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8화 (95/264)
  • #118

    다시 사는 인생 - 118

    “자기야, 도착했나 봐요. 그런데 활주로 한 가운데 골프장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홍콩을 경유하며 7시간 만에 도착한 방콕의 돈무앙 공항은 특이하게 활주로 중간에 골프장이 있었고,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비행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을 수정은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음하하, 드디어 우리의 휴가가 시작되는 거야. 스트레스 확 풀고 가자고.”

    경환은 과장된 몸짓으로 수정의 얼싸안았다. 주위의 눈초리가 신경 쓰여 경환을 밀치려 했던 수정은 경환보다 심한 애정행각을 하는 신혼부부들을 보며 잡았던 경환의 손을 놓았다.

    “우리 결혼하고 처음 오는 여행이니 재미있게 보내요.”

    “당연하지. 비행기 안이 너무 답답하다. 빨리 나가자.”

    수정의 손을 이끌고 입국장을 나온 경환 앞으로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장차림을 한 하루나가 급히 다가왔다.

    “사장님, 사모님. 방콕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김수정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경환이 나서기도 전에 수정이 먼저 하루나와 악수를 나누며 경환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하루나의 미모가 경환이 말해준거와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수정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며 화제를 급히 돌렸다.

    “여기서 파타야 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리니 이러지 말고 빨리 출발합시다. 하루나 상, 차는 준비가 되었겠죠?”

    말을 마친 경환은 순간 흠칫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주시하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노타이의 검은색 슈트에 짙은 선글라스를 쓴 사내는 경환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경환은 급히 수정과 하루나를 자신의 몸 뒤로 보내고 그 사내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자 하루나가 급히 나서 두 사람의 중간을 가로 막았다.

    “사장님, 이 분은 본사로부터 사장님의 경호를 부탁받은 분이세요.”

    “제임스 리 사장님, 제 이름은 알 클라크입니다. 알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하루나의 설명을 듣고 경환은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여행 전 최석현과 린다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자신도 몰래 일을 진행시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펜타곤의 일과 오성전자의 일이 연이어 겹치면서 경환은 지금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반갑습니다. 당분간 저와 제 아내를 부탁하겠습니다.”

    경환과 악수를 나눈 알은 어디론가 손짓을 보냈고 같은 차림의 단단하게 보이는 단발의 여성이 앞으로 나와 가벼운 눈인사로 소개를 대신했다.

    “제 동료인 미셸 바에즈입니다. 미시즈 리의 밀착 경호를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미셸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미셸, 제 아내를 잘 부탁합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답답한 공항을 벗어나고 싶군요.”

    경환의 요청을 받은 알은 경환과 수정을 인도하며 공항을 빠져나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처음 받아보는 경호가 억색했던지 수정은 경환의 팔에 매달린 채 알과 미셸의 눈치만 살폈고 경환 또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환과 수정이 렌트한 7인승 벤에 올라타자 미셸이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사장님, 먼저 서류를 확인해 주십시오. 그 후에 미스터 클라크가 경호업무에 대해 설명드릴 겁니다.”

    경환은 하루나가 건네준 서류를 열었다. 린다가 오성전자에 무지막지한 항의성 공문을 보냈다는 내용과 함께 본사의 업무 진행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SHJ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도 하루나의 업무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본사의 업무상황 뒤에는 알과 미셸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고, 경환은 두 사람의 프로필을 세심하게 살폈다. 순수한 경호비용만 6만 불이란 사실을 확인한 경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만큼 두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대변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알, NAVY SEAL 근무에 백악관 경호팀 경력이 있네요. 미셸도 그렇고요.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번 제의는 어떻게 맡으신 건가요?”

    “프리랜서로 경호임무를 맡아 왔습니다. KBR의 의뢰를 자주 받아서 린다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셸도 저와 같고요.”

