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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21화 (9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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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21

    “4천만 원이면 5백만 불인데, 아깝기야 하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중국이 법이나 계약을 휴지조각처럼 생각한다면 방법이 있겠습니까? 던져주고 손 터는 수밖에 없죠. 아! 홍콩에서 자금을 끌어와야 되는데 좀 보태주시던가요.”

    경환의 도발에 장성궈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신의 비자금에 손을 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뭐가 말을 꺼내려다 왕샹첸의 제지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차분한 왕샹첸의 표정으로 봐서는 북경사무소가 도청이 되고 있다고 확신한 경환은 왕샹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오향장육을 집어 입에 넣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한다더니 배포가 커졌군 그래. 자네가 오해를 할까봐 말을 해 주겠는데 이번 SHJ 북경사무소를 조사한건 주룽지 인민은행장의 입김이 작용했네. 자네가 버티고 서류를 넘겨주지 않은 건 고맙게 생각하겠네.”

    경환은 슬며시 미소를 보였다. 이번 일은 적어도 왕샹첸의 동의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혹시라도 차기집권을 노리는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이 자신의 목줄을 죄기위해 벌인 일이라고 했다면 믿을 수 있었겠지만, 주룽지는 현 주석과 같은 상해방 출신이었다. 왕샹첸의 토대가 상해방인 점을 감안할 때, 아무리 주룽지가 부정부패 척결을 내 건다 하더라도 자기 집 식구의 곡간을 털 정도의 힘은 아직 가지고 있지 못했다. 비자금의 일부가 상해방의 윗선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경환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형님께서 말을 돌리신다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참! 정보하나 드리겠습니다. 홍콩에서 미국으로 일부 돈이 빠지고 있는 걸 집요하게 추적하는 조직이 있다고 하더군요. 형님과 반대파벌이 아닐까 생각도 되는데 좀 걱정이 돼서요.”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경환의 예상대로 장성궈가 놀라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성궈는 미국에 있는 고위층의 가족들과 내연녀의 뒤를 봐주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SHJ를 통해 송금하고 있었다. 경환은 상해방과 공청단의 힘겨루기를 이용해 미끼를 던졌고 장성궈와 왕샹첸은 보기 좋게 낚이고 말았다.

    “뭐, 그동안은 잘 막고 있긴 했지만, 북경에서 일이 터지니 저도 거기까지는 신경이 써지질 않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대대적인 사정작업은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중국의 정치는 머리는 놔두고 사족을 쳐 냄으로써 머리가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차기집권을 노리는 공청단의 입장에서는 상해방의 비자금을 담당하고 있는 두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국의 파벌문제까지 경환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왕샹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부를 통해 경환의 생각을 안다고 생각한 왕샹첸은 타협점을 모색하기 위해 급히 말을 꺼냈다.

    “내가 생각해도 이번 세무조사는 무리였다고 보네. 내가 나서서 이번 일을 최대한 수습해 볼 테니, 자네도 내 입장을 생각해서 선물을 하나 줬으면 하네.”

    “말씀 하십시오, 형님. 세이경청 하겠습니다.”

    자신이 벌인 일을 자신이 수습하겠다는 말로 빠져나가는 왕샹첸에 경환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최대한 무표정한 모습으로 왕샹첸을 주목했다. 왕샹첸이 달라는 선물은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환은 허튼소리라도 한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다.

    “첫 번째는 중국산 파이프를 중동에 수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는 것이야. 들어줄 수 있겠나?”

    저급한 중국산 파이프를 수입해서 현장에 뿌렸다가는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올린 SHJ의 명성은 한순간에 곤두박질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SHJ를 말아먹으려 작정하지 않고서는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중국산 파이프의 품질은 국제규격에 맞지 않습니다. 보아하니 두 번째 조건을 얻기 위해 버릴 카드를 먼저 쓰신 거 같은데, 형님, 저와 줄다리기를 계속 하실 생각이십니까?”

