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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26화 (10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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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26

    동경사무소는 황태수의 등장에 직원들 전체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플랜트의 책임경영을 맡고 있는 황태수는 경환보다 상대하기 어려웠고, 특별한 일이 없는 동경사무소가 폐쇄될 수도 있는 유언비어는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직원들의 표정이 밝지 못한 것을 발견한 황태수는 마사토를 찾았다.

    “오카다 소장, 사무실 분위기가 왜 이러나? 본사에 보고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솔직히 말을 해 보게.”

    “저, 그게.......”

    마사토가 대답을 못한 채 눈치를 보자 황태수는 대답을 다그쳤다. 한참을 망설이던 마사토가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이번 북경사무소 폐쇄를 보면서 동경사무소도 폐쇄될 수 있다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 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부사장님께서 급히 동경에 오시다 보니.......”

    황태수는 어이가 없어 마사토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이 불을 끄지 않으면 바닥에 떨어진 직원들의 사기와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안 황태수는 급히 마사토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카다 소장, 직원들을 다 불러 모으도록 하게.”

    코이치가 동경사무소에서 손을 떼고 한국 일에 매진하자 유언비어를 부정하던 마사토도 서서히 찾아드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직원들이 한 곳에 모이자 황태수는 직원들 한 명 한 명과 눈빛을 교환했지만, 황태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직원들은 없었다.

    “어디서 이상한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동경사무소의 폐쇄는 없습니다. 그리고 국적을 떠나서 여러분들은 SHJ의 가족입니다. 가족을 버릴 사람은 SHJ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북경사무소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폐쇄를 결정한 거고, 북경사무소의 직원들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한국과 미국본사로 근무지 변경을 발령 낸 상태입니다. 그러니 헛소문에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여러분들의 뒤는 SHJ가 책임을 질 겁니다.”

    황태수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동요하던 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불안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플랜트 업무가 경환에게서 황태수로 넘어간 사실을 동경사무소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태수의 말을 의심하는 직원들은 없었다.

    “오카다 소장, 이후에 이런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리겠네. 오늘 일은 더 이상 묻지 않겠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다시는 이런 문제로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마사토는 고개를 90도 각도로 꺾었고, 황태수는 그동안 맘고생 했을 마사토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 .꺾여있는 마사토의 등을 잡아 세웠다. JSC를 살리기 위해 온 일본 출장에서 동경사무소 직원들부터 살리게 된 황태수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JSC와의 미팅은 차질이 없겠지?”

    “곧 도착할 시간입니다. 의아해 하고는 있지만, 미팅 제안을 거절하진 않더군요.”

    JSC를 노리던 SHJ는 케이스케의 노련함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수는 쓰린 속을 달래며 JSC의 기술만큼은 최대한 빼 먹을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케이스케의 눈을 가릴만한 대책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황태수의 고민이 깊어질 무렵 케이스케와 료스케가 동경사무소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타케우치 회장님. 좋은 소식이 들리더군요. 축하드립니다.”

    “반갑소이다. 황태수 부사장님. 모든 게 SHJ 덕분입니다. 허허허.”

    처음부터 상대의 아픈 곳을 찔러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황태수와 케이스케는 서로의 표정을 조용히 살피기만 할 뿐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참다못한 료스케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꺼냈다.

    “우리와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만나자고 했습니까? JSC의 인수를 획책하려던 계획이 틀어져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입니다. 황태수 부사장님.”

    료스케의 날선 질문에도 황태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황태수는 료스케의 질문을 무시한 채 케이스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 싸움은 자신과 케이스케 둘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스케는 료스케를 제지하지 않은 채 황태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하하, 회장님을 당해 낼 수가 없군요. 제가 졌습니다. 뭐, 사실 우리가 JSC 인수에 관심이 없었다고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포기를 하니 길이 보이더군요. JSC를 대신할 기업들은 전 세계에 널려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플랜트 시황이 좋지 못한 때라면, 오히려 SHJ에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기업들도 많고요.”

    케이스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황태수의 말대로 JSC를 대신할 기업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JSC는 결국 미쓰비시중공업 손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그게 좀 안타깝긴 합니다. 기술과 인력은 뿔뿔이 흩어지게 될 거고, 역사와 전통을 가진 JSC란 이름은 곧 사라지게 되겠네요.”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희롱을 하려고 사람을 부른 겁니까!”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황태수에게 도발하는 료스케를 이번에는 케이스케가 제지하고 나섰다. 황태수는 케이스케가 반응을 보이자 두 손을 겨드랑이에 끼며 등을 의자에 기댔다. 황태수의 면전에 지팡이를 날리고 싶었지만, 케이스케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금이 묶인 상태에서 해외 진출이 SHJ에 막힌다면 결국은 미쓰비시중공업에 먹힐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수 부사장님, 우리를 놀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무슨 제안을 하시려는 겁니까?”

    노련하게 대응하는 케이스케를 보며 황태수는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들으셨다면 제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거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제안을 할까 합니다. 금년도에 있을 사우디 정유플랜트를 우리와 KENTZ가 공동입찰을 하신다는 거 알고 계실 겁니다. 거기에 JSC를 참여 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흠.”

