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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44화 (12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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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44

    SHJ는 서울에서 복귀한 린다가 그룹화 작업을 황태수로부터 인수하자 빠르게 개편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휴스턴 시 정부는 롱포인트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는 SHJ의 변모를 환영하고 있었고, 시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SHJ는 그룹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승연이 이 자식은 비행기 도착한 시간이 언제인데 아직 들어오지도 않는 거야?”

    “도련님이 애도 아닌데 뭘 걱정을 해요? 어련히 들어오시겠죠.”

    비자가 해결된 승연은 대학의 동의를 얻어 2학기를 마치기도 전에 한국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승연은 끈질기게 캐묻는 경환에게도 끝내 자신이 다니게 될 회사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같이 살자는 경환의 제안 또한 거절하며 집을 구할 때까지만 머물겠다고 통보를 한 상태였다.

    “희수는 정우와는 다른 거 같아요. 여자애가 잘 울지도 않고 웃기만 해서 한편으로 걱정도 돼요.”

    수정의 말에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희수와 눈을 맞췄고 희수는 여전히 경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글거리고 있었다.

    “희수야. 많이 먹고 빨리 커야 돼. 이번엔 하고 싶은 거 다해 보렴.”

    “이번엔 다하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아니야. 정우나 희수, 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시키겠다는 말이었어. 난 절대 강요할 생각 없거든. 자기도 그랬으면 좋겠고.”

    희수를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에 수정이 되물어오자 경환은 화들짝 놀라며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희수는 경환의 말을 알아듣는 듯 여전히 생글거리며 경환이 내민 손가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빤 희수만 좋아해. 나도 안아 주세요.”

    경환의 품안에 안긴 희수가 샘이 났던지 희수를 밀치며 정우가 비집고 들어왔다. 경환은 그런 정우를 제지하지 않고 다른 손을 들어 정우를 안아 올렸다. 희수가 태어난 후부터 자신의 관심이 희수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했다. 정우의 질투에 미안했던지 경환은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빠는 정우나 희수, 똑같이 사랑해. 희수는 여자고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잖아. 정우가 희수를 끝까지 보호해 줘야 돼. 정우는 씩씩한 남자니까.”

    “헤. 나도 희수 좋아요. 내 말도 잘 듣고.”

    정우는 희수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희수는 정우의 손길이 싫지 않은 듯 입을 벌려 방긋거렸다. 경환은 자신의 양 팔에 안겨있는 정우와 희수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전생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공과 함께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희수가 태어나면서 치열했던 삶을 중단하고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에 며칠을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지만, 안주하는 순간 지금의 행복이 무너질 거란 생각이 경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며 다시금 전투에 나설 것을 강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삼촌이다.”

    경환이 주위를 잊은 채 사념에 빠져 있을 때, 현관을 들어오는 승연의 모습이 보이자 정우가 경환의 품을 벗어나 승연에게 뛰어갔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하하하, 형은 내가 길이라도 잃어버렸을까봐, 걱정하는 거야? 회사에 잠깐 들렀다가 오는 길이야. 정우야, 잘 있었냐.”

    승연은 달려오는 정우를 양팔로 번쩍 안아들고는 볼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자신과 잘 놀아주던 승연과 부쩍 친해졌는지 정우는 승연의 팔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몰랐고, 경환은 배고픔에 보채기 시작하는 희수를 수정에게 맡기고 승연과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네 형수가 많이 서운해 한다. 꼭 나가 살아야 되겠어?”

    “그렇지 않아도 형수가 엄마한테 전화하는 바람에 내가 애를 많이 먹었어. 형수가 걱정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하지 마. 언제까지 형 뒤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잖아.”

    승연의 독립의지가 생각 이상으로 확고하다고 느낀 경환은 더 이상 승연을 잡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승연이 끝까지 함구했지만, SHJ구글에 입사했다는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에릭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신규 채용된 직원들의 명단을 확인하던 경환은 한국 대학에 재학 중인 스캇 리란 인물을 발견하고 이력서를 들춰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승연의 얼굴이 버젓이 이력서에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릭은 같은 한국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경환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래리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채용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독자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는 부서에 배치할 예정이라는 말을 전했다. 경환은 자신에게 SHJ구글에 입사한 사실을 말하지 않는 승연의 고민을 이해하고, 에릭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대견하게 승연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서재 문을 열고 수정이 들어왔다.

