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41화 (11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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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41

    한국 일정을 모두 마친 경환은 한국을 떠나기 전 정리를 하기 위해 린다와 코이치를 불러들였다. 탈도 많았고 말도 많았지만, 이번 한국방문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한 경환은 후속조치를 위해 린다를 총 책임자로 서울에 남겨 놓을 생각이었다.

    “쿡 부사장님이 남아 인수와 법인설립 등 총 지휘를 맡아 주세요. 타케우치 부장도 당분간은 쿡 부사장님에게 진행과정을 보고해 주시고요.”

    SHJ의 모든 자금을 관리하는 린다를 서울에 남겨 놓는다는 건 어려운 결정이긴 했지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한국의 경제상황과 한국 투자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미 휴스턴과 샌디에이고에서는 린다를 보조할 팀을 구성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성그룹의 회장이 곧 휴스턴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우리가 대현과 한새와 접촉한 사실에 몸이 달아있더군요.”

    “오겠다는 사람을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이콥스 사장과 일정을 조율해서 통보해 주세요. 금성그룹에도 넌지시 정보를 흘려주시고요.”

    경환의 뜻을 알아 듯은 린다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도체를 제외한 전자제품 관련 사업은 금성이 오성보다 한 발짝 앞서 있다는 판단에 경환은 오성의 독주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금성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한국 정부가 대처를 하든 못하든 한국 경제는 요동을 치게 될 거라고 봅니다. 이에 따라 원화 환율은 급상승을 하게 될 테니, 투자시기를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SHJ의 이익을 최대화해야 될 시기입니다.”

    경환은 더 이상 외환위기 상황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정부를 위해서가 아닌 IMF 사태로 벌어지게 될 끔찍했던 기억이 경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IMF 사태로 인해 중소기업의 몰락과 함께 중산층이 붕괴되었지만, 재벌그룹은 IMF 사태를 호기로 삼아 팽창을 지속했고, IMF의 권고에 순응한 한국정부는 해외자본의 지분제한을 철폐하여 공기업과 알짜기업을 해외자본에 종속시키는 실책을 저질렀다. 이후 한국경제는 한국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외자본의 헤게모니에 춤을 추는 꼭두각시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경환의 제안을 한국정부가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상당히 큰 피해는 감수해야 되었기에 이번 정부는 국민들의 지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IMF라는 거대한 파도가 한국을 덮칠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파도를 막기 위한 방파제를 조금이라도 높게 쌓기를 경환은 바라고 있었다.

    “사장님, 이번에도 느꼈지만, 영주권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민권을 받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경환은 시민권을 취득하라는 린다의 조언에 정신을 차렸다. SHJ타운 계획을 공표한 이후 시민권을 취득하라는 주변의 압력이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고, 특히 SHJ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는 반면에 기업공개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자, SHJ-퀄컴과 연결된 국방부의 압력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SHJ와 계약된 로펌에서는 지속적으로 경환의 시민권 취득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좀 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딕 체니와 만나고 나서 결정을 하겠습니다.”

    황태수를 비롯해 한국직원들 대부분은 이미 시민권을 취득한 상태였다. 경환도 시민권을 취득해야 된다는 사실엔 동의를 하고 있었지만, 30년을 한국국적으로 살아온 삶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이 경환을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결정을 해야만 했다.

    “타케우치 부장님, 아, 이젠 사장님이군요. 최대한 인재를 끌어 모이세요. 외환위기가 시작되면 고급인력들이 물밑 듯이 시장에 나오게 될 겁니다. 옥석을 가려 채용하시되, 국적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SHJ엔지니어링은 한국시장을 보고 만든 기업이 아닙니다.”

    “맡겨 주십시오. 전 세계를 아우르는 플랜트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타케우치 사장의 뒤에는 SHJ와 제가 버티고 있겠습니다. 소신을 가지고 뜻을 펼쳐보세요. 식구들은 준비가 되면 바로 부르시고요.”

    일본으로 금의환향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경환은 코이치에게 약속한 플랜트기업을 안겨줌으로써 그의 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사장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경환의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출발시간을 알리는 하루나를 힐끗 바라 본 경환은 회의를 빠르게 마무리했다.

