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다시 사는 인생 - 136
“하루나, 커피 한잔 주세요. 아침은 생각이 없으니 치워주시고요.”
하루나는 아침 일찍부터 서류를 챙기느라 식사를 거르는 경환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커피를 건네주었다. 구글의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새로운 기능을 탑재한 휴대폰도 디자인 점검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잠잘 시간까지 쪼개 쓰고 있는 상태였다.
“구글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서서히 입소문이 나며 가입자가 늘고 있습니다. 애드센스에 대한 광고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보니, 광고주와 개인 웹사이트 소유주들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다음 달 서비스 시작에는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습니다.”
아직 야후나 MS에서는 애드센스의 폭발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애드센스가 성공리에 안착을 하게 되면 퍼블리셔 네트워크나 MS 애드센터를 선보이게 되겠지만, 3년이나 앞서 출시되는 애드센스를 따라가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린다는 구글에 대한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리 확대되어가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흠, 슈미트 사장이 실리콘밸리에 지사를 설립하자는 의견을 보내왔는데, 린다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다. 휴스턴은 빠르게 변화하는 IT 산업의 정보를 확보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글이 커 나가기 위해서라도 실리콘밸리에 지사를 운영하면서 기술개발과 인수를 추진해야 될 거 같습니다.”
의외로 슈미트 사장의 의견에 동조를 하는 린다를 경환은 물끄러미 쳐다보며 미소를 보였다. 퀄컴과 구글의 성과를 보면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쩌면 무모할 정도의 투자를 IT에 집중했는지 이유를 몰랐던 린다는 서서히 경환의 투자가 올바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린다의 의견이 그렇다면 저도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 슈미트 사장과 협의해서 지사를 설립하도록 하세요. 대현전자의 휴대폰 제조부문을 인수하게 된다면 신형 모델을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생산하도록 해야겠어요. 눈앞의 경쟁자는 노키아와 모토롤라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오성전자를 경쟁상대로 살펴야 될 겁니다.”
“원화로 천억 원이면 우리에게도 부담이 되는 금액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윈 사장과 협의를 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성전자는 후발주자 이지만,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어필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 생산라인을 갖추게 된다면 오성전자와의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관심 있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린다는 경환의 의도를 잘못 알고 있었다. 단순하게 한국에서의 경쟁이 아닌 세계무대를 상대로 오성전자와의 경쟁을 얘기하고 있었지만, 아직 세계시장은 노키아와 모토롤라의 아성을 깨트릴 업체는 없다고 린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린다와의 짧은 회의를 마친 경환은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찾은 한국이었지만, 본가에도 찾아가지 못하고 겨우 전화통화만 할 정도로 경환의 일정은 바쁘게 짜여 있었다.
“사장님, 지금 나가셔야 제 시간에 도착하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경환에게 하루나는 양복 상의를 걸쳐주며 약속된 시간을 알려주었다.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고쳐 주는 하루나의 행동이 경환을 어색하게 만들었지만, 하루나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사장님, 컨보이해 줄 경찰차량이 도착을 했다고 합니다. 나가시죠.”
하루나가 경환의 넥타이를 고쳐주는 모습이 이상했겠지만, 알은 전혀 내색 없이 경환의 경호에만 집중하며 호텔 문을 나섰다. 경호팀에 지시를 내린 알은 경환이 탑승한 선도차의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고 경찰차량의 선도에 따라 대규모의 차량행렬이 워커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실장님, 차량이 과천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5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문기석은 경환의 도착에 맞춰 청사 앞에 나와 있었다. 문기석과 함께 강석주의 모습이 보였지만, 강석주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막 서른 살에 접어든 젊은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 경제부 수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이 문 앞까지 나와 있다는 사실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기석이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손목을 들자 경찰차량을 선두로 차량행렬이 청사 정문을 통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량이 멈춰 서자 알과 경호팀들이 빠르게 내려 경환의 차량으로 다가섰고 경환이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습니다. 제가 문기석 실장입니다.”
“강석주라고 합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SHJ의 이경환입니다.”
반갑게 경환과 악수를 나누는 문기석과는 달리 강석주는 아랫사람 대하듯 건성으로 악수를 건넸고, 경환은 강석주와 눈을 마주친 후 개의치 않는 듯 가벼운 미소만 지어보였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자,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회의실로 올라갑시다.”
“청사 안은 총기휴대가 불가능합니다. 이해 부탁합니다.”
경환은 문기석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경호팀의 총기휴대를 강력히 주장했고 문기석의 동의를 얻어냈었다. 이것은 알의 요청도 있었긴 했지만, 한국정부와의 힘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경환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퉁명스러운 강석주의 말에도 경환은 일절 대응하지 않고 알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렸고, 알은 자신과 경환을 근접 경호할 인원 두 명의 총기를 대기 인원들에게 맡긴 후에야 청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회의실에 도착한 경환은 린다를 포함해 SHJ의 직원들을 일일이 문기석과 강석주에 소개시킨 후 문기석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같은 한국인으로써 이경환 사장님이 자랑스럽습니다. 30만평 규모의 SHJ타운을 조성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한국인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SHJ는 엄연히 미국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미국기업입니다. 그리고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인이 아니다 보니 회의는 영어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경환의 신상은 안기부와 해외 공관들에 의해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지만, 젊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철함을 보이는 경환에 문기석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기석은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우선 한국에 투자를 결정해 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SHJ의 투자에 맞춰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나갈 것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투자를 위해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번 미팅의 결과에 따라 투자와 투자내용이 결정될 것입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문기석이 먼저 투자 얘기로 말꼬를 트자 경환은 표정변화 없이 빠르게 답변을 해 나갔다. 자신의 말을 단칼에 끊어 버리자 문기석의 입은 쉽게 열리지 못했다. 경환은 공치사를 남발하며 회의를 길게 끌어가고 싶지 않았다.