    대단한 경력을 봤을 때 태국까지 자신을 경호하기 위해 온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았지만, 경환은 알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경환의 질문에 간단히 답을 한 알은 경호업무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고, 미셸은 파타야를 향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쿠웨이트와 사우디 입찰준비로 정신이 없던 황태수는 최석현의 성화에 못 이겨 코이치와 함께 회사 앞 바에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부사장님, 거 보십쇼. 가끔 맥주한잔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부사장님이 사장님을 닮아가는건지 사장님이 부사장님을 닮아가는건지, 너무들 일밖에 모르십니다.”

    맥주잔을 단숨에 비운 최석현이 푸념을 황태수와 코이치는 미소로 받아넘겼다. 코이치는 최석현을 따라 맥주잔을 비우고는 황태수를 바라봤다.

    “부사장님, 잭 무어가 합류하기로 결정한 건 좀 의외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직 소문도 좋지 않은데 우리에게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경환의 제안을 받은 잭은 며칠 고민 끝에 SHJ에 합류하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아직 시장의 분위기가 잭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황태수의 고민을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잭은 뛰어난 사람이야. 어떤 면에서는 내가 배워야 될 부분도 많고. 현업에 바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사우디 합작공장의 경영을 통해 이미지를 쇄신해 간다면 우리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고도 남지 않겠어? 사장님도 그걸 원하시는 거 같고.”

    황태수도 잭의 합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긴 했지만, 경환은 잭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바뀐 점을 들어 황태수를 설득했고, 잭의 능력이라면 아람코에 끌려 다니지 않고 합작공장을 안정화 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잭의 합류를 받아들였다. 회사가 투자에 집중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플랜트의 사업범위도 넓어지고 있어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였고, 공인된 능력을 가진 잭의 합류는 큰 힘이 된다고 판단한 코이치는 황태수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이번 U.A.E가 우리에게 떨어지면 JSC도 어려움에 봉착할 텐데, 이후 계획은 어떤 방향으로 준비를 하고 있나?”

    “동경사무소에서 JSC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뚜렷한 움직임은 보이고 있지 않지만, 금융권의 압박이 시작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U.A.E 입찰을 끝내고 미쓰비시중공업과 협의를 할 생각입니다.”

    플랜트 전체 사업을 경환으로부터 위임받은 황태수는 경환이 이루어 놓은 불패신화를 깨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사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이 모임도 경환이 황태수의 이런 모습을 걱정해 최석현에게 지시한 사항임을 알고 있었던 황태수는 경환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를 하고 있었다. 경환이 원하는 독자입찰을 위한 조직을 갖추지 위해서도 이번 JSC의 인수는 반드시 성공을 시켜야만 했다.

    “일본은 겉으로 들어난 내용만 봐서는 안 되네. JSC가 심각한 자금압박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조용하다는 건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뭔가가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될 거야. 그건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말일세.”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저도 그런 부분이 의심은 하고 있습니다. 좀 더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JSC의 인수 전략은 코이치가 기안하고 코이치의 손에서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본인인 코이치 앞에서 심한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황태수는 일본의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뭉치는 일본이 두렵기까지 했다. 당분간은 코이치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책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부사장님, 저도 요새 고민이 있어 죽겠습니다.”

    “자넨 또 왜? 혹시 사장님께서 지시하신 SHJ타운 기획안 때문에 그러는 거야?”

    경환은 린다에게 지시하려던 SHJ타운 기획안을 최석현에게 맡겼다. 경환의 첫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온 후 중요한 업무를 맡은 적이 없었던 최석현을 배려하는 차원이었지만, 오히려 최석현은 중요한 업무가 자신의 손에 떨어지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요새 잠도 못 잡니다. 오죽하면 케이티 붙잡고 도움을 좀 받으려고 하는데 워낙 방대한 사업이다 보니 케이티도 슬그머니 도망가 버렸습니다.”

    최석현은 울다시피 하소연을 하고 있었지만, 황태수나 코이치도 어떠한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은 SHJ타운 기획안에 대해 딱히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자, 그건 최 부장 혼자 고민하기로 하고 건배나 다시 하자고.”

    “부사장님! 평소에 제가 도움도 많이 드렸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죠.”

