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35화 (11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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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35

    한보철강의 부도사태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삼미그룹과 진로그룹의 자금난 악화가 심화되고 기아자동차에 대한 모종의 작업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외환위기는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제지표와 외환수급상황에 빨간불이 켜지게 되자 문기석은 이례적으로 경제수석과 경제부 장관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지만, 회의는 아무런 대책이나 결과물 없이 지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 장관, 삼미그룹의 법정관리 신청이 초읽기로 들어간 상황에서 그룹의 해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그나저나 강 장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고 있는데, 사실여부를 떠나서 자중을 하셔야 될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라니요?”

    “오성그룹에서 기아자동차를 노리고 강 장관과 물밑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기아자동차까지 무너지게 된다면 그 여파는 삼미그룹과는 비교도 될 수 없다는 거 잘 아시리라 봅니다.”

    오성자동차 부산유치위원장을 맡았던 강석주는 친 오성그룹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95년 오성그룹은 무리하게 자동차에 진출했고 현재 독자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경영이 악화되어 그룹전체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룹 비서실 주관으로 오성자동차를 회생시키고 대현자동차에 필적할 만한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해 기아자동차를 전략적 인수하려는 작업을 시작하려 했고, 정부의 정책을 움직이기 위해 강석주를 파트너로 잡아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강석주는 개별기업 문제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말로 오성자동차의 첨병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퍼트린 헛소문입니다. 문 실장님께서 그런 헛소문에 현혹되시다니 안타깝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 정부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처신을 잘 하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침을 튀겨가며 부정을 하는 강석주의 모습에 문기석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청와대 사정 팀에 의해 이미 강석주와 오성 간의 작은 만남이 포착되었지만, 레임덕이 시작된 상태에서 강석주를 통제할 명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까지 방만한 경영을 일삼는 기업들의 뒤만 봐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정부의 지원만 바라는 기업들은 이번 기회에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문기석은 한마다를 더 하려다 입을 닫았다. 오성그룹에서는 오성생명과 종금사를 통해 기아자동차의 차입금 5천 5백억 원을 회수한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놓고 있었고, 강석주는 이런 오성그룹에 맞춰 수출 D/A 한도 및 L/C와 진성어음의 할인거부 정책으로 기아자동차의 손과 발을 묶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SHJ 이경환 사장이 입국합니다. SHJ는 한국에 투자와 함께 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미국에서도 차입금 없이 30억 불 규모의 타운을 건설할 정도로 능력이 인정된 기업이니 만큼 소홀함이 없어야 될 겁니다. 더욱이 SHJ-퀄컴은 우리의 무선통신사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고요.”

    문기석은 언론을 이용하여 경환의 한국방문을 언론에 흘렸고, 미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SHJ의 오너가 한국인이란 사실에 흥미를 느낀 언론에서는 연일 특별 기사를 보도하고 있었다. 강석주는 경환의 방문에 호들갑을 떨고 있는 청와대와 언론들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기업들의 부도사태와 각종 경제지표가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에서 반기를 들 입장은 되지 못했다.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외국기업인 SHJ에 퍼 주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올해 들어 한국에 투자된 외국자본이 빠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 모르십니까? 제가 보고 받기로는 이경환 사장을 만나기 위해 오성그룹은 물론이고 대현그룹과 금성그룹 거기에 대후와 제일까지도 선을 대려고 안달이라는데 경제부 수장인 강 장관께선 아주 태평하십니다.”

    박재윤의 경질서부터 시작된 문기석과 강석주의 알력은 한보철강의 부도사태 이후 극에 달해 있었다. 문기석의 비아냥거림에 강석주의 얼굴은 굳어져 갔지만, 오성그룹에서조차 자신에게 경환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는 요청을 해 오고 있어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아쉬운 건 우리지 이경환 사장이 아니란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겁니다.”

    데일경제신문의 김 기자는 자신의 라이벌인 선조경제의 황 기자를 발견하고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국에서 잘 나가고 있는 SHJ의 오너가 한국인이란 것과 투자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은, 요즘처럼 우울한 경제 소식으로 신문을 도배하고 있던 중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과 같았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김포공항엔 언론사와 방송사의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이, 황 기자. 삼미그룹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는데, 거기는 안가고 여긴 웬일이야?”

    “하하하, 사돈 남 말하고 계시네. 자네가 가는 곳에 내가 있다는 거 아직도 몰라?”

    희죽거리며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린 황 기자를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이미 방송과 신문으로 경환의 방한 목적에 대해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딱히 특종이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라이벌이 아닌 동료로 돌아와 있었다.

    “생각나? 7년 전 화성산업과 KBR 간의 계약을 이끌어 낸 사람이 이경환 사장이란 사실 말이야. 그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는데 이경환이란 사람의 행적을 조사하면 할수록 대단한 거 같더라고.”

    “생각나지. 기술이전 계약과 국내 최초로 ISO인증을 받은 게 그 사람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하더군. 정확한 투자의 목적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데, 뭐 좀 아는 거라도 있어?”

    집요하게 캐묻는 황 기자에게 묘한 미소를 보여 긴장감을 주었지만, 김 기자 자신도 SHJ의 투자 정보는 아직 손에 쥐지 못하고 있었다.

    “나 먼저 가네. 나중에 소주나 한잔 하자고.”

    입국장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나오자 기자들이 달려들어 취재경쟁에 돌입했고, 알은 자신이 이끄는 경호팀을 지휘하며 기자들이 경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기 시작했다.

