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다시 사는 인생 - 125
수정과 함께 병원을 다녀온 후로 경환의 입가엔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정우 때와는 달리 입덧도 없었기 때문에 경환은 임신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안했던 마음은 임신 4개월이라는 의사의 단 한마디에 눈 녹듯이 사라져갔다.
“사장님,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경환이 사무실에 돌아오자 하루나는 커피 한잔과 보고서류를 건네며 경환의 달라진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 사람이 둘째를 임신했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티가 났나 보네요. 자, 열심히 일해 보자고요. 황 부사장님은 동경에 도착을 했겠죠?”
경환이 산부인과를 예약해 달라는 지시에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경환의 입에서 나온 둘째라는 소리에 하루나의 표정은 잠시 굳어졌지만,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 경환의 질문에 답을 해 가기 시작했다.
“방금 동경사무소에 도착하셨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오후에 JSC와 미팅이 잡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제 사장님께서 퇴근을 하시고 알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경환은 헤어지기 전까지 답을 주지 않았던 알이 휴스턴에 도착했다는 하루나의 보고가 너무 반가웠다. 알의 합류로 자신이 맞춰가는 퍼즐 한 조각이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경환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나, 알이 도착하면 최석현 부장을 불러 주세요. 그리고 회의가 끝나면 쿡 부사장을 대기시켜 주시고요.”
지시를 마친 경환은 하루나가 건넨 커피를 음미하며 회귀 후 지금까지의 과정을 복기하고 있었다. 6년이란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별 어려움 없이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는 안도보다 희수가 태어날 올해부터 어떻게 미래를 주도할 것인가가 경환의 최대 관심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내년에 있을 한국의 외환위기는 자신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되겠지만, 고통 받을 한국 국민들은 경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경환의 고민이 계속되고 있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알과 미셸 그리고 또 한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하하하, 알. 반갑습니다. 제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아시기나 합니까? 미셸도 반가워요.”
알과 격하게 포옹을 나눈 경환은 세 사람을 자리에 앉힌 경환은 처음 보는 알의 동료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근육 잡힌 몸매와 날카로운 눈매는 그가 일반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사장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제 군대 동료로 훈련교관을 하던 카일 디푸어라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저와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카일 디푸어입니다. 알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SHJ에 필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군요.”
“하하하, 알이 믿는 친구라면 저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세 분과 한 식구가 될 수 있어 저에게도 큰 영광입니다.”
알을 카일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보였다. 알은 에릭과 결별한 후 군대 동료들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의도적으로 카일과는 거리를 두었다. 에릭을 의식한 것도 있었지만, 자신보다는 에릭에게 합류하는 것이 카일을 위해서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알의 생각과는 달리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카일은 에릭의 제안을 거절하고 스스로 알을 찾아왔다. 계산적이고 사업가 스타일의 에릭보다는 인간적인 냄새를 가지고 있는 알을 선택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잠시 만요. 하루나, 최 부장은 아직 인가요?”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경환의 재촉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최석현은 예전 군대에서나 느껴봤던 기운이 경환의 사무실에 흐르자 몸이 먼저 반응하며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있었다.
“소개하겠습니다. 최석현 부장이고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한국의 해병대 수색부대 출신입니다.”
“그리고 이쪽 세 사람은 제 홍콩 여행을 경호했던 분들로 NAVY SEAL 출신들입니다. 최 부장님과 같이 일을 해야 되니 안면을 익히세요.”
세 사람도 최석현의 기운을 느꼈는지 묘한 대치를 하고 있을 무렵, 경환의 소개로 네 사람은 알 수 없는 동료의식을 느끼며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한국군과의 훈련을 통해 한국 해병대 수색부대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던 세 사람은 최석현에게 엄지를 치켜 올려보였다.
“자, 최 부장님도 이쪽으로 앉으세요. 알, 지금 함께 하는 동료들이 몇이나 되죠?”
“아직 많지는 않습니다. 저희 셋을 포함해서 20명 정도가 같이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사장님은 저희를 어떻게 쓰시려고 계획을 하시고 계신가요?”