    케이스케의 눈썹이 움찔하며 황태수의 제안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SHJ의 합작은 JSC의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돌파구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넙죽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빨리 먹는 떡이 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케이스케를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한 의도를 모르겠군요. 제안의 뒷면에는 엄청난 조건이 숨겨져 있는 거 같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JSC가 일본에 살아남아 있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려서입니다. 병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적을 뭉치게 하지 말고 찢어 놓으라는. 아직까지는 무패의 행진을 보이고 있지만, 우리 SHJ도 강력한 적이 나타난다면 불패신화는 깨지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때를 대비하려는 차원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솔직한 황태수의 말에 케이스케는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많은 생각이 케이스케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지만, SHJ의 손을 잡을 수도 그렇다고 잡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유가 그것뿐이요? 다른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얘기를 마저 듣고 결정을 하겠소.”

    “JSC의 LNG 픝랜트 기술을 원합니다. 사우디 입찰을 성공하는 조건으로 기술이전을 해 준다면 기존 5%의 컨설팅 비용을 3%로 조정해 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 그건.......”

    케이스케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SHJ는 JSC의 기술을 이전받아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들어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지만, 이어지는 황태수의 말이 케이스케의 엉덩이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JSC는 함정에 빠져 있는 상황입니다. 양수겸장의 신세란 걸 회장님도 모르시지 않을 겁니다. 기술이전을 통해 SHJ의 손을 잡든지 그냥 가만히 앉아 미쓰비시에서 모든 걸 빼앗기든지 그건 회장님이 결정하십시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황태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케이스케의 선택은 그리 오래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태수가 케이스케와의 피 말리는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샌디에이고 다운타운에 위치한 정통 스테이크 전문점인 FLEMING'S에는 어윈과 리챠드가 장성공사 경영진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지루했던 회의는 서로 합의를 하지 못해 다음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고 내일이면 돌아갈 장성공사를 위해 조촐하게 저녁을 대접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합의를 이루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을 위해 건배를 제안합니다. 이곳 스테이크는 샌디에이고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미스터 판의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장성공사의 협상대표로 샌디에이고에 온 판밍저 총경리는 어윈의 제안에 와인 잔을 들어 건배를 나눴다. 이틀에 걸쳐 지루하게 합의를 시도했지만, 어윈과 리챠드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며 한국과 동일한 조건을 제시할 뿐이었다. 왕샹첸의 조언으로 이들 뒤에 경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빈손으로 중국으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무능으로 더 이상의 성공은 기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국은 소국입니다. 대국인 중국과는 시장 자체가 달라요. 두 분이 동의를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 중국은 CDMA 방식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경환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노발대발 했을 정도로 판밍저는 한국을 저평가하고 있었다. 어윈은 아직까지도 경환의 지시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SHJ-퀄컴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있었다.

    “미스터 판, 한국은 처음 우리에게 손을 내민 나라입니다. 시장규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을 배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조건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중국이 CDMA를 포기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어윈은 계속되는 회의에 짜증이 났는지 불쾌한 목소리로 판밍저의 요청을 다시금 거절하고 나섰다. 판밍저는 와인을 다시 한잔 가득 따른 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벌컥거리며 잔을 비워버렸다.

    “로열티를 4%로 조정을 해서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성의를 무시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조용히 스테이크를 썰던 리챠드가 나이프를 접시에 올려놓았다. 더 이상 판밍저의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참을 수 없었던 리챠드는 판밍저를 몰아 세웠다.

    “미스터 판, 중국의 시장 잠재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이 CDMA를 포기하는 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또한, 우리도 중국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중국을 대체할 시장으로 러시아와 동유럽과도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게만 말도 안 되는 특혜를 줄 생각이 없으니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왈가불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판밍저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리챠드의 말에 격하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SHJ의 사장이 한국인이라고 하더니 두 분도 소국 인을 사장으로 두어 힘드신가 봅니다. 우리 정부는 이번 합의가 결렬된 것을 심각하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술에 취한 듯 판밍저는 도를 넘어서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지껄이고 있었다. 인격모독을 당했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동시에 식사를 중단하고 판밍저를 쏘아 보았다.

    “오늘 문제는 정식으로 항의를 하겠소. 장성공사에서 우리가 납득할 만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중국과는 더 이상 협상은 없을 것이오. 중국은 기업을 국가가 통치하지만,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될 거요. 오늘 먹은 밥값은 우리가 지불할 테니 마저 다 먹고 돌아가시오.”

    자신의 실수를 일아 차린 판밍저는 급히 두 사람을 잡으려 했지만, 어윈과 리챠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떠나버렸다. 판밍저는 중국 측 협상단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자기 힘들지 않아? 정우 때는 입덧도 자주 하드만.”

    “그러게 말이에요. 둘째는 아주 착한 딸인가 봐요. 날 힘들게 하지 않는 걸 보면.”

    침대에 누워 팔베개를 해주는 경환의 품으로 수정이 다가오자 경환은 수정을 감싸 안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힘든 가정형편으로 생각이 깊었던 희수를 생각하며 경환은 수정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럴 거야. 아주 착한 딸이 태어날 거야. 예쁘게 키워보고 싶어. 남부럽지 않게.”

    반년만 지나면 그토록 기다렸던 희수를 만난다는 생각에 경환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을 항상 위로해 주고 자신의 곁을 지키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희수를 더 이상 고통 속에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희수생각에 울컥해진 경환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생이 끝나고 영혼이 마몬의 손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희수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자기 왜 그래요? 평소와는 좀 달라 보여요.”

    “아니야. 둘째가 자기 뱃속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래. 걱정하지 마.”

    수정을 침대에 다시 누였지만, 경환은 여전히 잠을 들 수가 없었다. 희수에게 전생과는 다른 미래를 주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SHJ의 이름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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