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다시 사는 인생 - 137
회의를 마친 경환은 일행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온 상태였다. 많은 기업들이 SHJ와의 만남을 요청하며 연락을 해 오고 있었지만, 경환은 기업들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오성그룹에서는 집요할 정도로 접근을 해 오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서 움직이게 될까요? 지금 움직인다 하더라도, 상당한 피해는 감수를 해야 될 텐데요.”
“강석주와 문기석의 파벌 싸움에서 누가 승리를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정치권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보니 쉽게 장담을 할 수는 없어 보이네요.”
문기석이 회의를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곳곳에 숨겨져 있는 강석주의 지원세력들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두 사람의 파워게임의 향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경환은 더 이상은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하네요. 한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우리의 움직임도 달라져야 될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임스의 결정을 지지하겠어요.”
“고마워요. 린다. 그래도 적지 않은 혜택을 한국 정부로부터 얻어 냈으니 우선은 그걸로 만족을 합시다. 한국 정부가 움직인다 하더라도 주가의 폭락은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우량기업을 선정해서 지분을 확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보도록 해 봐요.”
린다는 혹시라도 한국 정부가 경환의 제안대로 움직이게 된다면 그동안 준비한 투자전략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된다는 것에 아쉬워했다. 물론 문기석과의 담판으로 SHJ가 투자해 설립한 법인이나 인수하는 기업에 대한 법인세를 5년간 면제받고 10년간 50% 감면을 받는 조건과 휴대폰 제작업체 인수를 승인한다는 조건을 받은 게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장님, 타케우치 부장과 박화수 사장이 도착했습니다.”
하루나의 안내에 코이치와 박화수가 들어왔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두 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코이치는 박화수의 도움을 받으며 법인 설립에 따른 사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JSC 서울사무소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인지, 코이치는 큰 무리 없이 법인 작업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경환의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은 그동안의 진행상황을 간단히 보고하며 추후 지시사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초조사는 다 되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직접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관공서도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법인작업이 시작되면 두 달 안에 절차를 완료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문기석 실장이 신경을 많이 쓰긴 한 거 같습니다. 법인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떠한 뒷돈거래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니 타케우치 부장님은 이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정치권에 끌려 다닐 일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한국에서 기업을 키우려면 관공서와 정치권의 결탁 없이는 불가능하단 것을 경환은 알고 있었지만, 정치권에 목줄을 잡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강석주 장관의 비호세력들이 방해를 할 수도 있으니, 박 사장님과 타케우치 부장님은 항상 신경을 쓰셔야 될 겁니다. 한국이 아니더라도 우리를 유치하기 위해 접촉을 시도해 오고 있는 곳에 있다는 걸 이용해서 그들에게 끌려 다니지 마세요.”
강석주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경환은 크게 신경을 쓰이지는 않았다. 현재 일본은 적극적으로 SHJ를 끌어들이기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미련을 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현재 SHJ-화성플랜트의 특수플랜트 설계에 대한 노하우는 새로 설립될 SHJ엔지니어링으로 이관작업을 서두르도록 하세요. 본사에서도 KBR과 JSC, KENTZ에서 이전된 기술을 이관토록 하겠습니다.”
경환의 지시사항을 듣고 있던 린다는 입 주위를 손으로 매만지며 깊은 고민에 빠져 들었다. 경환이 모국인 한국에 너무 집착을 한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경환의 폭주에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린다였지만, 이번만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린다는 입에서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한국에 대한 애착이 많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SHJ의 수장이란 사실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SHJ의 투자가 너무 한국에만 집중이 되고 있다는 게 우리의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북이 분단되었고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고 봅니다.”
경환은 린다의 조언에 사심이 전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태수와 더불어 SHJ 안에서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인 린다를 인정하고 신뢰하고 있었다. 경환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린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적해 줘서 고마워요. 아시아는 SHJ로서도 포기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시장성으로만 보자면 중국에 진출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보다도 컨트롤하기 어려운 나라가 중국이라고 생각합니다. SHJ 아시아 본부는 한국과 일본, 두 곳의 상황의 지켜보며 결정을 할 생각입니다.”
경환은 자신이 한국인이란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국보다도 자신이 지켜야 될 곳은 SHJ란 것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타케우치 부장님은 법인작업을 시작하세요. 자본금은 천억 원으로 하시고, 자본금 납입은 한국의 환율변동 추이를 지켜보며 본사에서 결정하게 되겠지만, 올 연말은 넘기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계속 남아서 투자법인 설립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요동치는 한국 경제와는 상관없이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은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투자에 대한 세부사항을 조율하기 위해 직원들이 빠져나가고 있을 때, 하루나가 조용히 다가와 휴대폰을 건넸다.
“사장님, 대현중공업의 정상길 사장입니다.”
생각보다 이른 전화에 경환은 급히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이경환입니다. 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서울의 도심은 차량의 홍수 속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경찰차의 컨보이를 정중히 거절한 경환은 경호팀 일부만 대동한 채 대현그룹이 있는 계동에 도착했다. 이미 대현그룹의 정문 앞에는 정상길이 나와 경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바쁘신데 이곳으로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호텔에만 있어 답답했습니다. 오랜만에 서울 시내를 나오게 돼서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기업들의 면담을 모두 거절하고 있는 상태에서 경환의 일거수일투족은 여러 눈들에 의해 관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대현그룹 방문은 다른 그룹이나 정부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경환은 정상길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저희 회장님께서 이 사장님을 꼭 한번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경환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 미안했던지, 그룹 회장실에 들어설 때까지도 정상길은 경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룹 회장실 안에는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한 노쇠한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환을 향해 악수를 청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대현그룹을 이끄는 정규병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SHJ 사장 이경환입니다.”
