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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33화 (110/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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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33

    작년 12월 12일 프랑스 외무부에 OECD 가입서를 위탁, 정회원 자격을 획득한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며 환호성을 지르며 자아도취에 빠져있었지만, 한국의 경제 상황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한강의 기적은 이미 끝났다’는 부즈 앨런 앤드 해필턴 보고서를 시작으로 97년 새해가 밝자마자 OECD와 IBRD에서는 ‘97년은 경제적으로 한국인에게만 가혹한 한해가 될 거 같다’라는 충격적인 보고서가 연이어 발표되고 있었지만, 한국 정부는 여론을 조작하며 이런 우려를 가리기에만 급급했다. 경상수지 누적적자 372억 불은 332억 불의 외환보유고를 초과해 사실상 97년 1월부터 국가부도상태에 빠져들었다.

    ‘드디어 시작이 된 건가?’

    경환은 한보철강이 여신과 지급보증을 합쳐 5조 7천억 원을 일으킨 후 최종 부도처리 되었다는 기사를 읽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의 외환위기 상황은 코앞에 닥쳐왔지만, SHJ의 여력으로는 IMF 사태를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삼미그룹과 진로그룹, 기아그룹 등 한국의 중견그룹이 줄줄이 쓰러지고 결국엔 국가부도사태까지 가는 위기상황이 서서히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지만, 한국은 평온하기만 했다. 경제학자들과 재계에서 제기되는 위기론을 무시하고 있는 한국정부의 행태에 경환은 분노하고 있었지만, 망국으로 이끄는 문민정부 또한 한국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권이란 사실은 변할 수 없었다.

    “하루나, 쿡 부사장을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사무실엔 무거운 공기가 흐를 정도로 경환은 알 수 없는 먹먹함에 가슴이 답답해져만 갔다. 박재윤 경제수석의 경질이 있은 후부터 경환은 한국정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상태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경환은 사무실로 들어오는 린다를 보며 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임스, 안색이 좋지 못하네요.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요?”

    “한국의 외환위기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다 보니 마음이 불편하네요.”

    린다는 경환의 고민을 이해하고 있었다. SHJ에 합류하고 제일 먼저 받은 업무가 헤지펀드의 동향과 아시아의 외환위기 가능성에 대한 연구였지만, 그 당시엔 경환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헤지펀드의 아시아 외환시장 공격이 본격화된 지금 경환의 지시가 단순한 연구가 아닌 한국의 외환위기를 막아보려는 시도였다는 것을 알고 린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삼년 전에 어떻게 헤지펀드의 농간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는지 린다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SHJ가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경환의 예측력과 추진력이 밑바탕에 깔려있었기에 너무 깊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한국정부는 제임스의 경고를 무시했어요. 오히려 제임스의 의견에 동조한 관리를 내치기까지 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봐요.”

    경환의 복잡한 심정을 위로하려했던 린다의 말도 경환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망설이던 경환은 결심이 섰는지 린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지시했던 자금은 어느 정도까지 확보되었나요? 3억 불 보다는 많을 거 같은데.”

    “저희가 투자한 기업들이 상장되면서 주가차익을 많이 보고 있어요. 무리하지 않는 선이라면 5억 불까지는 가능해 보예요. 그러나 IT열풍이 부는 지금, 주식을 정리한다는 게 솔직히 망설여집니다. SHJ타운 건설이 시작되면 막대한 자금이 투입이 되어야 하는데, 불확실한 한국이다 보니.......”

    경환의 어두운 얼굴을 살피던 린다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동안 투자한 IT 기업의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상승을 하고 있었고 지금 정리를 한다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애국심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의 알짜기업들이 헤지펀드의 농간에 흔들리고 외국자본에 넘어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요. 저평가 되어있는 한국기업에 투자하는 것도 SHJ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봅니다. 린다의 말을 들어보면 무리를 한다면 8억 불까지는 가능하겠네요.”