    “이경환 사장님. 이번 방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경환 사장님.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제기하셨다고 하는데,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황 기자는 쉴 새 없이 경환에게 질문을 퍼 붓고 있었고 김 기자는 그런 황 기자를 어이없는 듯 쳐다보았다. 외환위기 가능성을 제기 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자신의 방한이 언론에 빠져나간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외환위기에 대한 정보까지 기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얼굴을 찡그리며 알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기자들 앞에 나섰다.

    “이렇게 환대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정부의 요청에 의해 방한을 했습니다. 지금은 어떠한 말씀도 드릴 수 없지만, 일을 마치고 출국하는 날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환의 답변이 끝나자 기자들은 다시 벌떼처럼 달려들어 경환을 에워싸려고 했지만, 경호팀의 강력한 제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나타난 공항경비대의 도움으로 공항을 빠져나온 경환과 일행은 준비된 차량에 탑승하여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린다, 하루나. 모두들 괜찮나요?”

    “우리들은 괜찮아요. 이중플레이를 하는 한국정부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네요.”

    기자들에게 많이 시달려서인지 린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고 있었다. 경환은 린다의 말에도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차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방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조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경환은 이번 방한 일정이 쉽게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나, 대현그룹과의 만남을 서두를 필요가 있겠네요. 정상길 사장에게 전화를 넣어 오늘 저녁약속을 잡아 줬으면 해요. 그리고 휴대폰은 OEM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한국에 생산라인을 갖추는 것이 유리할지에 대해 검토를 해보세요.”

    경환의 지시를 받은 하루나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 대현중공업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고, 린다는 경환의 즉흥적인 제안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차량은 천호대교를 넘어 위커힐에 도착했고, 사전에 연락을 받은 호텔의 직원들과 SHJ 경호팀의 삼엄한 경호에 기자들은 호텔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하하하, 이 사장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정 사장님, 바쁘신데 일정을 제 멋대로 조정을 해서 죄송합니다. 이해 부탁합니다.”

    “이 사장님이 부르면 달려와야죠. 우리 대현 이외에도 이 사장님을 만나려는 그룹들이 줄을 서고 있는데요. 그나저나 삼풍백화점 건은 죄송했습니다. 제가 신경을 써야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워커힐 지하에 있는 중식당엔 정상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 대현그룹과는 더 이상 합작을 진행하고 있지 않아 정상길의 애를 끓게 만들고 있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었던 사고도 아니었고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 사장님과 조용히 저녁이라도 같이 했으면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깔끔한 요리가 개인 접시에 놓여 끊임없이 탁자 위에 놓였고 경환과 정상길은 술까지 곁들이며 조용히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FPSO 1기는 이미 건조를 완료해 넘겨졌고 2기는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는 소식에서부터 현재 한국의 경제위기에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까지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강석주 장관과 척을 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더군요. SHJ가 한국기업이 아니라 별 상관은 없겠지만, 개인적인 야심이 많은 사람이니 항상 염두에 두셔야 될 겁니다.”

    경환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기자에게 외환위기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흘린 사람이 강석주란 사실을 정상길의 입으로 확인을 할 수 있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강 장관의 뒤에 오성그룹이 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오늘 정 사장님을 모신 이유는 대현전자 반도체에서 가지고 있는 휴대폰 제조부문을 인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 사장님이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사장님께서 다리를 놓아 주셨으면 합니다.”

    정상길은 마시던 커피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오성과 금성에서 휴대폰 제조부분에 참여하자 대현에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휴대폰 제조에 뛰어들긴 했지만, 점점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길은 쉽게 답변을 줄 수는 없었다.

    “대현그룹 차원에서 검토를 해 보십시오. 제가 알기론 대현전자에서는 반도체를 중점사업으로 키우기 위해 차기정권과 반도체 사업의 통합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금성에서 반대를 하겠지만, 차기정권에 줄을 대고 있는 대현이라면 어렵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지 2조원이 넘어가는 인수자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문제긴 하겠지만요.”

    정상길은 FPSO 인수에서도 느꼈지만, SHJ의 정보력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반도체 통합 건은 그룹 내에서도 거의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극비로 진행을 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허, 도대체 이 사장님은 모르는 게 뭡니까? 이렇게 대 놓고 말씀을 하시니 부인하기도 힘드네요. 그렇지만, 휴대폰 제조부문에 대한 매각은 제가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금성전자의 반도체를 먹기 위해선 휴대폰 제조부문을 포기하거나 매각해야 되는 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반도체에서 가지고 있는 휴대폰 제조부문을 천억 원에 매입할 의사가 있습니다. 만약 대현그룹에서 거절을 하신다면 저희는 폰택과 접촉할 생각입니다.”

    휴대폰 단말기는 오성과 금성, 중소기업으로 폰택이 3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오성과 금성과 달리 자금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폰택이라면 인수는 힘들더라도 지분매입은 충분히 가능할 거란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흠, 이 사장님의 제안을 그룹에 보고를 하겠습니다. 우리의 정보가 SHJ에 들어간 이상 줄다리기는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네요. 만약 인수제안을 받아들인다면 FPSO 이후로 중단된 플랜트 합작을 진행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SHJ는 단순한 컨설팅 업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준비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컨설팅이 아닌 공동입찰이라면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습니다.”

    경환의 답변에 정상길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플랜트 시장에서 컨설팅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적을 자랑하는 SHJ가 독자적으로 입찰 경쟁에 뛰어든다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정상길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애물단지인 휴대폰 제조를 넘기고 SHJ와의 공동입찰 전선을 구축할 수만 있게 된다면 본전은 뽑고도 남는다는 생각에 서둘러 경환과의 식사자리를 마친 정상길은, 급히 본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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