    왕샹첸의 노련함 못지않게 경환도 50년 동안 갈고닦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것은 협상의 기본이라는 것을 경환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왕샹첸은 태연하게 경환의 질문에 대응을 하고 나섰다.

    “아직 품질이 문제이긴 하겠지. 이건 다음기회에 다시 논의를 해 보기로 하세. 이번에 자네가 퀄컴이란 회사를 인수했더군.”

    “그게 두 번째 조건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제가 형님의 허락을 받고 회사를 인수해야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세무조사란 극약처방이 먹히지 않는 이상 칼자루는 경환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미 왕샹첸과의 관계를 끊기로 마음먹은 이상 예전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할 생각이 없었던 경환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왕샹첸의 말을 급히 끊었다.

    “세무국 일로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두 번째 제안은 자네에게도 나쁜 게 아니니 진정하고 말부터 듣게. 한국의 CDMA 상용화가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것을 보고 우리도 관심을 갖게 되었네. 아직 확정은 되지 않았지만, 장성공사(CGWIC)를 통해 북경과 상해, 서안, 광서 4개 지역에 시험 운용을 해 볼 생각을 가지고 추진 중이야. 자네가 장성공사와 퀄컴을 연결시켜 주겠나? 중국은 한국시장보다 크니 한국보단 좋은 조건이었으면 하네.”

    장성공사는 경환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CHINA UNICOM을 통해 CDMA가 도입된다고 알고 있었던 경환은 들어보지도 못한 장성공사란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경환의 입장에서도 중국의 CDMA시장을 놓칠 수는 없었다. 퀄컴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퀄컴은 한국보다 좋은 조건으로 중국과 계약을 맺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말은 해 놓겠습니다. 장성공사에 퀄컴과 접촉을 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한국보다 좋은 조건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한국은 개발 초기부터 개입을 한 나라입니다. 개발이 다 된 걸 그냥 받겠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퀄컴의 기술과 칩은 한국과 동일한 조건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시장 규모가 다르지 않나? 한국시장을 가지고 중국시장을 비교해선 안 될 거야.”

    “시장규모가 다르다고 고생한 식구의 뒤통수를 칠 수는 없지요.”

    경환은 이 부분에서만큼은 양보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국은 한국의 CDMA 상용화 성공을 쌍수로 환영했다. 중국의 무선통신이 GSM의 독과점에 장악되어 큰소리 한번 못치고 끌려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CDMA를 GSM의 횡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만들려고 했다. 퀄컴이 찾아가지 않더라도 중국이 알아서 찾아와야 될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환은 일보의 양보도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왕샹첸은 세무조사로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경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

    “그건, 두 회사의 협상을 지켜봐 가면서 결정하자고.”

    급히 빠지는 왕샹첸을 바라보며 경환은 생각에 잠겼다. 중국의 CDMA 시장은 5백억 불 이상으로 세계 최대시장이었다. 물론 시스템과 단말기, 부품을 모두 합친 것이지만, 어느 하나 무시하지 못할 규모였다. 또한, 오성전자가 CDMA 장비공급자로 선정되어 CHINA UNICOM에 1차분만 2억 불에 해당하는 장비를 공급한 걸 알고 있었다. 오성건설 시절 그룹사의 대대적인 홍보로 인해 기억하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 경환은 그동안 왕샹첸과오성전자에 당한 것을 단번에 복수할 기회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로열티와 칩 공급은 한국과 동일한 조건으로 진행된다는 생각엔 변함없습니다. 그러나 기술개발에 퀄컴의 지원을 줄 수는 있습니다. 단, CDMA 장비공급 권한을 SHJ가 지정한 업체에게 준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다면요. 형님께서 중간에 다리를 잘 놓아 보십시오.”

    “검토를 하라고 지시를 내리겠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남았는데, 그건 내가 할 얘기가 아닌 거 같군.”

    술만 마시며 경환과 왕샹첸의 언쟁을 듣고 있던 장성궈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전에 자신이 알던 경환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고, 쉽게 풀어가려던 이번 계획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될지 몰라 헤매고 있던 장성궈는 말부터 더듬거리고 있었다.

