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9화 (96/264)

#119

다시 사는 인생 - 119

3월로 접어든 북경은 매서웠던 칼추위가 한풀 꺾어 긴 했지만, 아직도 서늘한 바람의 기세는 여전히 행인들을 움츠리게 하고 있었다. 서서히 북경사무소를 정리하고 있는 김창동은 직원들의 거취를 확인하기 위해 일대일 면담을 오전부터 진행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제일그룹과의 협상이 완료되지 않았고, 직원들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기위해 북경사무소의 철수는 거론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경무부의 비협조로 ONE-STOP SERVICE는 심각한 적체현상을 보이고 있었고, 유연탄 물량증가 요청을 거절한 이후로 화동과의 알력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중요한 문건의 경우 팩스를 이용하지 않고 인편으로 한국에 보낼 정도로 북경사무소가 집중적인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곳곳에서 느끼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일들로 인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을 때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김창동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공상국과 세무국에서 조사가 나왔습니다.”

사무실에는 각기 다른 제복을 입은 네 명이 고압적인 자세로 직원들을 몰아세우는 모습이 김창동의 눈에 들어왔다. 일 년에 한 번하는 세무조사는 작년 12월에 마쳤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세무국에서 나왔다는 것은 목표를 정해놓고 짜 맞추기를 하기위한 수작으로밖에는 볼 수 없었다.

“제가 대표입니다. 들어오시죠.”

김창동을 따라 들어온 네 명은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앉고는 보란 듯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김창동은 그들의 오만한 행동에 배알이 꼴렸지만, 아직 중국은 제복 입은 놈이 장땡인 시절이었다.

“무슨 이유로 나오셨습니까? 세무보고는 작년 12월에 통과를 했는데요.”

“문제가 있어 다시 확인을 나온 것이니, 우리가 요청하는 서류를 가져 오십시오.”

김창동은 직원을 통해 사무소등기관련서류와 함께 사무소비용 세무보고 자료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미 시나리오를 짜 온 상태에서 관련서류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김창동은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원들과 체결된 노동계약서가 왜 없는 거요?”

형식적으로 서류를 들춰보던 한 명이 나서 엉뚱한 소리를 하자 승기를 잡기위해 고심하던 김창동의 눈이 반짝거렸다.

“착각을 하신 모양인데, 여긴 법인이아니라 연락사무소입니다. FESCO(북경시인력지원회사)와 고용계약만 하면 된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이 서류를 보시면 알겠지만, FESCO와 4천원에 계약을 맺고 직원들은 월 2천원을 급여로 받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고용계약 방식이었지만, 악법도 법이었다. 사무소는 직원들과 직접계약을 할 수 없었고 직원들과 합의된 급여의 두 배를 FESCO라는 곳에 지불해 직원들이 FESCO에서 매월 급여를 수령하는 방식이었다. 김창동의 반박에 뻘쭘해지자 세무국 직원이 급히 말을 돌렸다.

“사무소는 영업활동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곳은 법을 어기고 영업활동을 하고 있어요. 인정 합니까? 사무소 비용에는 영업활동에 따른 매출과 이익이 나와 있지 않은 것도 문제가 심각하군요.”

김창동은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경환이 왜 중국에 투자를 자제하고 북경사무소의 법인화를 반대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우리는 연락업무 이외의 업무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계약은 홍콩법인에서 체결을 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무소의 모든 경비는 홍콩에서 송금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매출을 일으킨 것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막대한 양의 유연탄을 수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계약이 홍콩에서 체결되었다 해도 북경사무소가 관여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익을 추정해서 과징금을 부과할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세법이지만, 중국은 연락사무소에도 기업소득세와 개인소득세를 부과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경비가 송금되면 매월 사용경비에 맞춰 세금을 납부하고 있었고 혹시라도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외부 세무사와 계약을 체결해 이중 검토를 할 정도로 신경을 써 왔었다. 그러나 중국은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였다. 경무부와 화동이 이번 문제에 연관이 되어있다면 소송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김창동은 작정을 하고 덤비는세무국 직원을 노려봤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김창동이 백기를 들었다고 판단했는지 세무국 직원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담배연기를 뿜었다.

