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29화 (106/264)
  • #129

    다시 사는 인생 - 129

    경환은 SHJ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에 자신들이 생활하던 곳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래리와 세르게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실체도 없는 회사를 경영해 달라는 요청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지 아직은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SHJ에서 나오셨습니까?”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경환은 급히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사업가로는 보이지 않는 학교 선생님 같은 외모에 안경을 걸친 상대방은 이력서에서 본 사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미스터 에릭 슈미트,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SHJ의 대표 제임스 리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경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에릭은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안경 뒤의 눈매는 날카로웠다. 며칠 전 SHJ에서 자신을 영입하고 싶어 한다는 헤드헌터의 전화를 받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려 했지만, 실리콘밸리에 무차별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는 SHJ의 대표가 직접 온다는 소식이 에릭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두 친구는 SHJ에서 IT 개발팀장을 맡고 있는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입니다. 말을 질질 끌지 않겠습니다. 휴스턴에서 이곳까지 온 이유는 미스터 슈미트를 영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하하, 너무 성격이 급하시네요. 저를 높이 평가해 주셨다는 점에는 감사를 드리지만, SHJ와 제가 같은 길을 가지 못할 거 같습니다. 단지 실리콘밸리에 큰돈을 투자하고 있는 SHJ가 어떤 회사인지 궁금해서 나왔을 뿐입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미안합니다.”

    경환의 크게 기분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이 에릭이었다고 해도 SHJ를 선택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환의 직설적인 제안에도 에릭을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미스터 슈미트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휴스턴 촌구석에서 기름칠해 가며 밥 벌어 먹고 있는 SHJ가 IT산업에 뛰어든다는 게 가당치도 않다는 거,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IT 산업이 다가오는 21세기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미스터 슈미트도 부정하진 않으실 겁니다. 기업이 한 곳에 머물게 되면 그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SHJ의 미래를 IT 산업에 걸고 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IT 산업에 SHJ의 미래를 걸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IT 열풍이 언제까지 가리라 보십니까?”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닷컴열풍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을 시기였다. 물론 2000년을 기점으로 닷컴버블이 몰락하면서 IT 산업의 일대 변혁이 일어나지만 96년인 지금은 IT 산업의 몰락을 예견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경환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에릭을 영입하는 건 말처럼 쉬워 보이지 않았다.

    “저는 2000년을 넘어가면서 한번 큰 조정 기를 거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스터 슈미트는 SHJ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IT 산업에 투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SHJ는 기술을 원하지 주가차익을 보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에릭은 경환의 눈을 바라보았다. SHJ의 무차별 투자를 IT 열풍에 편승해 주가차익을 노리는 것으로 생각했던 에릭은 경환의 말이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같은 IT 산업의 몰락을 예상하면서도 정확히 년도를 짚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리고 참고로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퀄컴을 인수하면서 상장을 폐지한 거 알고 계실 겁니다. SHJ가 설립하는 IT 법인도 상장을 통해 자금을 확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닷컴버블이 터지더라도 우린 갈 길만 갈 생각입니다.”

    “IT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선 막대한 투자가 따라야 되는데 펀딩이나 상장을 통하지 않고도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실리콘밸리에 넘쳐나는 벤처기업의 목표는 미래를 선도하는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거 보다는 펀드를 조성해 투자를 받거나 나스닥 상장을 통해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펀딩이나 상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경환의 말에 에릭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물론 제가 사회사업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SHJ 외부의 압력에 끌려 다닐 생각이 없습니다. 다른 경쟁업체나 동종업체의 기술보다 뛰어나고 시대를 앞서는 제품과 서비스를 하게 된다면 수익은 자연히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구글을 통한 자신의 계획을 아직 합류가 불투명한 에릭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경환은 자신이 에릭을 인터뷰 하는 건지 자신이 인터뷰를 당하는 건지 구분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에릭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MS 독주를 허물어야 된다는 말을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JAVA를 연구하셨고, 리눅스의 대표주자인 노벨을 선택하신 거 같은데, 과연 리눅스로 MS OS를 허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생각지도 않은 경환의 질문에 기습을 당한 에릭은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리눅스의 취지는 좋다고 봅니다. 소스를 공개하고 리눅스 개발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거엔 저도 박수를 보내고 있고요. 그러나 일부 계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해도 마케팅과 대중성을 보자면 MS의 벽을 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는 단순하게 사업가의 안목으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목소리까지 떨며 격하게 반응하는 에릭을 경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엔지니어인 에릭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린 경환은 미소를 지우고는 에릭을 똑바로 쳐다봤다.

    “퍼스널컴퓨터의 OS와는 다른 획기적인 OS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SHJ의 모든 자원과 역량을 쏟아 부을 생각이고요. 현재 SHJ엔 IT 분야를 끌고 갈 전문경영인이 없습니다. 경영에 대한 모든 권한을 드릴 테니, SHJ에 합류를 해 주시죠.”

    순간 에릭의 눈이 떨리는 걸 확인한 경환은 진심을 다해 에릭의 합류를 재차 제안했다. 에릭은 안경을 벗어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 내고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미스터 리의 제안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SHJ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좋은 답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노력에도 꿈쩍이지 않는 에릭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경환은 허탈한 마음에 고개를 올려 한숨을 내 쉬었다. 안정된 퀄컴에 비해 안정시킬 구글이 걱정된 경환이었지만, 지금은 에릭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경환은 기회를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SHJ가 미스터 슈미트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음 기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래리와 세르게이와 함께 자리에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래리가 경환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제임스, 에릭 슈미트란 사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가요?”

