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38화 (11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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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38

    오성그룹은 때 아닌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극비로 진행되고 있던 기아자동차의 합병전략이 경환에 의해 낱낱이 공개되면서 청와대에선 강석주를 배제한 대책회의가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었고 문기석의 묵인 하에 일부 언론에까지 정보가 흘러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룹 회장인 이형우는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도대체 SHJ가 우리와 각을 세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북미지역의 휴대폰 독점권을 줬고, 플랜트입찰을 공동으로 성공시켰는데도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건설 사장인 이수혁과 전자 사장인 이세일은 이형우의 눈치만 살필 뿐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 수 없었다.

    “언론이야 물 타기를 하면 된다고 치더라도 청와대가 주목하고 있다는 게 문제란 말입니다. 아무리 레임덕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기업하나 죽일 시간을 충분하다는 거 모르지는 않겠지요?”

    이형우의 계속된 질책성 발언에 회의에 참석한 계열사 사장들은 고개를 들어 이형우와 눈을 마주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용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기획실 실장인 탁주훈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청와대의 노기는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정보력을 가진 SHJ와의 반목을 어떻게 푸느냐는 점입니다. 이경환 사장은 사업초기만 하더라도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건설과 엔지니어링의 잘못된 판단으로 감정의 골이 생기기 시작했고, 전자에서 무리한 인수제안을 한 후부터 SHJ와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이번 기아자동차 인수 정보가 청와대에 흘러들어가게 된 원인도 이에 근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수혁 사장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 보세요.”

    SHJ의 인수제안은 자신의 지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건설과 엔지니어링과의 일은 보고를 받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이형우의 불같은 노여움에 이수혁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수혁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화성플랜트의 제안을 거절한 내용과 KBR과의 물밑 접촉, 엔지니어링의 화성플랜트 합병 실패에 대한 내용을 설명했고 이형우는 얼굴색이 급변하며 주먹을 쥐어 탁자를 내리쳤다.

    ‘꽝, 꽝.’

    “도대체 무슨 일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겁니까?”

    이형우의 분노에 이수혁은 연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화성플랜트가 KBR과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할 때만하더라도 경환이 이정도로 사업을 키우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었다. 황태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를 회사에서 밀어낸 것을 후회해 봤지만, 이미 상황은 이수혁을 최악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회장님, 문제는 저희가 미래 산업으로 투자를 집중시키고 있는 휴대폰과 단말기 부문에 SHJ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CDMA를 포기하고 GSM에 집중한다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금년부터 PCS사업이 시작되고, 러시아와 중국, 북유럽이 CDMA방식을 도입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마당에 황금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탁주훈의 말이 끝나자 이형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러가며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퀄컴의 투자요청을 받아들이고 발 빠르게 인수를 추진했다면 오늘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자신이 간을 보는 사이에 퀄컴은 SHJ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렸다. 30억 불 규모의 타운을 조성할 정도로 규모가 커진 SHJ는 오성그룹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곳으로 멀찌감치 도망가 있다는 게 이형우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세일 사장, 전자는 아직 SHJ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틀어진 SHJ와의 관계를 개선할 방안이 있습니까?”

    이세일은 회장의 호출을 받았을 때부터 SHJ와 연관된 일이라 예상하고 답안지를 만들어 왔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수혁 사장이 회장의 질책에 사정없이 박살이 나는 것을 지켜본 이세일은 준비해온 자료를 넘기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현재 SHJ, MS와 함께 WIP 개발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SHJ-퀄컴과의 관계도 아직은 금성전자보다 우리가 앞서 있다고 판단됩니다. 저희가 주목하는 것은 SHJ에서 휴대폰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와 경쟁을 해야 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디자인과 기능면에서는 아직 우리가 앞서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이용해 우리는 디자인과 기능, SHJ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합작을 추진한다면 플랜트에서 틀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수혁은 자신을 한 번 더 죽이는 이세일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세일은 그의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우선은 자신부터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세일은 GSM 측이 개발하는 WAP과의 경쟁을 위해서라도 오성전자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세일은 SHJ가 준비한 새로운 형태의 휴대폰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SHJ와의 문제는 비서실과 기획실에서 직접 챙기도록 하세요. 각 계열사, 특히 건설과 전자는 SHJ와의 개별 접촉을 금하겠습니다. 그리고 탁 실장은 이경환 사장과의 면담을 급히 추진해서 보고하시고요.”

    이형우가 지시를 하기 전부터 탁주훈은 경환이 한국에 오기 전부터 SHJ와의 만남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던 마당에 이형우의 지시까지 받게 된 탁주훈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때, 회장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메모지 한 장이 자신의 탁자 위에 놓여졌다. 무의식적으로 메모지를 확인한 탁주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회장님. 이경환 사장이 호텔에서 나와 지금 대현그룹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대현그룹이라고요? 하, 남의 집을 휘저어 놓고 태연하게 옆집을 찾아가는 저의가 도대체 뭐라는 겁니까?”

    흥분한 이형우는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닦달했지만,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성그룹이 경환의 파격적인 행보를 해석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경환은 숙소인 워커힐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루나는 경환의 곁을 지키며 경환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나, 쿡 부사장과 제이콥스 사장이 돌아온 거 같은데 두 분을 불러주시고, 하루나는 방에 가서 쉬도록 해요.”

    “아닙니다. 사장님. 저는 괜찮습니다.”

