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43화 (120/264)

#143

다시 사는 인생 - 143

“딕의 눈을 피하기는 어렵군요. 그러나 이미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저야 상관없지만, 제 주위 식구들의 생명과도 연결된 부문이라 제 기억에서 전부 지워버렸습니다. 딕에게도 해가 될 수 있으니 더 이상 묻지 말아 주십시오.”

경환은 웃음기를 거둬들인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곤혹스러워 했다.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경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딕은 경호팀을 항상 대동하고 다니는 이유가 조직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정보조직이 미국 땅에 존재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긴 미국 땅입니다. 그런 조직이 있다면 발본색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잘못하면 제임스가 의심을 받아 다칠 수도 있어요. 내가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러시아입니까?”

“휴우, 러시아는 명함도 내밀지 못합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딕, 잊어 주십시오.”

경환은 극도로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경환의 표정을 살피던 딕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사정을 하는 경환의 모습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잘 하면 이것을 빌미로 경환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마음을 추스르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을 해요. 힘닿는 데까지 제임스를 도와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딕의 호의에 성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제 분석으로는 중동을 재편하기 위해서라도 군사작전은 필수불가결하다고 판단을 되더군요. 그러기 위해선 딕이 워싱턴에 입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끼지 않겠습니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대선 후보에 대한 논의는 진행되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아직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딕은 경환의 말에 확답을 줄 수는 없었다.

“난 아직 정치에 다시 나설 뜻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세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봅니다. 저는 텍사스의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딕은 경환의 분석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무선통신과 인터넷은 미래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될 거란 사실은 이미 딕도 알고 있었고, 두 사업을 모두 손에 틀어 쥔 경환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생각이 들자, 조지 소로소의 얼굴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오스틴에서 식사라도 같이 합시다. 그리고 펜타곤에서 SHJ를 주시하고 있는 만큼 처신을 잘 해야 될 겁니다. 나이 많은 사람의 조언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만남은 저에게 유익한 자리였습니다. 오스틴에서의 식사를 기대하겠습니다.”

악수를 나눈 경환은 서둘러 딕의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재떨이의 시가를 집어 다시 입에 문 딕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에릭, 자네가 보기엔 저 제임스란 친구가 어떤가?”

“글쎄요. SHJ의 오너라고 해서 기대를 했었는데, 실망스럽더군요.”

“그런가? 그 친구 눈을 보니, 날이 잘 선 칼을 감추고 있더군. 재밌는 친구야.”

딕은 시가를 입에 문 채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돌렸고 한 동안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은 후에야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장님, 잘 참으셨습니다.”

경환이 차에 오르자 알은 급히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었다. 폐 속 깊게 담배 연기를 마신 후 내뿜은 경환은 모멸감과 분노를 삼키고 있었고, 수치심을 참기 위해 깨물었던 입 안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비굴해 보이지 않던가요? 오늘의 수치심은 제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비굴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수모를 갚아 줄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차 안에 비치된 생수로 입을 행군 경환은 알의 답변에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딕에게서 받은 모멸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경환은 회사로 향하던 차를 돌려 SHJ타운이 건설 중인 현장으로 향했다. 딕의 주변세력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환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당분간 딕의 비위를 맞춰가며 무기를 만드는 시간을 버는 방법 외에는 좋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알, 딕은 에릭이란 사람을 통해 PMC까지 자신의 용병으로 활용할 생각인 거 같더군요. 알이 말하던 PMC를 같이 만들겠다던 사람이 맞죠?”

“네, 맞습니다. 블랙워터란 기업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경환은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후 딕 체니의 지원 하에 PMC기업으로 급성장하게 되는 블랙워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딕 체니와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면 블랙워터가 첨병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은 뻔 한 이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서둘러야 되겠군요. 보안과 경호를 주목적으로 한 SHJ시큐리티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도 알고 있을 겁니다. PMC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PMC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필요는 있겠습니다. 인원과 장비를 최대한 확대하는 계획을 만들어 주십시오. 용병이 아닌 SHJ직원의 개념으로 인성을 우선시 해 주세요.”

딕과의 만남은 경환을 다시금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포장도로에 접어들어서인지 차는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생각에 잠겨있던 경환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대형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현장은 막 시작된 성토작업으로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지만, 경환은 차에서 내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깊은 감회에 빠져들었다. SHJ의 오너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전체 현장으로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최석현과 로버트는 급히 현장 사무실로달려왔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고 오셨으면 정리라도 해 놨을 텐데.”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습니다. 특별한 문제는 없나요?”

“보안을 강화하다 보니 인부 수급에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만, 일정에 맞춰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시 정부에서도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고요. 참, 이 친구는 파슨스 현장책임자인 로버트 베일입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SHJ의 지원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로버트는 경환의 내미는 손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잡아 악수를 나누었다. 기업의 오너답지 않게 위엄을 내세우지 않는 경환의 모습이 생소했지만, 최석현과 격이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경환을 보며 소문으로만 듣던 SHJ의 기업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로버트는 현장 안내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알은 보안팀을 점검하기 위해 경환의 곁을 잠시 떠나 있었다.

“최 부장님, SHJ타운의 건설과 관리를 맡게 될 회사를 만드셔야겠습니다. 부장님이 현장에 계시니, 스미스 차장과 팀을 이뤄 작업을 하시고, 알과도 협조체계를 구축하십시오.”