    “내가 보기엔 너희 두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다음 기회에 다시 설득을 해 보자고. 오늘은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제임스, 먼저 호텔에 돌아가세요. 사업가인 제임스 보다는 같은 컴퓨터공학자인 우리들이 얘기를 해볼게요. 분명 통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래리와 세르게이는 황당해 하는 경환에게 윙크를 보이며 저 멀리 사라지려하는 에릭을 향해 뛰어나갔다. 경환은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두 사람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먼저 호텔로 돌아갔고 남은 세 사람의 대화는 밤늦도록 끊어지질 않았다.

    휴스턴은 11월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한낮의 태양은 뜨겁기만 했다. SHJ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주변의 움직임들도 빨라지고 있었다. SHJ가 플랜트 컨설팅에서 벗어나 무선통신에 이어 IT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은 SHJ타운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텍사스 주정부의 생각을 바꿔 SHJ가 텍사스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SHJ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SHJ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서의노골적인 러브콜을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의미가 강했다. 이렇듯 무선통신과 인터넷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SHJ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SHJ가 새로운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기존 사업인 플랜트에 대한 업무도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삼년 동안의 컨설팅 노하우를 바탕으로 단독입찰을 준비하고 있던 SHJ는 JSC의 인수 실패와 더불어 KBR이 가지고 있는 SHJ-화성플랜트의 지분 23%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경환이 눈을 돌린 한국의 아동과 대후는 앞으로 삼년이 더 흐른 뒤에나 인수가 가능했기에 내년도 단독입찰을 준비하던 SHJ의 계획은 큰 차질을 보이고 있었다.

    “리, 오래만이네. 선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준비는 잘 돼가고 있나?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를 하게.”

    “고맙네. 윌리엄. KBR이 할리버튼과 뗄 수 없는 관계란 걸 잘 알고 있는데 공공연하게 나를 지지한다니 눈물이 날 정도야.”

    딕 체니가 사장으로 있는 할리버튼은 석유시추회사로 극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KBR은 할리버튼의 자회사였기에 민주당 출신인 자신을 지지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가 의문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민주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자네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이해해 주게. 변화를 요구하는 휴스턴 시민들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선거 준비도 바쁠 텐데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

    KBR의 공식지원을 얻은 리가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찾은 이유가 윌리엄은 궁금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윌리엄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리를 바라보았다.

    “자네 SHJ의 제임스 리란 친구와는 어쩌다 관계가 틀어진 건가?”

    윌리엄은 리의 입에서 경환을 언급하자 급히 인상을 구겨졌다. SHJ가 휴스턴 아니 텍사스에서 가장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소식은 자신도 듣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리의 입에서 SHJ가 거론되었다면 KBR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SHJ와의 협력체제가 FPSO 이후 단절된 상태에서 SHJ를 거론한 이유를 알기 힘들었다.

    “더는 얘기를 꺼내지 말게. 우리와는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친구야.”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이는 윌리엄의 태도에 리는 미소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흑인인 자신이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유색인종의 지지를 얻어야 했지만, 아시아계와 라틴계의 표는 분산이 되어있어 리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 의회를 움직이고는 있지만, SHJ는 아직 자신의 제안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휴우. 내 솔직히 얘기하겠네. 롱포인트 지역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이번 선거는 초박빙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보니 내가 고민이 많네. SHJ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분산된 지지를 모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와서 자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걸세.”

    윌리엄도 SHJ타운 건설과 관련된 소문은 듣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로 옮길 수도 있다는 소식에 텍사스 주정부까지 SHJ를 설득하고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나도 소문은 듣고 있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자네와 상관이 있어서 찾아온 거네.”

    윌리엄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리를 바라보았다. 리에 대한 공식지지를 표명한 상태에서 리가 낙선하게 된다면 KBR과 자신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었다. 경환에 대한 생각에 짜증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리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무슨 관계가 있는지 말해 보게.”

    “SHJ를 롱포인트로 묶으려면 KBR이 가지고 있는 SHJ-화성플랜트의 지분 23%가 필요하네. 내가 알기론 거의 헐값에 23%를 사들였으니 몇 배 이익을 붙여 SHJ에 지분을 넘기게 된다면 자네도 좋은 거래가 될 거라고 보네만.”

    “그만하게. 난 그 지분을 절대 넘겨 줄 생각이 없어. 제임스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도 난 그 지분을 팔 생각이 없네.”

    윌리엄이 격한 반응을 보이자, 리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개인적인 악연을 들어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는 윌리엄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SHJ는 텍사스 주 정부의 만류에도 실리콘밸리와 샌디에이고 이주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야. 미안하지만, 자네를 찾아오기 전에 딕 체니와 의견을 교환했네. 자네의 뜻과는 다르게 KBR이 가지고 있는 지분은 SHJ를 휴스턴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도구로 쓰일 걸세.”

    경환은 리의 행동에 변화가 없자, 최석현을 통해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이고 시 정부와 긴밀한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휴스턴의 기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SHJ의 이주 가능성이 제기되자, 조급해진 리는 딕 체니와 정치적인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건 윌리엄을 쉽게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알고는 있는 건가? SHJ-화성플랜트는 그 가치만 따져도 10억 불이 넘어가는 기업이야. 아니 100억 불을 넘길 수도 있는 회사란 말 일세.”

    윌리엄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리의 싸늘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자신에게는 10억 불이든 100억 불이든 소용이 없었다. 단지 내년에 있을 시장선거에 승리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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