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다시 사는 인생 - 142
일주일 동안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찾은 SHJ 본사는 어느 때보다 활기찬 모습이었다. 늘어가는 부서들과 직원들로 인해 빌딩의 2개 층을 더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포화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본사 사옥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이곳에서 버텨야 되는 점을 감안해 건물주와 2개 층을 더 임대하는 계약을 추진하고 있지만, SHJ의 명성으로 빌딩의 가치가 높아진 관계로 빈 층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루나에 의해 말끔하게 정돈된 사무실에 들어 선 경환은 책상 위에 놓인 커피 잔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루나가 비서로 임명된 후부터 스스로 커피를 내린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커피에 대한 입맛이 하루나의 손맛에 적응되어 가는 자신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석주가 경질되고 박재윤이 장관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해외지점에서 들어온 정보동향 보고서를 확인하던 경환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황태수의 보고에 하던 일을 멈췄다.
“강석주의 배경도 무시 할 수 없었을 텐데, 빠른 결단을 내린 거 같군요. 시기적으로 늦긴 했지만, 최악의 상황까지는 모면을 해야 될 텐데, 안타깝네요.”
사람하나 바꿨다고 코앞으로 다가선 위기상황이 급변할 수는 없었다. 한국의 기업들은 악화되는 유동자금으로 인해 중견그룹이었던 삼미가 무너진 상태였고, 진로그룹마저 휘청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당분간 이런 기업들의 줄도산을 해결할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데 있었다.
“린다가 진두지휘를 맡은 이상, 한국 정부의 정책변화에 수위를 조절하며 투자를 집행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린다의 지시에 맞춰 자금이 집행되도록 준비를 끝냈습니다.”
“좋습니다. 한국 정부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아냈으니, 최대한 이득을 봐야겠지요. 다른 보고 내용은 없습니까?”
경환과 린다가 동시에 한국을 방문했던 관계로 SHJ의 모든 보고가 황태수로 집중되었지만, 황태수의 깔끔한 일 처리로 업무의 공백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경환은 일일 보고를 통해 휴스턴의 업무내용을 알고는 있었지만, 황태수의 직접보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SHJ-구글은 인원과 설비의 증강을 요청할 정도로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수시 채용을 통해 50명의 인원을 보충했는데도 인원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네요. 최 부장이 맡은 타운건설은 예정대로 큰 무리 없이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간을 내서 현장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당분간 슈미트 사장이 요청하는 거 이상으로 지원을 해 주십시오.”
아직 특별한 수익을 발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SHJ-구글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경영을 맡은 에릭 슈미트는 본사의 대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자신이 구상한 구글의 확장사업에 전념을 할 수 있었다. 아직 기존 검색 업체들은 구글의 애드센스 서비스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우리도 조직을 체계화해야 될 시기입니다. 계열사를 한 곳으로 묶는 중심점이 없다 보면 연결고리가 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황태수는 경환에게 두툼한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SHJ그룹 경영이란 제목으로 작성된 보고서를 천천히 넘기던 경환은 아직 탄탄한 자금력이 뒷받침 되지 못한 상황에서 SHJ를 그룹으로 묶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수는 경환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자 경환을 설득하기 위해 그룹화의 타당성에 다시금 설명했다.
“사장님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때를 기다리는 거 보다는 우리 스스로 때를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를 만들어 가자는 황태수의 말이 경환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앞뒤 재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왔던 자신이 어느새 나약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경환을 질책하는 거 같았다. 경환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두들긴 후 황태수를 바라보았다.
