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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24화 (10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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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24

    96년 5월로 접어들면서 SHJ도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퀄컴은 소액주주의 지분을 모두 매입한 후 상장을 폐지하였고 래리와 세르게이는 페이지랭크를 장착할 검색엔진 개발이 한창이었다. 황태수가 이끄는 컨설팅은 경환의 별다른 조언이 없는 상태에서도 쿠웨이트 입찰을 성공시켜 퀄컴으로 대량의 자금이 빠져나가 긴축경영을 하고 있는 SHJ의 유동자금에 숨통을 열어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조직화되고 커져가는 SHJ와는 달리 한국의 경제엔 먹구름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과천 종합청사 경제부 회의실에는 야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강석주 장관을 비롯한 간부들 전원이 모여 경제 이상동향에 대한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회의 분위기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저유가 정책에 반발한 OPEC이 92년 5% 감산체제로 들어가면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던 유가는 95년 이란제재로 석유수출량의 급감과 96년 이라크 후세인이 고유가 정책을 천명하면서 수출거부 사태로 이어지자 저유가 시대의 종지부를 찍게 되고, 한국의경제는 침체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유가가 고개를 들고 우리의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의 가격폭락이 예상되기 때문에 금년도 경상수지 적자가 200억 불을 넘길 수도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문제는 기업들의 수출에 비상등이 켜져 있어 내년도 상황도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강석주는 터져 나오려는 두통을 잠재우기 위해 두통약을 빠르게 삼켰다. 반도체와 컴퓨터, 무선기기는 한국의 주력 수출항목으로 총 수출액의 21%를 담당하고 있었다. 93년 MS의 윈도우 95 출현과 동시에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4메가 DRAM에서 16메가 DRAM으로 빠르게 교체되기 시작했고 95년 한국의 경제는 8.9%의 성장률을 달성하며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만을 위시한 후발기업들의 공급과잉 사태가 발생하면서 60불대에 달하던 반도체 가격이 30불대로 폭락했고 4/4분기엔 10불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제보고서는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었고, 더욱 큰 문제는 반도체를 대체할 마땅한 수출상품이 없다는 것이 강석주의 두통을 자극하고 있었다.

    “재계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현재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오성전자를 위주로 64메가 DRAM을 넘어 128메가 DRAM을 개발 중에 있지만, 2년 후에나 직접적인 영향이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단지 고환율 정책과 단일 관세율 적용에 따른 재계의 불만이 상당합니다.

    강석주도 고환율 정책에 대한 문제를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박재윤 경제수석의 의견을 무시한 것이 후회되지만, 유가상승과 OECD 가입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아니었다. 또한 사치품과 원자재 모두 8%의 관세를 적용함으로서 고평가 되어있는 원화로 수출에 타격을 받고 있는 기업들은 원자재 수입에 따른 8%의 관세에 이중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단기 외채가 집중적으로 들어오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경상수지 적자 총액이 320억 불을 넘어가는 상황에서 외환보유고 330억 불을 위협하는 수준입니다. 올 연말이면 적자 총액이 370억 불에 달한다는 내부 보고가 있습니다. 숫자상으로 보자면 국가부도 위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대기업의 수익성 감소에 따른 자금난 악화를 단기외채로 풀어나가고 있었고, 주력 수출품목의 단가 하락과 고환율에 따른 수출 감소로 적자 총액이 외환보유고를 앞서 가는 국가 부도사태에 이미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강석주의 머릿속엔 OECD 가입을 통한 선진국 대열 진입이라는 보랏빛 환상에 빠져 있었다.