    “그래요. 출발합시다. 다들 고생해 주세요. 이번 투자는 한국을 아시아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한 가능성을 검토하기 잣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 점 충분히 숙지하셔서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휴스턴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울에 남게 될 직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경환은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호텔 밖을 나섰다. 많은 기자들이 경환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SHJ 경호팀의 제지를 뚫을 수는 없었다.

    "사장님, 청와대에서 온 전화입니다.“

    당분간 한국을 찾을 생각이 없었던 경환은 올림픽대로의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빠져있을 때, 하루나가 건네는 휴대폰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었다.

    “이경환입니다.”

    ‘문기석입니다. 오늘 출국인데 제대로 인사도 못해 미안합니다. 만남을 다시 갖지 못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문기석은 경환을 청와대로 초청했지만, 경환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들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차피 현 정권은 국민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번 정권과의 끈을 지속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물론 경환의 방문기간 중에 차기를 노리는 여당과 야당의 대선 후보들이 접촉을 시도해 왔지만, 경환은 그런 제안들을 모두 거절해 현 정권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

    “저는 기업가지 정치가가 아닙니다. 한국정부가 현명한 판단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에 돌아가시면 소식을 들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한국정부가 약속드린 내용은 이행이 되겠지만, 차기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모종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경환은 짧은 인사와 함께 문기석과의 통화를 마쳤다. 그러나 문기석의 끝말이 개운치 않았지만, 경환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외환위기의 여파는 어떤 상황이든 차기 정부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고, 미국의 눈치를 봐야 되는 상황에서 SHJ에게 주어진 혜택을 임의대로 변경하거나 압력을 행사할 수 없으리란 계산을 이미 마쳤기 때문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경환은 문기석의 배려로 VIP 통로를 통해 비행기에 탑승했고 긴박했던 한국일정은 이륙하는 비행기와 함께 막을 내렸다.

    지적측량 작업이 한창인 롱포인트 지역 현장사무실엔 최석현이 살다시피 일정을 챙기고 있었다. 대형 플랜트 물량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30억 불에 달하는 SHJ타운 건설은 미국의 많은 EC(종합건설업)업체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턴키방식으로 진행된 업체선정엔 수많은 로비와 압력들이 가해졌지만, SHJ는 이를 모두 뿌리치고 SHJ가 원하는 친환경적인 타운 건설의 주제에 가장 합리적으로 접근한 파슨스를 선정했다. 경환은 MOU를체결할 당시부터 모든 건물에 대한 비밀 서약과 함께 비밀 누설 시, 파슨스가 휘청거릴 정도의 배상금을 삽입할 것으로 요청했다. 또한, SHJ 보안팀의 사전 검색을 통과하지 못한 인원은 현장에 배치할 수 없다는 조항을 넣어 파슨스를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강경한 SHJ에 파슨스는 백기를 들고 계약에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SHJ-퀄컴의 신사옥부터 완공시키라는 경환의 지시를 받은 최석현은 아예 사무실을 현장으로 옮겨 놓고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지적측량을 서둘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일정에 나와 있는 가설공사가 많이 늦어지고 있는데 좀 걱정이 되네요.”

    파슨스의 현장책임자로 나와 있는 로버트 베일은 최석현의 독촉에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현장사무실이 세워진 후부터 감리회사의 직원들과 현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는 최석현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SHJ의 보안이 강화된 후로 인부들의 수급이 어려워서 그런 거 아닙니까. 보안 등급을 조정해 주시지 않으면 일정을 맞추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로버트는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을 토해냈다. SHJ는 무장한 보안팀을 사방에 배치해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고 불법체류자들이나 의심이 되는 인물들의 진입을 금지 시켰다. SHJ타운과 외부를 단절시키라는 경환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SHJ타운에 조성될 여러 비밀스러운 공간에 대한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최석현은 로버트의 하소연을 이해하면서도 이 문제만큼은 양보해 줄 수는 없었다.

    “미스터 베일, 고충은 이해를 하지만, 보안문제는 내 소관이 아닙니다. 파슨스에서도 충분히 인지를 하고 계약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정이 늦어지면 그만큼 파슨스의 손해도 증가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될 겁니다.”

    “그, 그게.......”