“유연탄 수출과 관련한 일체의 계약서와 홍콩법인의 재무제표와 통장사본을 요청합니다. 원하는 서류를 보내준다면 정상참작을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도 어쩔 수 없군요.”

김창동은 순간 멈칫했다. 요청하는 서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건네줄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왕샹첸과 장성궈가 이번 사건의 주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신주쿠 중심가에서 벗어난 자그마한 식당입구엔 건장한 사내들이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식당안에는 오로지 세 명만이 앉아 주방장이 만들어 주는 초밥을 먹고 있었다.

“장관님, 나랏일로 바쁘신데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별 말씀을요. 이것도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간 나오토 후생성 장관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친 후 따듯하게 데워진 사케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지원을 해 준 케이스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자리를 마련해 주었지만,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지금 자칫 자신의 정치행보에 이번 만남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 때문인지 나오토의 기분은 좋을 리 없었다. 그만큼 나오토의 정치적 야심은 컸다.

“장관님께서도 바쁘시니 사담은 접고 JSC의 제안을 말해 보시지요.”

“미쓰비시 은행에서 JSC의 지분을 담보로 신규대출을 받고 싶습니다. 다나카 사장님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료스케의 말을 들은 다나카 아사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나오토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미쓰비시은행과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걸고 쓰러져가는 기업에 융자를 부탁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못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장관님 앞에서 말씀이 너무 지나치군요.”

“다나카 사장님, SHJ가 왜 날을 세워 JSC의 길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지 살펴보셔야 됩니다. 지금이야 미쓰비시중공업이 SHJ와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한다고 하지만, JSC가 SHJ의 손에 들어간다면 미쓰비시중공업과는 다시 경쟁관계로 돌아선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료스케의 말이 자리를 일어나려던 아사히의 발을 잡았다. 알제리 입찰 성공 이후 SHJ와의 뚜렷한 합작 사업은 진행되지 않고 있었지만, SHJ가 추진하는 쿠웨이트나 사우디 입찰에 파트너로 참여하기 위해 협의를 계속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대형프로젝트와는 별도로 JSC가 추진하는 소형프로젝트에 남는 이익도 없이 참여해 JSC의 해외진출을 철저히 봉쇄하는 SHJ의 행보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JSC 회장님의 서자의 개인적인 복수심을 너무 과대 포장하는 거 같습니다. 타케우치 사장님.”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SHJ 이경환 사장의 행보를 보면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SHJ는 플랜트 제작업체를 한국에 설립해 KBR의 특수플랜트 기술까지 전수를 받은 상태입니다. 뭐가 하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료스케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사히는 급히 사케 한잔을 입에 부었다. SHJ가 JSC의 설계기술과 LNG 및 정유설비의 라이선스를 얻게 된다면 단순 컨설팅에서 벗어나 단독입찰 자격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 아사히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컨설팅으로 확보된 유명세에 기술력과 제조기술이 합쳐진다면, 미쓰비시중공업의 해외입찰은 SHJ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많았다.

“두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심각한 일이군요. 일본 플랜트의 대표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JSC가 코쟁이 양키들 손에 넘어가면 큰일이겠군요.”

나오토가 직접적인 말보다 우회적인 표현으로 료스케의 한 손을 거들고 나섰다. 하찮을 수 있는 이런 기업인수 문제에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걸고 싶지는 않았지만, 케이스케가 가지고 있을 정치자금 문건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흠. JSC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정확히 뭡니까?”

의심은 가지만 아직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료스케의 말에 놀아날 수는 없었지만, 이 번 일을 잘 이용한다면 JSC의 기술력을 확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SHJ와 JSC란 떡을 양손에 쥐고 저울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사히의 입술을 위로 끌어올렸다.