한국의 건설신화의 주인공을 마주한 경환은 고개를 숙여 정규병이 내민 손을 잡았다. 지난 대선 참패의 여파로 문민정부의 집중견제를 받아서인지 초췌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아직 살아있었다.
“대현그룹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경환 사장과의 회의가 끝난 후 청와대가 발칵 뒤집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은총재와 금융연구원장까지 소환되었다고 하더군요. 문 실장과 강 장관 둘 중 하나는 옷을 벗게 될 거란 소문도 들리던데 대단하십니다.”
경환은 어이가 없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회의의 내용과 결과가 이미 대현그룹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레임덕이 심각하다는 것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정부의 견제를 받는 대현그룹까지 소식이 들어갔다면, 자신이 거론한 기아자동차 건으로 인해 오성그룹은 비상이 걸리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에 경환은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결과는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예측을 할 뿐이지 실제로 상황이 발생한 것은 아니니까요.”
정규병은 아직 서른밖에 되지 않은 경환의 눈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눈을 흔들림 없이 똑바로 마주보며 질문을 교묘히 피해가는 경환의 모습에 정규병의 입가엔 가벼운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 대현중공업과의 합작을 성공한 이후, 그룹 전체에 대한 컨설팅 의뢰를 한 것으로 아는데 사업이 진행되지 못해 아쉽게 생각합니다.”
“다 때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급하게 먹는 떡이 체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대현그룹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그럼 때가 되었다고 판단을 내린 거군요. 반도체와 함께 휴대폰 제조부문은 우리 대현그룹에서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사업이란 것도 잘 아실 거 같은데요.”
정규병은 경환의 반응이 어떨지 일단 찔러보았다. 경환은 정규병의 허세에도 표정의 변화 없이 정규병을 바라보며 탁자 위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그럼 육성을 하시면 되겠군요. 저는 금성반도체를 먹기 위해 차기정권에 줄을 대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반도체를 먹기 위해선 사업성이 떨어지는 휴대폰 제조부문이 골칫거리가 될 텐데 따로 육성계획을 가지고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상길의 보고를 받았을 때만해도 SHJ가 물밑작업을 하고 있는 반도체 통합계획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면전에 육성을 해 보라는 말로 도발하는 경환을 한참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결코 만만하게 대할 상대가 아니란 것을 정규병은 깨닫고 있었다.
“흠, 흠. SHJ의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하더니, 허장성세가 아니군요. 내 이 사장을 시험해서 미안합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만약에 반도체가 통합된다면 사업적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봅니까?”
“아직 제가 드린 제안에 회장님의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저도 한 기업의 오너란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정규병의 위치엔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경환은 꿀리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SHJ를 컨설팅 기업으로 대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경환은 정규병과의 만남을 질질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현그룹의 골칫거리를 SHJ가 떠안겠다는 게 싫으시다면, 저도 미련을 버리겠습니다.”
태도를 바꿔 강경한 발언을 하자, 정규병의 기세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허허, 내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군요. 아까 한 질문의 답변과 대현중공업과의 플랜트합작을 이어간다는 조건이라면, SHJ가 제시한 금액에 휴대폰 제조부문을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답변을 해 주시겠습니까?”
정규병은 무슨 이유로 오성그룹이 SHJ와의 합작에 매달리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SHJ와의 끈을 이어가며 합작을 추진한다면, 휴대폰 제조부문을 넘기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는 계산을 이미 마친 상태였다. 경환은 아무리 정규병의 확답을 받았다 하더라도 반도체 부문은 망한다는 말은 할 생각이 없었다.
“우선 회장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먼저 반도체 통합 부문은 회장님의 뜻대로 흘러가게 될 거라고 저희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현그룹은 건설과 중공업으로 잔뼈가 굵은 기업인만큼, 반도체나 전자와 같은 세밀함이 필요한 업종과는 맞지 않다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성전자를 누르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 할 것입니다.”
정규병은 고개를 끄덕여 경환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지만, 대선 패배 후 그룹의 성장이 급속도로 위축된 상태에서 차기 정권과의 밀약을 위해서라도 반도체 통합작업은 진행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슴 졸이며 듣고 있던 정상길은 극적인 합의가 이뤄지게 되자 굳었던 얼굴을 필 수 있었다.
“자, 인수절차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은 밑에 직원들에게 맡기고, 가볍게 술 한 잔 하러 나갑시다.”
몸이 불편한 정규병을 대신해 경환을 접대하려는 정상길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경환은 정중히 정상길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은 식구들과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경환은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춰 자신을 배웅하려 일어서는 정규병을 바라보았다.
“너무 수구초심에 매달리다 보면 자신이 이뤄 놓은 것을 허물 수도 있습니다. 차기 정권이 들어서게 되면 회장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시게 될 겁니다. 현명한 결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차기 정권이 들어선 후, 대북사업에 그룹전체의 역량을 집중하게 되지만, 결국은 그룹이 조각나게 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정규병은 느닷없이 수구초심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경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