    “장관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박재윤 수석의 제안을 너무 무시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환율을 800원 후반대로 서서히 조정하고 단기외채를 줄여야 된다는 의견을 신중히 검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국민적 관심사가 OECD 가입으로 쏠려있는 지금 괜히 우리가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력 수출품의 세계경쟁력이 뒤처지지 않다고 봅니다. 우선은 수출에 활로를 뚫을 수 있는 방안을 재계와 협의를 해 보세요. 그리고 오늘 회의내용이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모두들 보안에 신경 쓰세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었던 이번 회의는 허무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실질소득이 2만 불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OECD 가입을 통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환상은, 부실하고 낙후된 한국의 금융여건을 생각하지도 않은 채 시장을 개방했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은 무분별한 단기외채를 통해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경환의 바람과는 달리 한국은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출근 후 꽃이 가득한 화병을 발견한 경환은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다나가 출산휴가로 빠진 자리를 하루나가 대행하면서 경환의 회사생활은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빠르게 비서업무를 숙지한 하루나는 커피를 건네주며 오늘 예정된 스케줄을 보고하고 있었다.

    “사장님, 제이콥스 사장님은 쿡 부사장님과 회의를 하시고 계십니다. 오후 2시 사모님 이름으로 병원은 예약을 해 놓은 상태이고요. 황태수 부사장님은 저녁 6시 비행기로 동경으로 출발하십니다. SHJ 타운과 관련해서 휴스턴 시 정부에서 면담을 요청해 오고 있습니다.”

    미국생활에 적응을 했는지 일본에서의 어두운 표정은 하루나의 얼굴에서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경환의 생활전반을 챙겨주는 하루나에게 경환은 익숙해져 갔다.

    “하루나의 커피는 언제나 좋네요. 커피 고마워요. 황부사장님은 따로 만나지 않아도 되니 무리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시고, 휴스턴 시 정부와는 최석현 부장이 만나도록 지시를 하세요. 오후 스케줄은 따로 잡지 마시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병원에서 바로 퇴근할 생각입니다.”

    하루나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린다와 어윈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제이콥스 사장님. 인상이 별로 평온치 않아 보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어제 저녁 급하게 도착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나 봅니다.”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어윈의 심정이 복잡하다는 것은 경환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한국의 상용화가 성공하고 서서히 안착을 해 나가자 퀄컴의 수익은 안정세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섣부른 판단으로 SHJ의 인수합병에 동의를 한 게 아니냐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어 어윈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SHJ-퀄컴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신경을 써 주신 덕에 CDMA 2000 1X의 개발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성전자에서 CDMA 칩을 생산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에릭슨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대책을 세워야 될 거 같습니다.”

    어윈은 속이 쓰렸지만,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SHJ의 인수에 동의를 하지 않았다면 퀄컴의 파산은 현실화 되어 이런 자리조차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성전자의 칩 생산은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경환은 판단하고 있었다. 아직은 오성전자의 해외시장 점유율은 일부 모니터를 포함한 가전제품에 국한 되어있었고 무선 단말기가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GSM의 대표주자인 에릭슨은 문제가 심각할 수도 있었다.

    “오성전자의 칩 생산에 라이선스 침해가 있는지 살펴보시고 혹시라도 침해를 당했다고 의심된다면 정식으로 특허소송을 제기하세요. 오성전자가 칩 생산을 강행하는 이유엔 한국정부나 ETRI가 있을 수 있으니 초반 대응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에릭슨인데, 아직은 우리의 영향력이 크지 않으니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책을 연구해 보기로 합시다.”

    오성그룹의 정보력과 추진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경환은 초반에 오성전자의 기를 꺾어 놓을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CDMA의 종주국으로 시스템과 단말기 생산에 우위를 접하고 있는 한국이라 해도, 원천기술을 SHJ-퀄컴 손아귀에 쥐고 있는 한 무턱대고 칩 생산을 강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환은 강공책을 통해 백기를 받아 낼 생각이었다.

    “제이콥스 사장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압니다. 저는 혼자 잘 먹고 잘 살 생각은 없습니다. 최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다독여 주시고, 기술개발과 라이선스 확보에 매진해 주세요. 회사가 성장 발전하게 된다면 직원들에게도 최대한 보상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윈은 자신의 생각이 들켰다는 것에 얼굴을 붉혔다. 상장도 폐지되고 모든 라이선스와 지분이 SHJ에 묶여 있는 지금 반전을 꾀할 수는 없었다. 어윈은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 했다.