    한국의 주가총액이 150조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8억 불로 입지를 다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IMF체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98년도엔 주가는 300포인트까지 곤두박질치며 주가총액이 64조로 떨어지게 되고 환율이 1900원대로 고공행진을 한다면 지금의 8억불은 20억 불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5월부터 자금을 확보하고 한국 상황을 주시하세요. 혹시라도 한국정부가 대응을 하지 못해 국가 부도상태까지 가게 된다면 그때가 투자의 적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게요. 자금운용에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금을 최대한 확보해 놓고 한국 상황을 주시하겠습니다.”

    애국심이 아니라고 하지만, 린다는 한국의 상황에 조금이나마 개입을 하려는 경환의 심정을 이해하기로 했다. 그 동안 한국정부와의 좋지 못한 관계에서도 경환은 SHJ를 한국과 연결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JSC의 인수를 포기한 후 한국에 법인을 설립하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 린다는 경환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SHJ의 자금에 무리가 되지 않는다면 막을 생각이 없었다.

    “SHJ-구글은 다음 주에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하더군요. 린다가 신경을 좀 써 주세요.”

    “인원을 계속 충원하고 있어요. 세 사람이 스탠퍼드, 버클리 출신이다 보니 인재들이 많이 모이고 있습니다. 자본금 천만 불이 들어가 있으니 당분간 자금 문제는 없을 거예요.”

    “고생했어요. 서비스 초기엔 슈미트 사장도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많은 시행착오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버리시고, 철저히 지원자의 입장에서 슈미트 사장의 경영방침에 지지해 주세요.”

    경환은 구글이 자리를 잡기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금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린다가 초반의 어려움을 통제로 풀어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린다의 자제를 요청하고 나섰다. 에릭과 래리, 세르게이를 비전문가인 린다가 통제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창의력에 제동을 거는 일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경환은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린다는 경환의 요청에 별다른 반응 없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경환은 비로소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청와대 비서실장 집무실엔 강석주 경제부 장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문기석 비서실장의 질타를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도대체 강 장관은 대책이 있기나 한 겁니까? 아무리 레임덕이 시작되고 있다지만, 경제 관료들의 복지부동한 자세에 개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한보철강이 무너지고 정계와 금융계의 밀착이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번지고 있는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벌써부터 차기정권에 줄을 서기 위해 고급 관료들의 이탈이 시작되면서 청와대의 레임덕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각 기업들의 자금경색이 심각할 정도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한보 철강에 이어 삼미와 기아자동차, 진로, 대농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업들이 부도위험에 빠져 있다고 하는데 경제부에서는 어떤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까?”

    강석주는 허리를 소파에 기대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평가된 환율과 원자재의 관세정책으로 기업들의 수출에 빨간불이 켜진지는 오래 되었고 단기 외채를 끌어다 구멍을 메우고 있는 상황도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모든 정책을 OECD 가입에 맞추다 보니 기업들의 부도사태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동안 방만한 경영을 한 기업들 스스로 만든 상황입니다. 더 이상은 정부에서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OECD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가 개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정리할 기업은 정리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론만 되풀이 하고 있는 강석주의 대답에 문기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현재 한국 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338%로 대만의 85%, 미국의 159%, 일본의 206%에 비해 상당히 높은 상태였다. 차입금으로 경영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 기업은 빚내서 빚을 갚는 형태였다. 경기가 급속도로 냉각되고 수출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에서 차입금 조달에 어려움이 발생한 기업들의 유동자금 악화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 하나가 무너지게 되면 파생되는 여파가 심각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강 장관은 이 서류를 본 적이 있습니까?”

    문기석은 신경질적으로 서류하나를 강석주 앞에 던져 놓았다.

    “이 문서는 박재윤 수석이 일전에 만든 문서가 아닙니까? 타당성 없다는 결론이 난거로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 문서를 꺼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석주는 서류를 몇 장 넘기지도 않은 채 다시 덮어버렸다.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려는 문기석에 강석주의 얼굴은 붉어져갔다.