알의 대답을 들은 경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환이 생각하는 인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현재의 SHJ 규모를 봐서는 20명도 적지 않은 인원일 수 있었다. 알은 경환이 에릭과 같이 자신들을 일회용품처럼 쓰다 버리려고 한다면 아쉽지만, 경환에 대한 미련을 버릴 생각이었다. 네 사람의 눈이 경환에게 집중되자 경환은 심호흡을 한번 내쉰 뒤 알의 질문에 답변을 시작했다.
“세 분이 봐서 알겠지만, SHJ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 최 부장은 SHJ타운 건설의 총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SHJ 사업장이 해외에 퍼져있고 특히 정세가 불안한 중동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여러분들을 단순한 용병으로 활용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부터 제 계획을 들어 보신 후에 결정을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중동 얘기가 나오자 세 사람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고 있다는 걸 느낀 경환은 우선 세 사람을 안심시켰다. 최석현은 직원들을 식구처럼 생각하는 경환이 단순한 용병으로 써 먹기 위해 세 사람을 부르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며 어떤 말이 나올 지 궁금해 했다.
“제 뜻과는 다르게 회사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 지킬 게 많아지게 되더군요. 직원들의 안전을 지켜야 되고 회사의 자산을 지켜야 되고 더 나아가 회사의 기밀과 정보를 지켜야 됩니다. 저는 알이 그 일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최 부장과 SHJ 타운 건설을 함께 추진하시면서 경호와 경비, 정보유출 방지에 대해 준비를 해 주세요. 당분간은 보안팀장으로 추진하시고 법인설립을 같이 준비하시면 됩니다. SHJ 타운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인원을 확충하십시오. 훈련에 대한 지원은 알이 원하는 만큼 제공을 해 드리겠습니다.”
휴스턴에 오기 전 SHJ에 대한 뒷조사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 다른 미국기업들과 달리 직원에 대한 복지도 잘 되어있고, 쉽게 직원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알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신과 함께할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알은 확신을 가져야만 했다.
“저와 함께할 동료들에 대한 대우는 어떻게 됩니까? 기혼자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다들 휴스턴이 아닌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움직일만한 조건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단순한 경비 일을 원하지 않는 동료들도 있습니다.”
경환은 빠르게 답을 주기 시작했다. 군인 출신들에게 말을 돌려가며 설득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거라는 생각에 잡설을 최대한 없애려 노력했다.
“정직원이 될 것입니다. SHJ타운이 완공된다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이주가 가능하겠지만, 그 전까지는 훈련에 집중을 해야 될 것입니다. 단순한 경비일 외에 저희 해외사업장의 안전과 보안도 같이 맡게 될 것입니다. 인원의 배치는 보안팀장이 해야 될 임무이고요."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보유출을 방지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정보를 운영할 조직을 따로 만드시겠다는 건가요?”
“필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선 제가 생각하는 정보유출 방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분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은 알에게 무리이고 이 문제는 제가 따로 생각을 해 두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의 정보유출 방지에 대해 연구를 해 주세요. 그리고 보안 팀의 훈련 및 총기사용에 대한 문제는 최 부장이 해결을 해 줄 겁니다. 자, 이제 공은 알이 가지고 있습니다.”
퀄컴과 구글을 손에 넣은 경환은 해킹기술의 발달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경환이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연구 개발되는 시스템이 외부로 유출이 된다면 그 손해는 계산이 불가능 했기에 경환은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할 생각이었지만, 알이 이해를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 알은 카일과 미셸의 얼굴을 살폈고,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20명은 SHJ에 합류하겠습니다. 당분간 최 부장과 일을 하면서 훈련에 집중하겠습니다.”
알의 합류가 결정되자 경환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과 악수를 나누며
“최 부장님은 세 사람과 동료들의 거처를 준비해 주시고 시 정부와 협의해 훈련장소를 물색해 보세요.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보안 팀들의 모든 편의는 최 부장님이 신경을 써 주시고요.”
SHJ타운 조성과 관련해 텍사스의 휴스턴과 댈러스,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와 샌디에이고가 치열하게 유치전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SHJ가 있는 휴스턴과 퀄컴의 소재지인 샌디에이고의 유치전은 토지의 무상제공과 건설비용 보조 등의 당근책을 써가며 치열하게 물밑경쟁을 하고 있어 최석현을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총기에 대한 규제가 다른 주에 비해 관대한 텍사스 주고 유치전에서 선점을 잡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휴스턴 시 정부도 훈련캠프 및 총기 사용에 거절할 입장은 아니라고 경환은 생각했다. 최석현은 세부적인 내용을 협의하기 위해 세 사람과 자리를 뜨자 기다리던 린다가 경환을 찾았다.