“우선 JSC 경영진의 지분을 담보로 300억 엔의 융자를 받도록 설득해 주십시오. 그리고 요코하마 정유플랜트 확장공사 입찰을 시작으로 미쓰비시중공업과 JSC의 합작을 추진한 후 해외시장에 공동으로 나서자는 제안입니다.”

국내입찰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외시장에 공동으로 나선다는 것은 SHJ와 완전히 갈라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아사히도 쉽게 결정을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미쓰비시중공업은 SHJ의 컨설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SHJ의 배만 불리게 하실 겁니까? 미쓰비시중공업과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SHJ의 마수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고 봅니다.”

“다나카 사장님, 말을 들으니 SHJ의 사장이 한국인이라고 하더군요. 미쓰비시는 우리가 조선을 통치하던 시절, 최전선에 섰던 기업 아닙니까? 대국적으로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내각에서도 분위기를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사히는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기 바빴다.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차를 이용해 신주쿠를 벗어나려 할 때, 식당 맞은편 선술집에선 사진기 셔터가 연신 눌려지고 있었다.

한 달은 전광석화처럼 흘러가 버렸다. 수정과의 여행 마지막 밤은 두 사람을 아쉬움에 빠지게 하고 있었다.

“아쉽네. 마지막 밤이라는 게 실감이 안나. 다음에 둘째가 태어나면 정우까지 해서 다시 오자”

“정우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도 자기하고 같이 있을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그럼 우리 마지막 밤을 불태워야 되지 않겠어?”

경환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수정을 안아들고 침대로 향할 때, 전화소리가 분위기를 깨기 시작했다.

‘사장님,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잠깐 사무실로 내려오셔야겠습니다. 본사에서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알았어요. 바로 내려갈게요.”

늦은 저녁에 자신을 찾을 정도면 좋지 못한 상황이라고 직감한 경환은 침대에 누워있는 수정의 모습에 아쉬움을 보이며 방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경환은 알까지 대기하는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하루나가 건네준 팩스를 급히 읽어 내려갔다.

“흠. 예상을 했지만, 시기가 너무 빨랐네요. 하루나, 김창동 부장에게 전화연결 해줘요.”

북경은 자정을 넘겼을 시간이었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김창동은 경환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벨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고 경환은 하루나가 건네주는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부장님, 보고 받았습니다. 유선 상으로 자세히 말할 수 없으니, 우선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다독여만 주십시오. 제가 건너가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아닙니다. 분위기도 좋지 않은데 사장님께서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해결을 해 보겠습니다. 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무대포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창동은 풀이 죽어있는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경환은 우선 김창동부터 다독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상심하지 마십시오. 잘 될 겁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제가 들어가야 해결이 되는 문제입니다. 부장님께서는 미팅약속을 잡아 주시고 일절 대응하지 마십시오.”

전화를 마친 경환은 한동안 고민에 빠져 사무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왕샹첸과 장성궈가 수상쩍기는 하지만, 계약서와 통장사본까지 요청하는 거로 봐선, 두 사람 이외에 다른 라인도 의심을 해봐야만 했다.

“사장님, 커피한잔 드세요.”

경환의 고민이 계속되자 하루나는 급히 커피를 내려 경환에게 건넸고 커피를 받아든 경환은 그제야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하루나, 나는 내일 북경으로 바로 들어갈 테니 비행 편을 확인해 주고 하루나는 집사람과 함께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들어가도록 해요.”

하루나는 경환을 따라 북경으로 가고 싶었지만, 중국 비자가 없었다. 하루나가 입술을 깨물고 있자 알이 경환에게 다가왔다.

“중국비자를 가지고 있는 제가 사장님과 동행을 하겠습니다. 미시즈 리의 경호는 미셸로도 충분할 겁니다.”

불필요한 경호라고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급박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미국영사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알의 동행을 막지는 않았다.

“알, SHJ에 합류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건가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고민은 하고 있습니다. 결정은 미국에 돌아간 후 하겠습니다.”

알의 대답을 뒤로하고 갑작스럽게 잡힌 북경일정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 정아의 약혼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된 경환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에 이를 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