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30화 (107/264)

#130

다시 사는 인생 - 130

출산을 몇 주 남기지 않은 수정의 배는 몰라보게 불러 있었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듣는 정우도 엄마의 배에 자신의 동생이 들어있다는 것을 아는지 벽에 그림을 그리는 거 이외에는 크게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경환은 걷기조차 힘들어 하는 수정을 부축해 소파에 앉히고는 그림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와 달리 희수는 순하네요. 입덧도 없었고 지금까지 뱃속에 있으면서도 힘든 줄 몰랐어요. 그런데 어떻게 딸인 줄 알고 이름을 미리 지어 놓은 거예요?”

경환은 수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가장 가까운 자신의 아내였지만, 비밀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경환이 짊어지고 가야 될 짐이었기 때문이었다.

“북경에 있을 때 SHJ란 회사이름을 만들었잖아. 아들은 정우, 딸은 희수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뭘.”

“딸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뭘 어쩌긴 어째? 딸이 태어날 때까지 힘을 써야지.”

수정은 어이가 없는 듯 경환의 가슴에 기대고 있는 머리를 들어 경환을 바라보았고, 경환은 미소를 보이며 임신으로 터진 수정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안나는 힘들어 하지 않아? 자기라도 좀 편하게 대해줘.”

“걱정 말아요. 우리와 어울리면서 많이 좋아지고 있어요. 아직 백인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예요. 요새 인준이 엄마 영어 가르친다고 매일 같이 붙어 다니고 있어요.”

잭이 사우디로 떠나면서 홀로 남겨진 조안나는 백인 주류사회에 접근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수정을 포함한 SHJ에 속한 직원들의 부인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조안나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었다.

“김 부장님도 일 때문에 출장이 잦은데 인준이 엄마와 조안나가 서로 잘 어울려서 다행이네.”

“자기야, 희수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나도 일을 좀 하고 싶은데. 자기 생각은 어때요? 케이티도 일을 하고 있잖아요.”

수정은 경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경환은 물끄러미 수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경환은 정우와 희수를 다른 사람 손에서 키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수정의 생각을 마냥 모른 체 할 수도 없었다.

“나도 자기의 재능을 썩히게 하고 싶지는 않아. 희수 태어나고 생각을 좀 해 보자.”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다소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태어날 희수를 위해 신경을 써야 될 시기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수정은 경환을 보채지 않았다. 경환도 미술을 전공하고 석사까지 받은 수정을 집 안에만 가둬둔다는 게 맘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어린 정우와 희수는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였다.

“자기야, 아이들이 크기 전까지 집에서 일을 좀 해 볼래? 자기가 디자인 전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술적인 감각은 있다고 보는데. 어때?”

“전공분야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을까요?”

수정은 걱정과 기대감이 상존하는 복잡한 심정을 눈빛에 담았고, 경환은 그런 수정을 살포시 껴안았다.

“내가 도와줄게. 우선 휴대폰에 대한 획기적인 디자인을 한번 생각해봐. 현재 나와 있는 제품들과는 한눈에 봐도 차별을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이라면 더욱 좋을 거 같은데.”

경환은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디자인과 기능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면 수정을 통해 휴대폰의 일대 변혁을 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환의 지시에 새롭게 만들어진 디자인 팀은 경환을 만족시킬 만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어 경환을 답답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환을 수정의 손을 빌어 직접 관여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알았어요. 한번 해 볼래요.”

경환은 자신감에 차 있는 수정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고 정우가 두 사람의 입맞춤을 힐끗 보더니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그림그리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사무실에 출근한 하루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경환의 책상을 닦고 정리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실 안은 경환이 좋아하는 원두커피 향이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경환의 의자를 닦던 하루나는 의자의 등받침에 손을 가져다 대고선 한참을 그 자세를 유지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하루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외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 쉬던 하루나는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어? 하루나는 도대체 잠도 없는 겁니까? 너무 일에만 신경 쓰지 말고 연애도 하고 그래요. 미혼 직원들이 하루나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고 하던데.”

“저는 생각 없습니다. 먼저 커피한잔 드릴게요.”

