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다시 사는 인생 - 120
“래리! 뭐하는데 사람이 불러도 대꾸가 없어?”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래리는 세르게이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환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어 래리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일이 통 손에 안 잡혀서 그런다. 너는 어떡할 건지 결정은 한 거야?”
“난 공학자지 경영에는 관심 없어. 어차피 백럽은 네가 만든 거고 내가 참여를 한 거니 난 네 의견에 무조건 따를 생각이야.”
세르게이는 테니스공을 바닥에 튕기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를 했지만, 세르게이의 마음도 래리와 다르지 않았다. 학교에선 천재소리를 듣고 있어 박사과정을 마치면 별 문제없이 교단에 설 수 있었지만, 세르게이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래리, 우리가 빌 게이츠나 제리 양처럼 이 바닥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고 봐. 그런데 제임스 리의 말도 틀린 게 없거든. 우리가 백럽을 완성한다 해도 수익을 창출하기엔 뭔가 부족한 게 사실이잖아. 어렵다, 어려워.”
세르게이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래리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어 답답했다.
“세르게이, 솔직히 자금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는 있다고 봐. 싫든 좋든 우리는 유태계의 피가 흐르니까. 난 자금보다도 제임스 리가 말한, MS도 생각하지 못하는 OS를 같이 개발하자는 얘기가 마음에 걸려서 그래.”
래리와 세르게이는 모두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유태계 조직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었다. 이제는 백럽의 연구보다는 경환이 제안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관심사였다. 퍼스널 컴퓨터의 OS는 자본과 기술, 마케팅으로 무장한 MS의 독주를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경환의 그 제안만 없었다면 래리는 SHJ에 합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나 세르게이는 누구의 통제에 따라 움직일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래리, 네 말이 곧 내 생각이다. 나도 제임스 리 그 인간이 도대체 무슨 미래를 보는지 무척 궁금하거든. 순수한 컴퓨터공학자의 신분에서 말이야.”
세르게이는 정신 사납게 테니스공을 여전히 바닥에 튕기고 있었지만, 래리는 공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깍지 낀 두 손으로 머리 뒤를 받치고 있을 때, 세르게이의 손에서 테니스공이 빠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래리! 혹시 말이야. 제임스 리가 말한 OS가 퀄컴과 관계있지 않을까? 남들이 쳐다보지도 않은 퀄컴을 SHJ가 유독 눈독을 들였다는 게 솔직히 납득이 안 갔잖아. 무선통신기술과 연관된 뭔가를 생각하는 거 같은데......, 래리! 우리 휴스턴 가자. 나 말이야, 제임스 리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두 사람은 학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휴스턴으로 간다면 스탠퍼드에 투자한 시간과 열정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어차피 학교에 남아있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난 상관없어.”
세르게이의 결심을 확인한 래리는 점퍼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세르게이에게 던져 주었다. 빳빳한 종이를 확인한 세르게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래리의 목을 감아 조르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정도껏 가지고 놀아야지.”
환하게 웃는 세르게이의 손에는 휴스턴 행 비행기 티켓이 들려있었다.
경환이 여행을 떠난 후 SHJ는 황태수와 린다의 협의체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경환을 대리한 최종결정은 황태수가 맡고 있었다. 물론 경환의 지시가 있었긴 하지만, 린다도 자신보다 먼저 SHJ에 합류한 황태수를 인정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사장실에선 코이치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JSC의 료스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아사히가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부사장님도 아시리라 봅니다.”
황태수는 동경사무소장인 마사토가 찍어 보낸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아사히와 료스케가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중간에 있는 사람은 누군지 아나?”
“하시모토 내각의 후생성 장관인 간 나오토입니다. 분위기를 봐서는 간 장관이 다리역할을 한 거 같아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모두 제 불찰입니다.”
JSC의 인수 전략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실행까지 담당한 코이치는 황태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JSC의 인수가 어렵게 된다면 단독입찰의 기회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황태수는 코이치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봐, 타케우치 부장. 자네는 내 부하야. 책임을 져도 내가 지는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나저나 우리가 숨 쉴 구멍도 열어주지 않고 너무 몰아세운 거 같아. 흠.”
혹시라도 코이치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재차 주의를 준 황태수는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JSC의 인수를 위해 많은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알제리 입찰을 성공으로 이끌었는데, 미쓰비시중공업에게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다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사진만 가지고는 미쓰비시중공업이 JSC와 손을 잡았다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 놓고 물어 볼 수도 없으니, 우리 상황이 좀 난처해진 건 부정할 수 없겠어.”
“사장님께 보고를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시기가 안 좋아. 북경에 복잡한 일이 생긴 건 자네도 알잖아. 괜히 사장님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뿐이야. 우선 동경사무소에 특이사항이 발생을 하는지 파악을 하라고 지시하고 미쓰비시중공업의 움직임을 관심 있게 지켜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코이치는 풀이 죽은 모습을 한 채 부사장실을 떠났다. 황태수는 자존심 세고 책임감이 강한 코이치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지금은 어떤 말로도 코이치를 위로해 주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태수는 코이치의 기운 없는 뒷모습을 보며 잘 헤쳐 나가기를 바랄뿐이었다.
알을 선두에 두고 경환이 북경공항의 입국장을 급히 빠져나간 후, 북경사무소에서 준비한 차량에 올랐다. 아침시간이라 그런지, 출근을 하는 자전거 행렬이 도로를 점령한 채 줄지어 달리고 있었지만, 경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왕샹첸과의 담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일이 자신을 길들이기 위한 혹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 상대하기 쉬웠지만, 혹시라도 다른 파벌이 개입을 한 것이라면 상황은 복잡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정치색을 달리하는 파벌 간의 암투는 치열했기 때문에 북경사무소로 향하는 경환의 고민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사장님, 뒤에서 차량이 따라 붙은 거 같습니다.”