    룸과 거실이 분리된 스위트룸이라 하더라도 같은 방에 하루나와 같이 있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하루나는 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폰택과 인수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린다와 어윈이 경환의 호출을 받고 급히 경환의 방을 찾았다.

    “폰택의 박 사장은 어떻습니까?”

    “야망이 큰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을 하더군요.”

    대기업인 오성과 금성의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중소기업으로 휴대폰 사업에 뛰어든 폰택은 급성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SHJ의 인수제안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너가 30대 중반으로 저돌적이고 야망이 있다고 판단한 경환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이미 하고 있었고, 단지 대현그룹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폰택과 접촉을 시도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현그룹의 휴대폰 제조부문을 인수받기로 정규병 회장과 합의를 했습니다. 두 분은 실사팀을 구성해서 빠른 시간 안에 인수를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인수 대금은 원화로 천억 원이니 한국의 환율변동을 주시하면서 대금납입시기를 결정하시면 될 겁니다.”

    “어렵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로 쉽게 합의가 되었군요.”

    “그냥 넘겨 준 건 아닙니다. 반도체를 통합하기 위해서도 휴대폰 사업은 정리가 되어야 했을 겁니다. 또한, 우리와의 플랜트 합작으로 재미를 봤기 때문에 휴대폰 보다는 플랜트를 키우겠다는 생각이 있었겠지요.”

    정규병이 아무런 계산 없이 휴대폰 사업을 SHJ에 넘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건설과 자동차, 중공업이 강세인 대현그룹에겐 전자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반도체와 대북사업으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될 대현그룹이었기에, 경환은 대현건설이 아닌 대현중공업과의 플랜트 합작에만 동의를 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휴스턴과 샌디에이고에서 직원들을 불러들이겠습니다. 당분간 제가 서울에 남아 진두지휘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쿡 부사장님이라면 제가 안심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제이콥스 사장님, 휴대폰 신 모델은 언제쯤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보고 드렸듯이 준비는 끝난 상태입니다. 일부 디자인 수정작업만 완료되면 시제품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사모님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경환의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수정이 도안한 모델은 기존의 휴대폰 제품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디자인일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알과 카일에 의해 조련된 10명의 보안팀을 파견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쓰며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정은 정우와 희수를 돌보는 와중에도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후 시제품을 확인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고, 쇼케이스는 최대한 화려하게 준비를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SHJ타운이 건설되면 휴스턴으로 이전을 해야 되는데 직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SHJ-퀄컴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경환의 마음은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SHJ의 핵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SHJ-퀄컴을 마냥 샌디에이고에 둘 수 없었던 경환은 최석현을 독촉해서라도 금년 안으로 휴스턴으로 이주시킬 생각이었다.

    “반발이 없지는 않았지만, 맞벌이 부부들의 고용문제를 해결해 주고 주택 구입에 우선권을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후로 많이 잠잠해졌습니다. 단지 샌디에이고 시 정부와의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입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터전을 옮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불편한 점을 최대한 다독여 주세요.”

    경환은 이주에 망설이는 맞벌이 부부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원하는 직원에 한해 SHJ 계열사에 취업을 보장해 주는 정책을 폈고, SHJ타운 내에 조성 중인 주택의 구입에도 우선권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서 직원들의 반발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오성그룹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답변을 주시지 않다 보니 저에게까지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 내일쯤 한번 만나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계속 놔두세요. 이번 한국방문에서는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아쉬우면 휴스턴으로 오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내일은 오성그룹보다 중요한 기업과 만나야 됩니다. 대현그룹의 휴대폰 부문과 비교될 정도로 중요한 사업이니 준비를 해 두세요.”

    경환의 머리엔 오성그룹이 차지할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박화수의 물밑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마무리를 해 두었던 사업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애플의 경영자로 나선 스티브 잡스를 곤혹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사장님, 양가 부모님들이 도착하실 시간입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대현그룹의 일은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신 모델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생산될 수 있도록 서둘러 주세요.”

    회의를 마친 경환은 서둘러 호텔방을 나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찾아 뵀어야 했는데, 주위의 시선 때문에 번거롭게 해 드렸습니다.”

    “괜찮다. 방송을 통해 네가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서방, 괜찮아. 한국 언론이 주목할 정도로 성장한 자네가 늘 자랑스럽네.”

    경환은 호텔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과 수많은 눈들로 인해 양가 부모님을 호텔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경환의 아버지와 장인은 그런 경환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고 있어 경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질 수 있었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지하 중식당을 다시 찾았고, 호텔에선 경환으로 인해 홍보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만큼 총 지배인은 경환의 곁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총 지배인의 감독 하에 준비된 음식이 나오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경환아, 정우와 희수가 너무 보고 싶구나. 조만간 사돈과 함께 미국에 가야되겠다.”

    “거, 당신은 쓸데없이 왜 미국에 자꾸 가겠다고 그래. 얘가 얼마나 바쁜지 방송을 봐도 몰라? 바쁜 애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아버지의 핀잔에 머쓱해진 어머니를 경환은 웃으며 바라보았다.

    “얼마나 보고 싶으시면 그러시겠어요? 다음 달 비행기로 어머니와 장모님 일정을 준비를 해 드릴게요. 제가 진작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이 서방, 고마워. 희수를 보고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계속 눈에 밟히고 있었거든.”

    경환은 어머니와 장모님의 밝은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전생과 달라진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희생이 있었긴 하지만, 경환은 다시 찾은 새로운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늦은 저녁까지 부모님들과 시간을 보낸 경환은 오랜만에 가족들의 정을 느끼며 고단했던 하루를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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