출산을 한 이다나가 육아문제로 인해 비서직에서 일반 사무직으로 직무 조정을 요청했고 경환은 이다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투자분석 팀의 사무직으로 보직을 변경시켜 주었다. 이다나가 빠진 비서직은 하루나의 몫이 되었고 하루나는 경환의 예상대로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었다. 하루나가 건네주는 커피를 한 모금 넘긴 경환은 입 안으로 퍼지는 커피 향에 몸을 의자에 깊숙이 묻었다.

“하루나가 내리는 커피는 예술이네요.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회의실로 가셔야 될 시간입니다. 부서장들은 이미 모여 있습니다.”

시계를 확인한 경환은 급히 피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커피가 담겨 있는 머그잔을 든 채 서둘러 회의실로 향했다. 잡담으로 시끄럽던 회의실은 경환의 등장과 함께 조용해 졌다.

“황 부사장님부터 보고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JSC의 기술을 이전 받기 위해 팀을 선발해 놓고 있습니다. 인원은 본사와 SHJ-화성플랜트에서 우선 선발을 했고, LNG 플랜트 전문가 10명을 따로 채용을 했습니다.”

지난달에 있었던 사우디 프로젝트는 SHJ의 컨설팅을 KENTZ가 받아들여 JSC와 J.V 형식으로 참여했고 주위의 예상대로 무리 없이 입찰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물론 아람코에서 발주하는 이번 입찰은 SHJ와 아람코의 합작공장 물량을 확보한다는 이유를 들어 아람코의 물밑 지원이 있었다는 것은 SHJ만 알고 있는 상태였다.

“JSC가 장난을 못 치도록 철저히 검증을 하라고 하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JSC가 장난을 치는 순간 막대한 위약금이 청구 되도록 했습니다. 일본정부의 보증을 받아 놨기 때문에 쉽게 장난을 치지는 못할 겁니다.”

JSC의 숨통을 열어 주면서 SHJ는 가혹할 정도의 옵션을 내세워 JSC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그 중 하나가 은행의 이행보증이 아닌 일본정부의 이행보증을 요구한 것으로 JSC는 난색을 들었지만, 결국 후생성 장관인 간 나오토를 통해 SHJ의 요구를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KBR이 가지고 있는 SHJ-화성플랜트의 지분 23%는 1천 4백만 불로 합의를 했습니다. 급한 건 우리고 아직은 KBR과 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KBR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윌리엄과 합의를 한 리는 자신이 한 역할을 과대 포장해 경환에게 통보를 해 왔고 경환은 SHJ타운 건설과 관련해 리의 손을 잡기로 결정을 내렸다. 리를 이용한다면 1천 4백만 불 이하로 금액을 낮출 수도 있었지만, 경환은 속 쓰려할 윌리엄을 더 이상 자극할 생각은 없었다.

“서로 만족하는 선에서 끝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행해 주시고, SHJ-화성플랜트를 기반으로 한국에 플랜트 전문 엔지니어링 법인을 설립할 준비를 해 주세요. 법인이 설립되면 그동안 축척된 기술과 경험을 토대로 플랜트 단독수주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JSC의 기술을 이전받으면서 준비를 하겠습니다.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법인설립을 준비한다면 큰 자금 없이도 자본금을 최대로 늘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이 준비는 타케우치 부장님이 맡아 주셔야 됩니다. 일본에 금의환향을 할 수는 없지만, 새로 생길 법인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한국기업의 인수에도 관심을 가지시구요.”

JSC의 인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코이치는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었다. 경환은 그런 코이치를 바라보며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위로의 말을 전하지는 않았다. JSC를 포기한 경환은 방향을 바꿔 한국에 법인을 설립할 준비를 시작했고, 코이치에게 약속한 금의환향은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축하하네. 난 아직도 부사장인데 자네가 먼저 사장을 달게 생겼구먼. 하하하.”

“감사합니다. 사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던 코이치는 황태수의 축하를 받자 눈가가 붉게 충혈된 모습으로 경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비록 일본은 아니지만, 한국에 설립될 법인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다짐이 코이치를 떨리게 하고 있었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 계속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데 급하긴 급한가 봅니다.”