“부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배가 불렀나 보네요. 우리는 상장된 기업이 없는데 SHJ홀딩스를 설립해야 될 필요가 있을까요?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경환의 결심을 확인한 황태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분을 관리하고 차후 기업공개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홀딩스를 설립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SHJ는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많은 펀드들과 은행자본들의 투자 제안을 받고 있었지만, 이익을 나눠먹지 않겠다는 경환의 방침에 따라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대규모 자금이 소요되는 신규 사업이 생기게 된다면 일부 기업에 대한 상장은 불가피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경환은 황태수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황태수가 만든 그룹화 작업에는 SHJ홀딩스와 그룹기획실, SHJ시큐리티를 회장실 직속으로 두고, SHJ플랜트에 SHJ-화성플랜트와 SHJ엔지니어링을 하부 기업으로 둔다는 계획이었다. 또한, SHJ-퀄컴과 SHJ-구글을 계열로 두면서 SHJ투자와 휴대폰 판매망을 구축하고 있는 SHJ에이전트, SHJ타운을 관리할 SHJ매니지먼트를 설립 한다는 계획이었다.
“SHJ시큐리티는 경호팀과 보안팀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이군요.”
“그렇습니다. 외부의뢰는 가급적 삼가고, SHJ타운의 자체 경비와 해외사업장의 보안을 책임지게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봅니다.”
경환은 황태수의 설명을 들으며 보고서를 뒤졌지만, 계열사를 이끌 인물들에 대한 인선작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경환이 보고서를 뒤지자 황태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경영자에 대한 인선은 사장님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황태수는 경환의 고유권한을 침범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인선작업을 하지 않은 의미를 파악한 경환은 황태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검토를 하겠습니다. 쿡 부사장이 한국에서 돌아오면 최종 검토를 하는 거로 하시죠. 수고하셨습니다.”
황태수가 빠진 사무실에 홀로 남은 경환은 그동안 줄여왔던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자신이 나약함을 보일 때마다 중심을 잡게 도와주는 황태수와 린다는 경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다. 타들어가는 담배를 재떨이에 던진 경환은 급히 하루나를 찾았다.
“하루나, 알에게 바로 내려간다고 통보를 해 주세요.”
창밖으로 보이는 휴스턴의 정경은 아름답기만 했다. 국방장관으로 재직시절 인연을 만들어 암암리에 특혜를 제공했던 홀리버튼은 딕 체니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서둘러 그를 경영책임자로 모셔왔다. 딕 체니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교묘히 법망을 피해가며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인 이라크와 이란, 리비아와 거래를 하며 막대한 이익을 만들었고, 홀리버튼은 1800만 불의 주식옵션을 딕 체니에게 제공함과 동시에 매년 천만 불이 넘는 돈을 딕 체니의 손에쥐어 주고 있었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 이상이었던 둘의 관계는 정권을 노리는 부시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곧 제임스 리가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시가를 입에 물고 있던 딕의 뒤로 에릭 프린스가 다가왔다. 자신의 지원 아래 정부요원들의 훈련을 목적으로 설립한 블랙워터는 민주당 정권의 눈을 피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PMC로 변모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계획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행하기 위한 첨병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여기서 바라보는 휴스턴은 정말 아름다워. 블랙워터는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 있나?”
“알 클라크와 카일 디푸어가 SHJ에 붙어 버리는 바람에 실력 있는 자원들이 그쪽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없습니다.”
딕은 언제부터인가 SHJ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상황이 유쾌하지 않았다. 워싱턴 재입성을 노리는 시기에 손을 더럽힐 생각은 없지만, 경환이 위험인물이라고 판단된다면 가지고 있는 힘을 동원해서라도 SHJ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대표이사님, SHJ의 제임스 리 사장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팔등신의 늘씬한 비서를 앞에 두고 경환과 알이 뒤따라 들어왔다. 딕은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과장된 웃음을 보이며 경환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하하, 휴스턴에서 잘 나가는 SHJ의 사장님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홀리버튼의 대표이사 딕 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딕이라고 불러줘요.”