    최석현의 절망 섞인 외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황태수와 코이치는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나누었고 세 사람의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파타야 절벽에 위치한 호텔의 스위트룸에 투숙한 경환은 시원하게 보이는 바다를 마주하며 수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며칠 동안 호텔 밖을 나가지도 않은 채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풀고 있었다. 단지 호텔 안에 단기 임대한 사무실에 들러 하루나가 정리한 일일보고서를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자기 아주 작성을 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여행을 왔으면서 관광도 안하고 매일.......”

    수정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한 달 동안 있을 건데 며칠 쉬는 것도 좋잖아. 난 신혼기분이 들어서 좋은데 뭘. 그리고 정우에게 동생도 만들어 줘야 되지 않겠어?”

    음흉하게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공략하고 있었지만, 수정은 경환의 손길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수정은 뭐가 생각이 났는지 급히 경환의 손을 제지하고 경환의 눈을 바라봤다.

    “나 먹고 싶은 거 있는데 오늘은 밖에서 저녁을 먹으면 어때요? 하루나도 종일 사무실에 있는 거 같은데.”

    “그럴까? 너무 호텔 안에만 있으면 알이나 미셸도 심심할 거 같으니 그것도 좋겠네. 뭐 먹고 싶은데.”

    “태국에 왔으면 똠양꿍은 한번 먹어야 되지 않겠어요? 매일 랍스타 먹는 것도 지쳐요.”

    경환은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똠양꿍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유명한 스프로 대접을 해 주는 똥양꿈의 희한한 맛이 경환의 입맛엔 영 맞지를 않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경환은 의도적으로 태국 전통음식을 피해 왔었다.

    “그래 먹어 봐. 후회해도 난 책임 안 진다.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준비하고 있어. 내려가서 하루나와 알에게 부탁을 하고 올게.”

    호텔 밖을 나간다는 생각에 수정은 부리나케 샤워부스로 들어갔고, 경환은 사무실로 내려갔다.

    “하루나,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읍시다. 태국 전통음식 잘하는 곳으로 좀 알아봐 줘요. 그리고 하루나도 같이 가도록 하고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외출을 하겠다는 소리에 알은 경호준비를 하기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하루나는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로비에 먼저 내려와 수정을 기다리던 경환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는 수정과 하루나의 미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묘한 기분을 느낀 경환은 순간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알과 미셸의 인도에 따라 호텔 밖을 나섰다.

    “알, 특이한 사항도 없는데 같이 식사나 합시다. 내가 불편해서 그럽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 일입니다.”

    알과 미셸은 경환의 요청을 거절한 채 탁자 주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경환의 예상과 달리 수정과 하루나는 똥양꿍을 비롯해 태국음식에 매료되어 있었지만, 강한 향신료를 싫어하는 경환은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해 저녁을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솔솔 풍기는 냄새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경환은 알이 서있는 곳으로 다가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알,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단순하게 경호업무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여서요. 다른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물론 6만 불이란 돈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알의 경력으로는 영향력도 없는 자신의 경호를 맡았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한참을 망설인 후 입을 열었다.

    “내년에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와 PMC(민간군사기업)를 설립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배운 게 이거밖에 없다보니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리고 이번 사장님의 경호는 SHJ란 회사가 궁금해서 받아들였습니다.”

    “궁금하다니요? SHJ는 아직 구멍가게 수준인데.”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제가 한 말은 잊어 주십시오.”

    경호원은 생명은 고객들의 비밀을 유지시켜 준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알은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경환은 그런 알의 행동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지내면서 알의 과묵한 성격과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알, 이번 일이 끝나고 미국에 돌아가면 SHJ를 한번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회사가 커지면서 열악한 보안시설 때문에 머리가 좀 아픕니다. PMC를 설립하는 것도 좋겠지만, 저와 함께 일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뜻밖의 제안을 받은 알은 당장 대답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알은 KBR과 군대의 개인적인 라인들을 통해 SHJ란 회사가 급속하게 커가고 있는 유망한 기업이란 소리를 들었고 분쟁지역인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SHJ와 인연을 맺게 된다면 잠재적인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에 경환의 경호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고객보다는 SHJ에 합류해 달라는 경환의 제안이 알을 심하게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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