    “경제부에서 가능성 없다는 결론을 보였다지만, 내용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 아닙니까? 박 수석이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현재 경상수지 적자는 외환보유고를 넘어섰습니다. 이 문서에 나와 있듯이 헤지펀드와 결탁한 해외자본이 외환시장을 공격한다면 막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 그건......, 가능성 제로입니다. 성장과 수출에 대한 기초변수들이 외환위기를 겪었던 멕시코와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와 비교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이 보고서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금사의 단기 외채 차입은 제재를 해야 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문민정부는 24개의 투자금융회사를 종금사로 전환시켜 국제금융업무와 리스업무까지 허용하였고, 후발 종금사들은 단기 외채를 차입해 장기리스로 운용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었지만, 정부의 실세들과 결탁한 이들 종금사에 대한 관리감독은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금융실명제로 성공을 거두는 듯 했지만, 종금사를 확대한 정책은 문민정부 최악의 실책으로 외환위기의 주범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어르신께 이 보고서를 전달했습니다. 박 수석의 말로는 처음 이 시나리오를 작성한 사람은 따로 있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위기라고 하는데 강 장관만 무사태평인 거 같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살리기 위해 박재윤까지 경질시킨 강석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OECD 가입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97년 들어서부터 막히기 시작한 경제상황이 강석주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희수를 바라보는 재미에 빠져 정시에 퇴근을 하던 경환은, 오늘도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양복 상의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서려는 순간 하루나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장님, 한국에서 온 전화입니다. 청와대라고 하는데 연결을 시킬까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청와대의 전화에 경환은 인상부터 구겨졌다. 한국정부와는 박재윤 수석이후 전혀 관계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전화에 경환의 심정은 다시 복잡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하루나, 연결시켜 주세요. 알에게는 바로 내려가겠다고 전달해 주시고요.”

    하루나가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경환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경환입니다.”

    ‘초면에 실례하겠습니다. 비서실장으로 있는 문기석이라고 합니다.’

    비서실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온 이유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던지, 경환은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또한, 청와대와 연결돼 좋은 일이 없었던 경환은 좋은 기분으로 문기석과 통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국정으로 바쁘실 텐데 먼 미국까지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는지요?”

    ‘아직도 목소리에 날이 서 있으시군요. 저도 박재윤 수석의 퇴진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문기석의 입에서 박재윤이 거론되자 경환은 일어선 몸을 의자에 앉히며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박 수석님과는 한두 번 만난 게 전부다 보니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는 사이는 아닙니다. 제가 퇴근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미사여구는 빼고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중국유학을 시작으로 한국정부와는 항상 엇박자를 보였던 경환은 문기석과의 통화가 달갑지 않았다. 줄 생각 없이 항상 바라기만 하는 한국정부의 행태에 경환의 인내심에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흠, 흠. 알겠습니다. 박재윤 수석이 작성한 외환위기 가능성에 관한 보고서를 다시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실제 작성한 분이 이 사장님이라는 말을 듣고 실례인 줄 알지만, 전화를 드린 겁니다. 한국을 한번 방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한국을 방문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저는 사업가지 경제학자가 아닙니다. 자문은 경제를 담당하는 장관님이나 경제학자에게 구하는 게 순서라고 봅니다.”

    경환은 일언지하에 문기석의 요청을 거절해 버렸다. 박재윤이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한다고 하지만, 이미 때를 놓친 상태에서 뒷북을 치는 자리에 참여할 마음은 없었다.

    ‘애국심에 호소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장님은 지금의 한국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장님의 신조가 GIVE AND TAKE이라고 하더군요. 무엇이 필요합니까?’

    다짜고짜 주고받자는 문기석의 제안에 경환은 어이가 없었다.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장고에 빠졌던 경환은 입을 열어 문기석의 제안에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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