    “정우가 도련님을 많이 따르는데, 같이 살면 얼마나 좋아요?”

    “헉, 형수님이 저를 보모로 쓰시려고 같이 살자고 하셨다니. 하하하. 농담이에요. 형수님이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자주 찾아 올 생각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수정은 눈을 흘기며 승연의 등을 가볍게 내리쳤고, 승연은 엄살을 부리며 두 손을 모아 비는 흉내를 지어보였다.

    “그래, 네가 결정을 했으니, 나도 네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야. 네가 선택한 회사이니 만큼 최선을 다해 봐.”

    “걱정하지 마. 형 앞에 결과물을 가지고 당당하게 찾아갈 때까지 지켜 봐줘.”

    아직은 인종차별이 남아있는 미국사회에서 승연이 잘 버텨낼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긍정적인 승연의 모습이 경환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도련님, 제가 해 드릴 건 없고 가까운 곳으로 아파트와 승용차를 구해 놨어요. 이거까지 싫다고 하시면 정말 인연 끊을 각오하셔야 돼요.”

    “그래, 네 형수 맘 상하게 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 살아. 보증금하고 일 년치 월세 이미 지불한 거 같더라. 차는 나중에 돈 벌어서 좋은 거 장만하고.”

    경환은 수정의 부탁을 받고 집과 가까우면서도 승연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원룸아파트를 구했고, 대현자동차에서 수출한 차도 한 대 장만을 해 놓았다. 수정은 승연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고, 승연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 이거까지 싫다고 하면 형수님한테 혼나겠지? 형수님, 감사합니다. 아주 나중에 제가 돈 많이 벌면 다 갚겠습니다.”

    “자식이 떼먹을 생각했나 보네. 나중에 돈 모아서 이자까지 쳐서 갚아.”

    “햐, 고리대금업자보다도 무섭네. 난 사랑스런 조카들하고 놀러 나갑니다.”

    서재 문을 잡고 승연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정우의 모습에 승연을 서둘러 정우를 들쳐 업고 현관을 나섰고, 경환은 수정의 손을 잡아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도련님이 SHJ구글에서 일을 해서요.”

    “내색하지 말자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지 않겠어? 난 지켜볼 생각이야.”

    희수는 뭐가 좋은지 경환의 무릎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승연은 며 칠 더 경환의 집에 머무른 뒤에야 짐을 옮길 수 있었고 휴스턴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회의실 밖으로 SHJ시큐리티 보안팀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었다. 평소 환하게 회의실을 비추던 햇빛까지 블라인드로 막은 채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고 특이하게 경환의 곁엔 수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SHJ에이전트와 공동으로 다음 달 뉴욕에서의 쇼케이스에 맞춰 생산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우선 미국시장에 집중을 한 후 한국시장에 접근할 생각입니다. 한국의 PCS 사업 전에는 한국에서의 생산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윈의 말을 끝으로 길었던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경환은 시제품으로 나온 세틀러(SETTLER)-1, 2라고 이름 지어진 두 가지의 모델을 살피고 있었다. 폴더 폰과 달리 슬라이드 폰은 경환이 생각한 세련한 디자인은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 초 노키아에서 선보인 슬라이드 폰과는 두께와 기능면에서 큰 차이를 보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의 가전이나 IT 제품은 기능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중요성이 커지게 될 거라고 봅니다. 세틀러-1,2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과 기호도를 철저히 조사하시기 바랍니다. 후속 모델의 디자인 작업은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까?”

    “미시즈 리와 공동 작업을 하고 있지만, 원거리로 인한 소통에 문제가 있습니다. 디자인팀을 확대 개편하면서 외부 디자인업체에 아웃소싱을 의뢰하는 방법을 병행할 계획입니다.”

