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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22화 (99/264)
  • #122

    다시 사는 인생 - 122

    “회장님, 충분하지는 않지만,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쓰비시은행에서 들어온 200억 엔은 JSC의 막혀있던 유동자금에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케이스케의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구조조정 안은 나온 게냐?”

    “네, 5백 명을 감축하고 서울 사무소를 포함해서 불필요한 해외지사와 국내 사업장 일부를 폐쇄하는 방향으로 안을 작성했습니다.”

    2천 5백 명의 직원 중에서 5백 명을 감축한다면 그 여파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JSC로써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케이스케는 지팡이에 양손을 걸친 채 눈을 감았다. SHJ라는 호랑이의 접근을 막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이란 여우가 JSC의 목줄을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다. JSC가 요청한 300억 엔에서 200억 엔만 대출을 승인한 이유도 JSC의 산소 호흡기를 완전히 벗기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걸 케이스케는 알고 있었다. 빠른 시간 내에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미쓰비시중공업에 JSC가 먹힐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직 난관을 풀었다고 보기 어렵다. 급한 사정 때문에 미쓰비시중공업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오히려 SHJ보다 조심해야 될 곳이 미쓰비시중공업이란 사실을 잊지 말거라.”

    혹시라도 JSC가 미쓰비시중공업의 작전에 말려들어 헤어나질 못한다면 보유한 기술과 특허를 제외하고 사업장과 회사는 공중분해 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것은 SHJ에 인수되는 거 보다 결코 좋은 상황이라고 볼 수 없었던 케이스케는 JSC의 명줄을 늘리기 위해 장고에 빠져들었다.

    “회장님, 저도 그 부분을 가장 신경 쓰고 있습니다. 요코하마 건을 미쓰비시중공업과 공동수주 하더라도 국내시장의 파이가 워낙 줄어든 탓에 단지 시간을 버는 정도밖에는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해외시장을 개척해야 되는데.......”

    료스케는 뒷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SHJ가 일본 밖으로 나오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면 JSC의 해외진출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HJ도 이 상황을 알고 있을 텐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게 맘에 걸리는구나. 다음 주 중으로 종신고용 포기를 포함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행 하도록 해라.”

    휴스턴이 이 문제로 급박하게 움직이고 경환이 중국에서 급히 미국으로 건너가고 있다는 걸 케이스케는 알 수가 없었다. JSC는 SHJ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처분만 기다려야 될 상황에서, 이번 미쓰비시은행의 신규대출은 SHJ와 미쓰비시중공업의 합작관계에 틈을 만들게 되었다.

    마이애미 비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버지니아 비치엔 많은 관광객들로 해변을 채우고 있었다. 버지니아 비치의 상징물인 포세이돈 동상을 마주보는 카페입구로 알이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알, 반가워. 그래 노랑이 경호하러 태국 간다고 하더니 잘 쉬다 온 거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의 질문에 알의 인상은 구겨졌다. 아무리 극우주의 보수파라고 하지만, 인종차별을 아무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신의 친구가 알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에릭, 말은 가려서 하라고. 세상이 변하고 있어. 넌 주둥이 때문에 큰 고초를 겪게 될 거다.”

    “충고 고마워. 시원한 맥주나 한잔 마셔.”

    에릭이 건네주는 맥주를 급하게 마신 알은 자리에 앉아 감자칩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자신이 먼저 제안을 한 사업이긴 했지만, 에릭과는 언제부터인지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정은 한 거지? MOYOCK에 부지도 확보해 놨어.”

    “아직은 결정 못 했다. 고민 할 게 있어서.”

    답을 미루는 알의 모습에 에릭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며 알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사업구상과 부지까지 확보한 상태에서 특수부대 출신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알의 합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였다.

    “이봐, 이 사업은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야. 우리 뒤에 딕이 있다고. 지금은 민주당 코흘리개가 백악관에 있어 활동범위가 제한되어 있지만, 딕이 백악관에 들어간다면 우린 날개를 다는 거라고. 뭘 망설이겠다는 거야!”