    “샤오 리. 그, 그게 말이지.”

    “형님,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 뒤에 미행까지 붙었는데, 제가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경환이 미행까지 언급을 하자, 난감한 표정을 짓던 장성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홍콩의 자금을 정리해야겠어. 그리고 유연탄사업도 정상적인 거래로 돌려야겠고.”

    그렇지 않아도 북경사무소를 무리 없이 철수하기 위해 말을 꺼낼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경환은, 장성궈가 먼저 비자금을 정리하자는 말을 꺼내자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아쉽기는 하지만, 형님의 의견이 정 그러시다면 뜻에 따를 수밖에요. 유연탄 수출업무에서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우리도 다음 정권을 염두에 둬야 돼서 말이야.”

    잡은 권력이 평생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이치였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미리 비자금을 정리하려는 장성궈가 현명할 수도 있었다. 경환은 자신과의 연을 끊기 위해 비자금을 정리하든 다음 정권의 사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리 작업을 하는 것이든 상관이 없었다. 이미 중국에 대한 미련은 접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북경을 정리할 명분을 얻은 것으로 경환은 만족하고 있었다.

    “세무조사는 형님들이 처리하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장성공사는 빠른 시간 내에 미국으로 보내십시오.”

    “자, 자. 어려운 일들도 다 풀렸으니, 다들 혁대 풀고 먹는데 집중을 해 보자고.”

    경환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백주의 취기가 급히 오르고 있었지만, 장성궈가 청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SHJ의 기반을 닦기 위해 두 사람과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면서도 항상 뒤통수가 근질거릴 수밖에 없었던 경환은, 앞으로 두 사람과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별장을 나선 경환을 김창동과 알이 뛰어와 부축을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호텔로 가시겠습니까?”

    “네, 좀 힘드네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세무조사 문제는 왕샹첸이 해결을 할 겁니다. 유연탄사업은 정리하기로 했으니 사무소 철수를 시작하십시오.”

    김창동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긴 숨을 크게 내쉬며 핸들을 바로 잡았고, 경환은 오르는 취기에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경환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떠 주위를 살폈지만, 승용차는 아직도 북경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장님,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본사의 황태수 부사장입니다. 받아 보시죠.”

    휴스턴이 새벽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황태수가 전화를 했다면 급한 일이라고 판단한 경환은 서둘러 김창동이 건네주는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황 부사장님, 접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자세한 내용은 북경사무소에 팩스로 넣었습니다. 간단히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미쓰비시은행에서 JSC에 200억 엔의 융자를 승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경사무소의 보고로는 미쓰비시중공업과 JSC가 밀착되고 있다는 정보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고 합니다.’

    황태수와의 통화를 끝낸 경환은 차를 북경사무소로 돌렸다.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온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생각에 경환은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호사다마란 말이 맞는지는 몰라도 퀄컴을 인수하고 나서 북경과 동경 두 곳에서 동시에 악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경환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예전과 달리 SHJ의 구조와 기반이 탄탄해지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경사무소에 도착한 경환은 마사토와 코이치가 작성해 보내온 팩스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SHJ가 움직일 수 없는 기막힌 타이밍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이번 융자로 금방이라도 끊길 거 같은 JSC의 질긴 숨통이 연장되었다는 사실에 경환은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경환은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자기한테 미안한데, 내가 바로 휴스턴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수정은 불안한 듯 경환에게 되물었지만, 경환은 수정을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별일 아니야. 내가 가서 해결할 일이 생겨서 그래. 자기는 며칠 쉬다가 오도록 하고, 하루나와 미셸은 먼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그렇게 할게요. 잘 해결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정우하고 며칠 후에 돌아갈 테니 휴스턴에서 봐요.’

    전화를 끊은 경환은 자신을 두 번씩이나 골탕 먹인 미쓰비시중공업이 괘씸했다. 그러나 지금은 응분의 대가를 받아낼 수 없던 경환은 이만 박박 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뒤끝이 얼마나 지독한지 반드시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경환은 알과 함께 북경사무소를 나와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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