    이전의 디자인팀장은 수정과의 잦은 의견대립과 계속된 세틀러에 대한 비판으로 SHJ퀄컴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수석 디자이너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신 모델 작업은 경환의 아이디어 제공을 받은 수정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휴스턴과 샌디에이고는 너무 먼 거리였다. 전화와 팩스로 진행되는 디자인 작업은 전혀 속도를 내지 못했고 차기 모델 작업을 더디게 만들고 있었다.

    타운이 건설되면서 그룹이 들어설 건물보다도 SHJ퀄컴의 빌딩을 먼저 건설 하고는 있지만, 일 년 후에나 이전이 가능한 상태였다. 수석 디자이너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아웃소싱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윈의 계획에 큰 이의를 달지는 않았다.

    “아웃소싱에 너무 의존하지는 마십시오. 보안에도 신경을 쓰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CHINA UNICOM에서 한국과 같은 조건으로 로열티 계약을 하겠다는 통보해 왔습니다. 수입설비 공급업체 선정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97년 하반기에 접어들게 되자 SHJ퀄컴의 매출과 이익은 급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을 위시로 러시아와 일본, 북유럽 국가들과의 계약이 진행되고 세틀러가 출시를 기다리고 있어 SHJ퀄컴은 SHJ구글과 함께 IT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뉴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주목받지 못하던 퀄컴과 구글이 동종업계를 위협하며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며 매출을 급성장 시키자 이 두 회사의 모회사인 SHJ에 전 미국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반적인 기업의 성장모습과는 다르게 기업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차입금이 제로라는 사실은 미국인들에게 큰 신선함과 충격으로 다가갔다. 유명 일간지는 IT전문가를 동원해 SHJ의 자산가치가 최소 100억 불 이상이며, 퀄컴과 구글의 도약 여부에 따라 그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란 기사를 써, 다시 한 번 미국인들을 놀래게 만들었다.

    “SHJ에이전트는 AS부문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시고 SHJ구글과 연계한 온라인 홍보 전략을 수립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도시를 제외한 지방 중소도시는 AS센터 지정이 늦어지고 있어 죄송합니다. 대리점들과 AS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어 내년까진 중소도시까지 AS구축망을 확보하겠습니다. 쇼케이스가 끝나고 애드센스에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미국에서 전국적인 AS구축망을 확보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중소도시의 소비자들은 AS를 받기 위해 AS센터가 있는 대도시로 제품을 보내든지 아니면 사비로 수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경환은 후발주자인 SHJ가 시장을 확보할 길은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과 함께 전국적인 AS망을 구축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김창동은 경환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전 지역을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며 기존의 AS 방식에 익숙한 대리점들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쇼케이스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보안에 특히 유념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이콥스 사장님은 돌아가기 전에 식사자리를 만들겠으니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이후 SHJ퀄컴의 미래 육성사업과 기술 개발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를 약속한 경환은 길었던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경환은 수정과 함께 자신의 사무실로 이동해 하루나가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해 보니까 어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자기가 이렇게 고민하며 고생할 줄은 몰랐어요.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했고요.”

    “그랬어? 햐, 진즉에 자길 회사에 데리고 올걸 그랬어. 남편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지금에서야 알다니. 앞으로 종종 같이 오자고.”

    수정은 처음 온 경환의 사무실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넓지는 않지만, 잘 정돈된 사무실은 서재보다도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정은 유리벽 넘어 하루나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블라인드를 걷어 유리 밖으로 보이는 휴스턴 다운타운의 정경을 한참동안이나 쳐다본 수정은 고개를 돌려 경환을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나 오늘 근사한데 가서 저녁 사 줘요. 술도 한잔 하고 싶고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론 둘만의 시간을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큰 맘 먹고 아이들을 조안나에게 맡기고 회의에 참석한 수정은 오늘만큼은 연애하던 처녀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네, 사모님. 이미 예약해 놓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화끈하게 모실 테니, 같이 나가시죠.”

    수정은 슈트 상의를 걸친 경환의 팔짱을 꼈고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와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회사를 나섰다. 그런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하루나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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