    에릭은 망설이는 알을 다그쳤지만, 알은 묵묵히 맥주병을 들어 포세이돈의 손에 들린 삼지창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과 같은 NAVY SEAL 출신인 에릭 프린스는 자신과 달리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해 석유시추회사인 헬리버튼의 딕 체니의 지원까지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었고, 작년 부친의 사망으로 회사를 13억 불에 매각해 막대한 자금까지 손에 쥔 상태였다. 특수요원 훈련기관으로 사업을 시작하지만, PMC 설립이 에릭의 최종 목표였다. 에릭은 공화당이 백악관의 주인으로 입성하고, 불안정한 중동의 화약고에 불이 당겨질 때를 노려 사업을 확장시킨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화약 냄새가 그리워 미치기 일보직전까지 갈 때도 많지만, 이 길이 나에게 옳은 길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해서 말이지. 정부의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맘에 안 들고.”

    PMC의 최대 고객은 펜타곤이나 정보기관일 수밖에 없었고, 군인들의 희생을 줄이는 수단으로 용병을 투입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환의 제안이 없었다면 오늘 이 만남은 알의 합류를 축하하는 자리였겠지만, 알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특수부대와 정보요원들의 훈련기관을 만들자는 알의 제안을 에릭은 PMC로 확대시켰고, 동료들을 사지로 내모는 일이 알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너나 나, 그리고 합류할 직원들도 모두 같은 처지야. 피가 튀기는 전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들이라고. 그건 너도 부정하지 못 할 거다. 용병은 정부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는 사업이고, 결정해, 알.”

    사업개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목만 빼고 알만 쳐다볼 수 없다고 판단한 에릭은 알의 결단을 재촉하고 나섰다. 알이 합류를 하지 않는다면 서둘러 대체 인원을 수배할 생각이었다. 맥주병을 비운 알의 시선이 에릭의 눈에 고정되었다.

    “미안하다. 난 빠져야겠다. 내 역할은 카일 디푸어를 합류시키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미셸도 같이 빠지게 될 거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자고.”

    알의 답변에 에릭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올려 잡을 생각이 없음을 보여줬다. 아쉽기는 하지만, 알의 말대로 카일을 대타로 내세우면 인원 확보는 어렵지 않을 거란 계산을 이미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알,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연락 주라고. 네 자리는 항상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에릭이 던져주는 명함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은 알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벗어났다. 승용차에 올라 해변도로를 달리던 알은 차창 밖으로 들어오는 바다냄새를 맡으며 에릭이 던져준 명함을 바람에 날려버렸다. 하늘로 한번 치솟아 오르던 명함은 이내 동력을 잃고 모래사장으로 추락했고 블랙워터라고 쓰여 있는 명함은 모래 깊숙이 박혀 버렸다.

    중국에서 급히 귀국한 경환은 회사로 직행할 수밖에 없었다. JSC나 미쓰비시중공업의 장난질에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닌, 책임감이 남다른 코이치가 이번일로 좌절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SHJ 사장실엔 간부들과 함께 잭의 모습도 보였다.

    “잭, SHJ 합류를 환영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대충 얘기는 들어서 압니다. 중요한 일부터 처리를 하셔야죠. 신경 쓰지 마십시오.”

    황태수가 건네주는 동경사무소의 정보보고서를 빠르게 읽어 내린 경환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200억 엔의 긴급자금 대출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 정유플랜트 확장공사에도 JSC와 미쓰비시중공업이 공동수주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두 회사의 밀월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사실로 증명되었고, JSC를 인수한다는 경환의 목표는 멀어져갔다.

    “사장님, 제 책임입니다. 제가 거기까지 예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의기소침한 코이치를 경환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못하는 코이치의 성격이 여실히 들어나고 있었다.

    “당연히 책임을 지셔야죠. 타케우치 부장님.”