“제 방한을 요청하신 이유가 투자인지 아니면 다가올 외환위기에 대한 내용인지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SHJ 경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재윤 수석님께 드린 SHJ 내부문건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다분히 도발적인 경환의 질문에 강석주의 얼굴은 붉어져 갔다.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OECD 가입을 위한 금융자율화 조치와 종금사 확대는 모두 자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저는 아직도 한국이 외환위기에 노출되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될 겁니다.”
경환의 입에 침을 튀며 항변하는 강석주를 보며 두 팔꿈치를 탁자에 대며 손을 마주 잡았다. IMF 구제신청은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고 방송에서 떠들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동의를 하시던 안 하시던 시나리오는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획에 따라 흘러가고 있습니다. 강 장관님께 여쭙겠습니다. 오성생명과 종금사에서 기아자동차의 자금 5천 5백억 원을 회수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는데, 한국정부에서는 이를 방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더군요. 한국의 외환위기는 기아자동차의 이상 신호와 함께 시작될 것입니다.”
강석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아자동차의 합병 건은 오성그룹의 계획서로만 존재할 뿐, 외부로는 전혀 노출이 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SHJ의 정보력은 오성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정부에서 방조를 하고 있다니요. 말을 삼가세요!”
강석주는 넥타이를 풀어 제치며 언성을 높였지만, 경환은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전에 막을 수도 있었던 IMF 사태를 방조한 경제 관료들이 자신의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고, 막상 IMF 사태가 터지자 마치 자신들의 노력으로 최악의 위기는 막았다고 떠들어대는 모습을 떠올리며 경환은 분노하고 있었다.
“강 장관은 자중하세요. 지금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경환과 강석주의 격돌로 격앙되어진 회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문기석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문기석은 강석주가 오성그룹과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디테일한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는 SHJ의 정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재윤 수석이 만든 보고서를 살펴보았습니다. 현재의 한국 경제가 흘러가는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러나 쉽게 동의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나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원인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제가 박재윤 수석님께 자료를 넘겼을 때 준비를 했다면 큰 상처 없이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늦었습니다. 지금 논의 되어야 할 것은 피해를 어디까지 줄여야 되느냐는 것이라고 봅니다. 피해를 줄이든 줄이지 못하든 여기계신 분들은 국민들의 지탄에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헤지펀드의 대규모 자금이 이미 한국에 유입되어 작전이 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천적으로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쉽지만, IMF 구제금융을 막느냐 못 막느냐가 지금으로선 최선의 대책일 수밖에 없다고 경환은 생각했다.
“린다, 현재의 한국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자료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사장님. 현재 헤지펀드의 대표주자인 퀀텀과 타이거의 자금은 이미 한국에 유입된 상태입니다. 한국의 현 외환보유고는 292억 불 이지만, 80억 불은 해외 점포 예치금으로 빠져 있어 가용외환은 218억 불에 불과합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경상수지의 3년간 누계적자로 340억 불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지펀드의 주목표는 역외시장에서 한국의 채권선물과 유가증권의 가격을 끌어내려, 이상 신호를 감지한 외국 자본들은 투자금을 회수하도록 유도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의 환율은 폭등하게 되며 가수요까지 겹치게 되면 200억 불이란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치게 됩니다. 한국이 디폴트선언이나 IMF 구제금융으로 고민을 하게 될 때, 헤지펀드는 차익을 실현하고 빠지게 되는 시나리오입니다. 헤지펀드는 대만을 시작으로 홍콩 동남아를 돈 후 최종 한국에서 멈추게 될 거라고 판단됩니다.”
“그, 그런 말도 안 돼는.”
린다의 장황한 설명에 강석주는 안색이 변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경환은 강석주를 철저히 무시해 버렸다. 문기석은 린다의 설명이 끝나자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잘 들었습니다. 단기 외채까지 포함하게 되면 이미 한국은 부도상태나 다름이 없겠군요. 죄송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도가 있겠습니까?”
문기석은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시기를 놓쳤다는 경환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한국은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기석은 자신이 책임을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경환은 그런 문기석의 모습에서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2의 멕시코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시장 환율제를 도입해야 됩니다. 일 년 전에 움직였다면 900원대에서 조정이 되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1100원에서 1200원 대로 조정이 될 것입니다. 또한, 부실한 종금사들에 대한 통제기능을 강화해 단기 외채의 폭을 줄이고, 오성그룹이 기아자동차를 합병하는 계획을 사전에 방지하십시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한국은 디폴트 선언이나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겁니다. 이런 사태가 오게 된다면 한국의 공기업과 우량기업들은 해외자본에 종속되게 될 것입니다.”
긴 한숨을 내뿜으며 회의실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문기석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정치적 입지를 위해 박재윤 수석의 경질을 막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 이런 말도 안 돼는 말로 한국정부를 기만하지 말아요. SHJ가 뭘 노리고 이런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강석주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경환을 향해 삿대질을 해 대고 있었지만, 경환은 그런 강석주를 비릿한 웃음을 보이며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강 장관, 당신은 가만히 있어! 당신은 지금까지 직무유기를 한 거야. 내 정치생명을 걸고 당신은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강석주를 향한 문기석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문기석의 분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강석주는 얼굴을 돌리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한은총재와 금융연구원장을 청와대로 호출하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