“반갑습니다. 제임스 리라고 합니다. 저도 제임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경환은 딕과 악수를 나누며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매섭게 빛나는 딕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환생 후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이렇게까지 긴장되고 떨리는 기분을 느낀 적이 없을 정도로 딕은 경환에게도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국방장관을 지내고 차기 부통령을 노리는 딕이 아직 무영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정계나 재계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경환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하하, 그래요. 한국은 잘 다녀왔습니까? 들리는 소문엔 제임스의 한국방문이 있고나서 경제부 장관이 바뀌고 정책의 혼선이 발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경환은 겉 표정과는 달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딕의 질문은 분명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대답 한마디에 따라 지금까지 쌓아 온 SHJ가 모래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며 경환의 등허리엔 한줄기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크게 주목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헤지펀드의 패턴을 연구하며 이익을 만들어 볼까 생각하던 참에, 동남아 외환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2년 전에 만들어 놓은 분석 자료가 한국에 흘러가게 되었나 봅니다. 저는 중국과 북한의 군사력을 방어하는 최전선이 외환위기로 무너지는 걸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경환은 자신과 한국정부와의 관계가 이미 딕에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뻔 한 거짓말로 딕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경환은 군수작업과 연결된 네오콘의 수장이 딕이란 사실을 기억하며 외환위기보다는 군사대치 상황으로 딕과의 관계를 풀어가려고 했다.
“중국과 북한이요? 거,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미국의 방어선이 일본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딕도 아시겠지만, 중동문제는 미국이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정권은 중동 정세를 낙관하고 있지만, 제 예상은 차기 정권은 강한미국을 재건설할 수 있는 후보가 집권을 하게 될 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중동의 상황보다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되는 것이 중국의 급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서려고 할 때 일본이 과연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의 경제가 무너져 중국에 종속이라도 된다면 미국은 태평양에서 중국을 맞서야 될 겁니다.”
환하게 웃고 있던 딕의 표정이 급히 굳어지며 경환을 쏘아보았다. 선제공격으로 안보전략을 바꾼다는 목표로 중동과 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한다는 계획이 경환의 말속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 딕은 경환의 뒤에 다른 조직이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차기 정권은 그럼 우리 공화당으로 옮겨온다는 말인가 보군요. 하하하, 제임스의 말대로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언급한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딕은 군사전문가들의 연구 자료로 앞으로 20년 후에는 중국이 미국의 군사력에 맞설 수 있는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는 경고를 알고 있었다. 아직 세계의 하청공장에 불과한 중국의 군사적 성장을 예상하는 경환에게 딕은 서서히 관심을 보였다.
“국방장관을 역임했던 딕이 모르실리 없다고 봅니다.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에서 축척된 자금과 기술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는 갓난아기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이후의 미국 정세는 어떻게 변하게 될 거라고 봅니까?”
경환은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금니를 물었다. 참기 힘든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며, 자그마한 성공에 안주하려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었다. 경환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으며 딕을 향해 밝게 웃어보였다.
“하하하, 딕. 저는 정치가나 외교관이 아닙니다. 단지 사업상 필요하기 때문에 국제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미국 국민은 이란과 이라크, 북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민주당 정권을 떠나게 될 거라고 봅니다. 차기 정권은 좀 더 강력한 메시지 혹은 군사적 타격까지 고려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 정권은 포기하고 차기 정권이 들어서면 중동에 미친 듯이 진출을 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딕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계획하고 하부 조직에서 실행 중인 내용이 경환의 입에서 터져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딕은 조지 소로스와 경환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아직 조지 소로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분석력과 예측력까지 갖춘 젊은 친구를 버리기고 아깝다는 생각이 딕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대화가 중단된 상태가 한 동안 지속된 후 굳게 닫혀있던 딕의 입이 열렸다.
“제임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 데, 플랜트로 성공한 과정도 그렇고 혼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정보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제임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소스가 궁금하군요.”
경환은 올게 왔다는 생각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자신을 주목했다면 그동안의 성장과정 아니 한국과 중국에서의 생활까지도 다 조사를 했을 거라고 판단한 경환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