    “사, 사장님. 이번 일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책임을 물을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

    책임을 지라는 경환의 대답에 황급히 황태수가 나서 만류를 했지만, 코이치는 경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주머니에서 사직서를 꺼내 경환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경환은 기가 막힌 표정을 보이며 코이치가 내려놓은 사직서를 집어 들어 만지작거렸지만, 봉투 안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난감해하는 표정을 바라본 경환은 사직서가 들어있는 봉투를 찢어버려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타케우치 부장님, 전 제 식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쉽게 SHJ의 울타리에서 제가 벗어나게 할 거 같습니까? 저는 JSC는 포기할 수 있어도 부장님은 포기 못합니다. 다들 들으세요. JSC는 이 순간부터 포기하고 잊어버리겠습니다. 시기가 조금 늦어진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곧 JSC를 대신할 대타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책임을 지라고 말한 것은 그 대타를 구하는 작업을 타케우치 부장님이 맡으라는 것입니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일본의 정서를 감안할 때 JSC의 인수가 쉽지는 않을 거란 생각을 경환은 하고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일본의 반응은 역시나 빨랐다. 경환의 결심에 황태수는 안심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자신의 성급한 행동이 부끄러워 고개를 여전히 들지 못하는 코이치를 바라보았다.

    “사장님, 성급한 행동을 보여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타케우치 부장님은 너무 강해서 탈입니다. 저기 최석현 부장님처럼 좀 유연해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이 친구라면서 성격은 완전히 반대니.”

    경환을 향해 머리를 깊게 숙이는 코이치의 등을 경환은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코이치의 뒤에 서있던 최석현은 왜 자기를 거론하나며 억울한 표정으로 경환을 바라봤지만, 경환은 최석현의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사장님, 우리 의도를 사전에 들킨 게 아쉽기는 하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JSC를 먹겠다는 의도가 보이는데, 만약 JSC의 집적된 노하우가 미쓰비시중공업에 들어가게 된다면 차후 우리의 강력한 적수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황 부사장님 의견에 동감을 하지만, 마땅히 미쓰비시중공업을 손 볼 대안이 없다는 게 골치가 아프네요. 일본시장에 우리가 들어갈 입장도 아니고.”

    경환 또한, 미쓰비시중공업의 이중적인 행태에 맞대응을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해외입찰에 미쓰비시중공업과 경쟁을 하는 거 외에는 딱히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장님, JSC를 살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대로 놔두면 미쓰비시중공업에 떨어지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봅니다.JSC 회장님이라면 충분히 그 문제까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요. JSC를 살려 놓는 게 우리에게도 유리하다고 판단합니다.”

    “타케우치 부장님의 말이 맞긴 하지만, 그냥 살려 주자니 영 자존심이 상해서 그럽니다.”

    코이치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두 회사를 뭉치게 하는 거 보다는 찢어 놓는 게 SHJ에게도 유리하다는 건 경환도 모르지 않았지만, 다 잡은 물고기를 그냥 놔 줘야 된다는 게 경환의 속을 쓰리게 하고 있었다. 코이치의 제안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이 계속되자 잭이 끼어들었다.

    “사장님, JSC를 살리는 게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그냥 살려줄 수도 없을 테니, 사장님께서 KBR을 이용할 때와 같은 방법을 쓰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KBR을 이용한 방법이라니요?”

    잭은 경환을 바라보며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경환의 질문에 대답을 해 가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 컨설팅을 이용해서 KBR의 특수플랜트 기술을 SHJ-화성플랜트에 이전하도록 옵션을 걸지 않았습니까? 제가 알기론 JSC는 LNG와 정유플랜트에 특화된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JSC의 해외시장 진출을 열어 주면서 그 기술을 SHJ가 전수 받는다면 이번 싸움은 무승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잭의 제안에 경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JSC의 기술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쓰린 속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거 같았다.

    “잭의 제안이 지금 우리에겐 가장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JSC는 황태수 부사장님이 나서서 접촉을 해 보시고, 타케우치 부장님은 한국의 대후엔지니어링과 아동엔지니어링을 관심 있게 지켜보십시오. 지금은 아니지만, 곧 기회가 올 겁니다. 그리고 미쓰비시중공업과는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합작은 없습니다. JSC를 막았듯이 총력을 다해 미쓰비시중공업과 경쟁구도를 유지하세요.”

    경환의 지시에 따라 직원들이 빠져나가자 린다가 조용히 다가왔다.

    “제임스, 잭과는 나중에 얘기를 나누고 지금 만나 볼 사람이 있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던 두 사람이 도착해 있어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던 래리와 세르게이의 도착소식을 전달받은 경환은 린다를 앞세워 회의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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