알은 긴장하며 백미러를 연신 힐끔거리고 있었다. 경호원의 무기소지를 허락하지 않는 중국이다 보니 경환을 경호할 수단이 전혀 없었던 알은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중국에선 흔한 일입니다. 중국에 있을 때부터 경험했던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경환의 말에도 알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경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중국의 정보기관까지 나섰다면, 단순한 기업의 대표를 넘어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경환과 알이 각자의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승용차는 북경사무소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빠르게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사장님, 북경까지 오시게 해서 면목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다 제가 벌려 놓은 일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북경사무소가 아닐 겁니다. 공상국과 세무국에선 후속조치가 나왔습니까?”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저희가 자료를 내 놓지 않으면, 5백만 불 규모의 과징금을 추징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은근히 흘리고 있다고 합니다.”
경환은 왼손으로 입 주위를 쓰다듬으며 등을 소파에 깊게 파묻었다. 5백만 불의 과징금을 왕샹첸의 면상에 던져버리고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피 같은 돈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5백만 불의 추징금을 받게 된다면, 장성궈의 홍콩 비자금을 동결시켜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건 최후의 수단, 최악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우선은 왕샹첸과의 담판을 지켜보고 활용할 생각이었다. 경환은 오른손 검지를 입에 대고 펜을 들어 종이에 급히 ‘도청’이란 글씨를 휘갈겨 김창동에게 보여준 후 입을 열었다.
“추징금을 내라면 내야지요.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는 나라에서 더 이상 사업할 생각 없습니다. 부장님은 사무소 폐쇄절차를 밟으세요. 본사에선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한국, 일본의 주요일간지에 기사화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진출하려는 많은 기업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 저는 더 이상 중국이란 나라에 미련을 갖지 않겠습니다.”
김창동은 경환의 뜻을 파악하고 맞장구를 쳤다.
“세무국의 추징금이 통고된다면 빠르게 납부하고, 사장님 말씀대로 사무소 폐쇄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정리하는 게 오히려 우리에게 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하세요. 약속시간이 다 되가는 거 같은데 출발합시다.”
김창동이 운전하는 차는 무티엔위장성 쪽으로 방향으로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팔달령의 만리장성이 웅장하다면 무티엔위에서 바라보는 만리장성은 아기자기한 맛이 일품이었지만, 경환의 눈엔 주위의 풍경이 들어오지 않았다. 만리장성 바로 밑에 위치한 개인별장에 도착한 경환은 입구에 나와 있는 장성궈를 보자 차에게 내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일이 바쁘다 보니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어서 오게. 샹첸은 이미 도착해 있네. 일 년에 한 번도 밥한 끼 같이 못 먹으니 앞으로 자주 좀 보자고.”
알과 김창동을 밖에 대기시킨 경환은 자신의 등을 두들기는 장성궈와 함께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부부장으로 승진을 해서인지 때깔이 좋아진 왕샹첸이 두 팔을 벌려 경환을 감싸 안았다. 알제리 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틀어져 있었지만, 서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하하하. 샤오 리, 오랜만이네. 양복이 잘 어울리는 걸 보니 자네도 사업가가 다 됐어.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중국파이프 수출을 막아서 내가 지금 아주 곤란해.”
“형님도 승진하시더니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수출을 막습니까? 중국에서 생산된 파이프가 중국 원전공사에 사용할 수 있다면, 자연히 수출 길도 열리지 않겠습니까?”
알제리 입찰로 충돌한 두 사람 때문에 중국에서 생산된 파이프는 아직도 중동지역에 수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SHJ의 입김은 막강해졌고, 경환은 중국산 파이프의 수출 길을 열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서로의 등에 비수를 꽂는 두 사람의 날선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장성궈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 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얘기를 나누세. 여기 경치가 술 한 잔 하기 그만이야.”
장성궈는 두 사람의 등을 떠밀며 화려한 요리가 차려진 식탁에 앉히고는 50도가 넘는 백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겉으로 웃고 있는 경환과 왕샹첸의 머리는 상대의 수를 읽기 위해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삼배주로 시작해야지.”
탁자 위에 놓인 세 개의 작은 잔을 연거푸 들이킨 장성궈를 따라 경환과 왕샹첸도 잔을 들었다. 술잔에 술이 채워지고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세 사람은 신변잡기에 대한 얘기만 나눌 뿐 어느 누구도 이번 만남의 목적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북경사무소를 도청하고 있었다면,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에 먼저 말을 꺼내 죽고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참다못한 장성궈가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냈다.
“샤오 리, 요새 복잡한 일이 생겼다고 들리던데, 내가 힘을 좀 써 볼까?”
경환은 독주를 입에 부어넣고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형님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세무국에서 유연탄계약서와 홍콩법인의 재무제표와 통장사본까지 요청을 했다더군요. 그건 걱정들 마십시오.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건 지키는 성격입니다.”
경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자, 왕샹첸과 장성궈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세무국에 아는 사람이 있어 물어봤더니, 추징금이 4천만 원이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이 들리더군.”
기다리기 지쳤는지 술만 마시고 있던 왕샹첸이 말을 꺼냈다. 경환은 젓가락을 접시에 내려놓은 후 왕샹첸을 노려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였다.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끌고왔던 두 사람과의 관계를 이쯤해서 정리할 생각에 긴장감 보다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경환은 술을 한잔 더 입에 털어 놓고는, 지루한 탐색전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