딕과의 만남은 황태수가 제안한 조직개편을 서둘러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며 쉴 새 없이 달려온 SHJ는 피로도가 누적되고 있었고, 경환은 숨고르기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큰 착각이었다. 직접적인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의 동등한 위치까지는 도달해야 된다는 생각이 경환을 다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우선은 딕 체니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일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 첫 번째 열쇠를 제공하게 될 공사 현장을 최석현과 로버트의 안내를 받아 살피는 것으로 풀어져가는 마음을 다시 잡고 있었다.

“부사장님, 경제부 수장이 바뀐 후로 경제정책이 너무 급진적이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우려가 될 정도입니다.”

박재윤이 장관으로 임명된 이후 한국정부는 시장 환율제를 도입함과 동시에 시장 환율제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관리변동환율제로 운영하겠다고 공식발표를 했다. 이 여파로 환율은 950원을 넘어 1000원을 향해 수식 상승을 하고 있었지만, 정부가 개입하려는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환율의 수직상승으로 수출경쟁력이 호조를 보이며 경상수지 적자 개선에 파란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원자재를 확보하지 못한 기업들의 경영악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외환위기의 단초를 제공하는 종금사에 대한 철퇴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중심이 되어 금융감독원과 감사원, 검찰까지 동원해 무분별하게 이뤄진 핫머니의 유입과정과 서류조작을 통해 부실기업에 막대한 대출과 회사채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부실채권이 발생한 과정을 조사했고, 이를 통해 영업정지 및 민, 형사상의 책임까지 묻는 등 레임덕을 보이는 정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급격한 원화 상승은 금리의 인상을 부채질했고, 정부의 사정의 칼에 긴장한 금융권은 대출금의 회수를 부추겼고, 원자재 상승과 대출이자의 증가로 자금력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줄도산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원성을 등에 업은 야당과 일부 여당의원까지 가세한 정치권은 연일 청와대를 성토하고 있었고, 무디스와 S&P 등 국제신용평가기관에서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경고성 발언이 나오고 있어 한국 경제는 살얼음판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지 않으니 좀 더 관망을 하기로 하고, 대현그룹과 한새그룹의 납입금과 엔지니어링의 투자금은 1300원 대를 일차 기준점으로 삼아 준비하도록 해요.”

헤지펀드의 조정에 의해 형성된 핫머니는 한국정부와 종금사의 끈질긴 설득에도 기간연장을 거부하고 있었고 이에 놀란 해외자본들이 분위기를 살피며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어 당분간 환율상승은 막을 수 없을 듯 보였다. 한국정부는 가용 외환을 늘리기 위해 국내은행의 해외시장 예치금을 동결내지는 줄이는 작업을 했고, 오성그룹에 경고를 보냄과 동시에 기아자동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며 기업들이 보유한 외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세무조사를 통해 압박을 가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한새그룹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주 안으로 오퍼를 주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MP3의 원천기술은 한새정보시스템과 디지털시스템의 공동기술이란 사실을 놓쳤다. 이 사실을 확인한 린다는 한새그룹에 항의를 했고, 이자영을 중심으로 디지털시스템을 설득하는 과정을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디지털시스템의 거부의사에 애를 먹긴 했지만, 린다는 한새정보시스템과 디지털시스템을 패키지로 묶어 인수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고 막혀있던 협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경환의 한국방문으로 SHJ에 대한 기대감이 증폭된 관계도 있었지만, 디지털시스템 또한, 빈약한 자금력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린다는 경환이 지급으로 보낸 전문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룹경영은 전부터 찬성을 하고 있었지만, 전문에서 느낄 수 있는 경환의 초조함은 자신이 모르는 일이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새롭게 설립 될 SHJ홀딩스의 사장으로 내정된 린다는 서울의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기 위해 자는 시간까지 쪼개고 있었다.

“타케우치 사장, 한국의 금리가 급상승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부동산시장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겁니다. 이 기회에 좋은 매물을 잡아 사옥을 만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거 같으니 박화수 사장과 협의를 해 보세요. 만약 한국이 아시아 본부 역할을 하게 된다면 퀄컴뿐만 아니라 구글도 진출을 하게 될 겁니다.”

“저도 부사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부동산이 바닥을 칠 시기에 매물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때까지는 SHJ화성플랜트 건물에 입주할 생각입니다.”

이미 설립절차를 시작한 SHJ엔지니어링은 청와대의 지원을 얻어 잡음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SHJ의 위상을 설명이라도 하듯 신규와 경력사원 모집에 24:1이라는 엄청난 지원율을 보이고 있었고, 코이치는 일대일 면접을 통해 실력 있는 직원을 직접 선발함과 동시에 해외의 헤드헌터 기업을 통해 경력자를 스카우트하고 있었다.

“대현그룹의 실사가 끝나고 본사에서 에릭이 도착하면 저는 휴스턴으로 바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필요한 사항은 에릭과 협의를 하시면 될 거예요.”

“본사에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투자가 마무리 될 때까지는 서울에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린다는 휴스턴에서 들어온 전문을 코이치에게 건네주었다. 전문을 살핀 코이치는 조심스럽게 린다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소식이군요. 해외법인이 SHJ엔지니어링 소속으로 바뀌게 되면.......”

해외 거점을 마련해 정보력에서 앞서야 된다는 계획은 코이치가 입사 초기부터 주장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해외법인을 엔지니어링 관할로 이전시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사우디법인엔 잭이 있었다. 졸지에 잭의 상관이 된 코이치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잭도 자리를 찾아 돌아오겠지만, 지금은 잭이 인내심을 보여줄 때라고 생각하니까요.”

코이치의 걱정을 읽은 린다는 개의치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린다의 마음은 이미 휴스턴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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