    로버트는 말을 잇지 않았다. 30개월 내 완공을 요청한 SHJ와 40개월을 주장한 파슨스 간에 지루한 협의를 통해 35개월로 합의를 한 상태였다. 일정 지연으로 페널티가 발생하게 된다면 현장책임자인 자신이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나 나나, 완공되기 전까지는 한 배를 탄 사이입니다. 책임을 질 사람은 우리 두 사람밖에는 없다는 말 이해하실 겁니다. 저도 최대한 협조할 것은 협조를 할 테니, 파슨스 본사 책임자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인원을 충당하십시오.”

    “좋습니다. 현장에 문제가 발생하면 나도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 인정을 봐 주긴 어렵겠군요. 지반공사가 끝나면 RBM(수직갱도설비) 공사를 해야 되니 도로가 연결될 수 있도록 시 정부를 독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우리 직원이 시 정부에 주재하고 있으니 도로뿐만 아니라 상하수도 부분도 SHJ타운까지 끌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로버트는 수직갱도를 파는 이유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단지 SHJ의 비밀공간의 하나라고만 생각했고, 비밀스런 내용을 알고 있어봐야 자신에 득 될 게 없다는 생각에 관심조차 가질 생각이 없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는 현장엔 직원들을 재촉하는 로버트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일본을 경유하는 비행일정에 경환은 녹초가 된 상태로 휴스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경환은 회사로 가려는 계획을 바꿔 집으로 향했다. 경환은 피곤한 몸을 이끌며 초인종을 눌렀고 집 안에선 밝은 수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자신을 설레게 만드는 수정을 생각하며 경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세요?”

    “나야, 보고 싶으니까, 빨리 문부터 열어.”

    문이 열리자마자 경환은 수정부터 안으려 했지만, 수정은 그런 경환의 행동을 뿌리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형, 거 애정행각은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조카들 교육에도 상당히 안 좋을 텐데.”

    수정의 뒤로 정우를 안고 있는 승연의 모습이 나타나자, 경환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과의 식사자리에도 나오지 못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줄 알았던 승연이 미국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학교 다녀야 될 네가 여기 웬일이야? 자식, 웃기는 놈이네. 너 사실대로 불지 않으면 네 형수 보는 앞에서 얻어터질 줄 알아.”

    “돈만 떨어지지 않았으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는 건데.”

    경환은 주먹부터 들어 보이자, 승연은 안고 있던 정우를 급히 경환에게 넘겼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정우는 경환의 품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었고, 승연은 멀찌감치 수정의 뒤로 숨어버렸다.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사실 나 취직하러 왔다고. 휴스턴까지 올 생각은 없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라고.”

    “자기는 도련님 말도 다 듣지도 않고 화부터 내요? 가서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세요. 희수 자고 있으니 깨우지 마시고요.”

    씩씩거리던 경환은 수정의 핀잔을 듣고서야 샤워를 하기위해 안방으로 향하면서도 승연을 노려보았다. 승연에 대한 걱정에 급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승연을 불러 세웠다. 그동안의 일들을 듣게 된 경환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승연의 행동이 대견스럽긴 했지만, 미국이란 험한 나라에서 잘못 됐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경환은 가슴부터 쓸어내렸다.

    “휴스턴에서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찾았다니 우선 축하는 해 주겠지만, 네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반성부터 해. 적어도 나하고는 상의를 했어야 되잖아.”

    “내 롤 모델이자 경쟁자가 형이었는데 어떻게 형한테 부탁을 해? 형을 이기겠다는 목표로 공부를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좌절을 했는지 형이 알면 놀랄걸? 결과는 해피엔딩이니까 용서해주라. 응?”

    경환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승연을 바라보며 가슴이 짠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회귀를 한 후에도 승연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 주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휴스턴 어떤 회사에 취직을 한 거야? 내가 좀 알아 볼 테니까 말해 봐.”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내 힘으로 커 보고 싶어. 휴스턴에선 그래도 형이 좀 먹어 주더라고. 괜히 형 도움 받았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형제간의 분위기가 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수정이 술상을 차려오자, 경환은 안 보는 사이 훌쩍 커버린 승연에게 술은 한잔 따라 주었다. 다음 날 체류기간이 끝난 승연은 주변정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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