황태수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지만, 경환의 인상은 급격히 구겨지고 있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자금으로 JSC를 압박하려던 계획이 SHJ의 합작으로 무산되고 JSC의 자금에 숨통이 트이자 부리나케 SHJ와의 합작을 재추진했지만, SHJ는 일절 응하지 않고 있었다.

“미쓰비시그룹의 자금을 지금은 당해낼 수 없지만, SHJ의 이름이 존재하는 한 미쓰비시그룹과는 어떠한 합작도 없다는 것을 다들 기억해 주십시오. 아울러 미쓰비시그룹과 손을 잡는 기업은 SHJ의 잠재적인 경쟁업체라는 사실을 파트너들에게 주지시키십시오.”

경환의 이 한마디로 미쓰비시중공업과의 관계는 종결되었고, 미쓰비시중공업은 알제리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플랜트 입찰에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쿡 부사장님도 보고를 해 주세요.”

미쓰비시중공업으로 짜증이 난 경환은 화제를 돌려 린다의 보고를 듣고자 했다. 플랜트와 달리 급격하게 성장을 하고 있는 투자와 IT에 대한 보고를 통해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다.

“우려와는 달리 SHJ-퀄컴의 성장세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적자를 면한 상태이긴 하지만, 내년도 한국의 PCS 서비스가 시작되면 매출성장은 급격하게 이뤄질 것으로 봅니다. 또한 중국의 장성공사의 CDMA업무는 새로 생긴 CHINA UNICOM에 인수되었고 CHINA UNICOM에서 새롭게 접촉을 시도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검색엔진 구글은 시험가동 중에 있으며 법인이 설립되는 내년 1월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투자로 확보한 라이선스는 두 회사로 이관시키고 있고 일부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들의 주가차익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투자한 금액을 상회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불기 시작한 닷컴 열풍으로 그동안 투자한 3억 불에 가까운 자금은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들의 주가차익으로 이익실현을 마친 상태였다. 린다를 비롯해 무모한 투자라고 반대하던 직원들은 경환의 예측력과 추진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쿡 부사장님이 자금운용을 제대로 해 준 덕분입니다.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들 일부는 정리해서 내년 한국에 투입될 자금을 확보하시고, 나머지는 99년도 상반기에 일괄 정리하겠습니다. 중국과의 CDMA 협상은 우리의 원칙에서 한발도 양보하지 말라고 다시 지시를 내리십시오. 중국보다는 러시아와 동유럽에 신경을 쓰라고 하세요. 문제는 디자인 팀에서 올라오는 휴대폰 디자인 기획 안인데 건질만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눈에 띠질 않습니다. 다음주에 제이콥스 사장과 디자인 팀장을 휴스턴으로 부르세요. 결정을 해야 되겠습니다.”

한국의 PCS 서비스가 시작되는 내년이면 다양한 종류의 단말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우수한 기능과 새로운 디자인으로 무장한 한국 단말기는 서서히 세계시장을 잠식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경환은 오성전자나 금성전자가 모델을 내 놓기 전에 시장을 선점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QCP 라인을 정리하지 않고 있었지만, 아직은 경환의 생각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최 부장님과 알은 요즘 어떻습니까?”

“KBR에서 지분인수가 끝나는 대로 공식적으로 휴스턴 롱포인트 지역으로 이전계획을 발표할 계획입니다. 다음 주면 조감도를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토지를 무상으로 받는다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되어야 할 대 공사였지만, 직원들과 달리 경환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최석현의 말이 끝나자 알이 말을 이었다.

“현재 45명까지 인원을 확보하고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85명은 전투요원으로 경호와 시설경비를 목적으로 훈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타운이 조성되기까지 인원을 최대한 확보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사장님과 가족들의 경호업무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원이 확충되는 시기에 맞춰 샌디에이고와 해외 현장에도 인원을 파견할 계획입니다.”

경환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SHJ의 기반을 닦는데 육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경환은 앞만 보고 달려왔다. 내년부터 시작될 SHJ의 화려한 등장을 경환은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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