑시다. 오늘 주인공은 SHJ퀄컴이 돼야하지 않겠습니까?”

    세틀러의 출시로 동종업계는 자극과 함께 긴장감이 조성될 것임이 확실한 상황에서 세틀러-1,2의 차기 모델을 빠르게 준비시켜야 했다. 경환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는 어윈을 바라본 후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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