    “감사합니다. 직원들의 복지에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장성공사에서는 기술지원과 함께 로열티 3.5%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협상이 쉽지 않게 흘러가는데, 중국시장의 파괴력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 선에서 합의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경환이 퀄컴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중국과의 협상은 중국의 뜻대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경환은 중국의 입맛대로 움직일 생각자체가 없었다.

    “한국과 동일한 조건으로 밀어붙이세요. 중국은 GSM의 독과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CDMA를 선택한 거지, 우리가 예뻐서 접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중국과의 협상은 서두르는 쪽이 지게 돼있습니다. 중국과의 협상은 속도를 조절하시면서 러시아와 미국에 집중을 한다면 중국은 우리의 제안에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CDMA가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하기 시작하는 건 한국의 PCS 사업이 시작되는 내년이 될 겁니다. 너무 조급하면 우리가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중국은 잠시 접고 러시아와 접촉을 시작하겠습니다.”

    어윈은 경환의 생각에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은 중국의 시장 잠재력만 봤을 뿐이지만, 경환은 중국의 속사정까지 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IT부서를 만들어 검색엔진을 개발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내년이면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 보이는데 저는 그때를 기점으로 SHJ-퀄컴과 합동 프로젝트를 수행할 생각입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SHJ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때까지 기술개발에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제이콥스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사, 사장님. 그럼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경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윈은 조인식이 끝난 후 경환이 자신에게 한 말을 기억해 냈다. 무선기기와 인터넷이 결합된다면 그 파장은 상상을 뛰어 넘을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꺼냈지만, 어윈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윈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져있을 때 린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사장님, 헤지펀드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미 단기자금을 빙자해서 한국에 무차별적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첫 타깃은 대만이 될 듯 보이는데, 최종 목표는 한국일 수도 있다는 연구소의 보고입니다.”

    자신이 막아보려 노력했지만, 한국은 역사의 수순에 따라 천천히 맞물려 들어가고 있었다. 국민들은 OECD 가입으로 선진국이 된다는 환상에 빠져있었지만, 해외자본은 외채상환능력에 의구심을 품으며 한국의 OECD 가입을 비웃고 있었다. 고비용 저효율에서 허덕이고 있는 한국경제는 OECD 가입이 독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아직도 한국정부는 성장률 7.5%, 물가 4.5%, 경상수지 적자 60억 불은 문제없다며 세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며 호언장담하고 있었지만, 이미 토끼는 멀리 도망가 버린 상태였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이젠 통제를 할 수 없을 지경이네요. 내년 상반기까지 우리의 자금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거 같습니까?”

    린다는 경환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준비된 자료를 경환에게 건네면 빠르게 답변을 시작했다. 경환의 지시에 의해 연구를 하긴 했지만, 현실화 될 지는 자신도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년 전부터 준비를 해 온 린다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플랜트 쪽의 사우디 입찰이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일부 가용자금을 제외하고 3억 불까지는 확보를 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의 보고로는 한국의 원화가 공격당하고 단기외채가 빠르게 빠져나가게 된다면 지금도 저평가된 주가는 바닥을 칠거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을 선정해 지분 확보에 주력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한국이 정상화 된다면 상당한 차익을 볼 수 있습니다.”

    경환은 린다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국의 IMF 사태가 눈에 보이는 상태에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관여를 할 생각이었다. SHJ의 이득을 위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경환은 무거운 결심을 했다.

    “준비하세요. 우선 저평가된 기업을 선정하시되 아동엔지니어링 대후엔지니어링의 지분을 최대한 확보를 하세요. 오성전자도 잊지 마시고요. 이번 투자는 쿡 부사장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내년 5월을 시작으로 준비하세요.”

    두 사람이 빠져나가자 경환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경환의 눈에는 금모으기를 하는 국민들과 넘쳐나는 노숙자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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