“알도 결국은 제임스의 화술에 넘어 오게 되는군요.”
“린다, 저는 진실 된 사람입니다. 알이 제 진심을 알아 준 거지요.”
린다는 인재라고 판단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무슨 수를 쓰던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경환의 놀라운 화술에 감탄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인 알까지 SHJ에 합류되는 모습에 린다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제임스의 화술을 어떻게 당하겠어요. 급하게 부른 이유는 뭔가요?”
“같이 래리와 세르게이를 보러 갑시다. 한 동안 찾아가지를 못해서 궁금하기도 하고요. 개발이 어느 정도까지 되었는지 내 눈으로 확인을 하고 싶네요.”
다운타운 외곽에 위치한 3층 건물 앞으로 승용차 한 대가 주차하며 경환과 린다가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넓은 공간 안에는 십여 명의 젊은 직원들과 함께 분주하게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는 래리와 세르게이의 모습이 보였다. 사무실 벽에 농구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자 경환은 농구공을 집에 농구대를 향해 공을 던졌지만 공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임스 오셨어요? 전화라도 주시고 오시지.”
“개발하느라 바쁜 사람들한테 뭔 전화를 해?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렸어. 직원들 모습이 자유로워서 그런지 보기는 좋네, 활력도 넘치는 거 같고.”
래리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경환은 만류하며 래리를 향해 걸어갔다. 연구실을 이곳으로 정한 이유는 SHJ 본사가 있는 건물에 빈 공간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출 퇴근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하라는 경환의 의도가 숨어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연구실의 분위기는 회사라는 이미지 보다는 대학의 동아리를 보는 거 같은 자유로움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린다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을 본 경환은 조용히 린다에 귓속말을 전했다.
“린다, 일 하는 스타일이 다른 거니 이해를 해요. 이들은 정형화된 사고력이 아닌 창의력이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억압보다는 자유로움이 이들에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린다의 이해를 구한 경환은 린다의 등을 두드리며 래리가 만지던 컴퓨터를 바라봤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뿐이었다.
“이상한 말 할까봐 미리 말하겠는데, 난 언제쯤이면 우리가 만든 검색엔진을 볼 수 있을지가 궁금한 거뿐이야. 그리고 내가 지원해 줄 게 있으면 말을 하고.”
경환의 말뜻을 이해한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교환하고는 경환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래리가 나섰다.
“인원이 보강되어 진척이 빨리 되고 있습니다. 늦어도 겨울이 오기 전에는 시험 조작이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지원이 너무 잘돼서 탈이지만, 동료들과 연구를 하다보면 밤을 샐 때가 많다보니 잠시 짬을 내 쉴만한 공간이 없는 게 좀 문제긴 해요.”
“좀 만 참어. 늦어도 2년 내에는 SHJ타운으로 옮길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쉴 공간인데 건물주와 상의를 해서 공간을 마련해 볼 테니 힘들겠지만, 당분간은 고생을 좀 해 줘야겠어.”
연구인원과 장비의 지원이 있어서인지 검색엔진의 개발은 예상보다 빨라지고 있었다. 경환은 구글의 성공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노력 없이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기술개발이야 두 사람에게 맡겨도 충분하겠지만, 문제는 마케팅이었다.
“제임스, SHJ안에는 IT산업을 이해하며 경영할 전문경영인이 없다는 게 단점입니다. 리챠드가 적임자인긴 하지만, SHJ-퀄컴에서 뺄 수 없는 상황이고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제가 전문경영인을 한번 수배해 볼게요.”
“그게 좋겠네요. 전문경영인은 린다가 맡아 주세요. 래리와 세르게이는 너무 연구에만 매달리지 말고 건강에도 신경 써.”
래리와 세르게이는 경환이 자신들을 신경 써 주는 모습에 감동을 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두 사람과 생각이 달랐다. 오랫동안 부려 먹으려면 두 사람이 최대한 건강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