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7화 (94/264)

#117

다시 사는 인생 - 117

“누구세요?”

공항에서 바로 본가로 달려온 경환은 이사한 집을 찾지 못해 아파트단지에서 한참을 헤매는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누른 경환은 다행히 수정의 목소리가 들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야, 나야.”

정우를 안아 든 수정이 문을 열고 경환을 반겼다.

“그래도 잘 찾아 왔네요.”

“아바빠, 아바빠.”

핏줄이라고 자신을 알아보는 정우를 경환은 한손으로 안아 올려 연신 볼을 비볐다. 평소의 습관대로 수정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하자 수정이 급히 뒤로 물려서며 어색한 눈짓을 지어보였다.

“오빠, 애정행각은 둘이 있을 때 하는 게 어때?”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해금을 연주하고 있던 정아는 대학생 때의 풋풋한 모습은 사라지고 세련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환은 정아의 볼을 한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거실로 올라섰다.

“아버지, 어머니. 저 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거라. 고생했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부모님 덕분인지 경환은 일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푸근한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살던 연립주택에서 평수가 제법 큰 아파트로 옮겨서인지 좁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활기차게 바뀌어가는 가족들의 모습에 경환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승연이가 안 보이네요?”

“올해 복학한다고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데 네가 잘 얘기 좀 해 주거라.”

나이차가 많이 나는 막내다 보니 전생에서도 신경을 써주지 못했었다. 승연이 유학을 가고 싶어 한다면 말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실력만 충분하다면 SHJ에 자리를 마련해 일을 배우게 할 생각도 있지만, 실력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길을 찾도록 유도해 볼 생각이었다.

“내일 여행을 가려면 처가는 못 가는 거냐? 사돈들도 많이 기다리실 텐데.”

“우선 전화를 드리고 돌아올 때 찾아뵈려고요.”

“아버지, 회사 일은 좀 어떠세요?”

“그냥 소일거리 삼아 일주일에 몇 번 출근하는 거지 내가 뭔 일을 알겠니?”

경환의 아버지는 경환의 간곡한 요청으로 SHJ-화성플랜트 고문에 위촉되었지만, 경영에는 참여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 있는 거 보다는 편했던지 거의 매일 출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박화수를 통해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하세요. 집에 계시는 거 보다는 회사에 나가셔서 친구 분들과 교제도 하시고 그러세요. 남자는 집에만 있으면 금방 늙는다고 하더라고요.”

정우는 걷다 기다를 반복하며 거실을 활보하고 있었고 경환은 가족들과 함께 회사 일로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이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인생을 함께 설계하며 살고 싶었지만, 외국에서 살아야만 되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이 지금 이 순간엔 원망스러웠다.

“정우아빠, 전화 받으세요. 박화수 사장님이에요.”

오랜만에 가족들과 오붓한 대화를 즐기고 있던 경환은 박화수의 전화에 의아해졌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전화를 했을 땐 그만큼 중요한 일라고 봐야했다. 경환은 급히 수정이 건네주는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박 사장님, 제가 도착을 하고도 전화를 못 드렸네요. 무슨 일인가요?”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오성전자에서 급히 사장님을 뵙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퀄컴의 인수 때문인 거 같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오성전자의 행태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가족들과의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던 경환은 최대한 절제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정중히 거절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장님. 들어가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은 경환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정의 어깨를 주물러 안심시키고는 수정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는 정우를 안아들었다.

“박 사장이 무슨 일로 집에까지 전화를 한 거냐?”

“아니에요, 아버지. 회사 일로 만나자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거절했어요.”

오성전자의 일을 머리에서 지우고 경환은 다음 달에 있을 정아와 석우의 약혼식을 시작으로 가족들과의 대화에 다시 집중했다.

JSC의 회장실엔 정적만이 감싸고 있었다. 사활을 걸고 추진했던 알제리와 오만 프로젝트에서 번번이 SHJ에 발목이 잡힌 후로 JSC의 경영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버블경제가 무너지자 일본의 국내경기는 급속도로 냉각되었고 후발주자들의 공격적인 영업 전략은 JSC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어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안팎으로 맞고 있었다.

“회장님, 자금경색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 상태로 가다간 4/4 분기를 넘기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부동산이 묶여있다 보니 자금조달이 막힌 게 큰 문제입니다.”

케이스케는 눈을 감은 채 료스케의 절규를 듣고 있었다. 85년 미국의 압력으로 달러의 절하에 동의한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에 의해 대외수출에 타격을 입자 일본정부는 초 저금리를 포함한 금융완화조치를 취했고, 시중에 대거 유입된 유동자금은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JSC도 이 버블경제에 편승해 기술개발보다는 주식과 부동산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으나 91년 버블경제가 몰락하자 반 토막이 난 주식과 팔리지 않는 부동산은 JSC의 목줄을 서서히 죄어오기 시작했다. 금융권의 융자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근근이 버티고는 있었지만, 곧 한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케이스케도 모를 리 없었다.

“은행의 압박이 상당합니다. 단기 융자의 기간연장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전달해 왔습니다. 당장은 막을 수 있겠지만, 제2 금융권의 분위기도 좋지 못합니다.”

부동산을 담보로 금융권의 융자를 받아왔지만, 버블경제 몰락 후, 대출금이 담보의 가치보다 상회하는 기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회생하려는 금융권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일본정부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후, 96년 들어서 서서히 경제성장률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시점에 쓰러져가는 기업인 JSC의 대출금 기간연장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카이토가 나가있는 U.A.E에선 소식이 없는 것이냐?”

“그게, 좋은 분위기는 아닌 거 같습니다. 이번에도 SHJ가.......”

케이스케는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료스케의 입에서 어김없이 SHJ란 이름이 나오자 입을 굳게 다물려 미간을 좁혔다. SHJ는 큰 원한도 없으면서도 잔인할 정도로 JSC의 해외진출을 막고 있었고 JSC는 SHJ의 마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료스케, 대대적인 인력감축을 포함한 구조조정 안을 만들도록 해라. 이번 U.A.E의 결과를 따라 시기를 조율해야겠다.”

료스케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구조조정 이외에는 현실적인 대안은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력감축을 포함한 구조조정이 자금경색을 풀어줄 장기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케이스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장님, SHJ가 우리를 타깃으로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을 해 봤습니다. 코이치의 복수심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설명이 부족하더군요. 혹시 SHJ가 딴 맘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요?”

료스케의 말은 케이스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케이스케 또한, 코이치의 복수심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미심쩍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개인의 복수에 움직일 경환이 아니라는 생각이 불연 듯 케이스케의 머리를 때렸다.

“계속 얘기를 해 보거라.”

케이스케가 관심을 보이자 료스케는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 퀄컴의 인수처럼 우리를 M&A 대상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의 발을 계속 묶다보면 반 토막 난 주가는 다시 바닥을 치게 되고, 우리가 도산이라도 하게 된다면 SHJ는 코도 안 풀고 저렴한 돈으로 우릴 인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는 생각에 케이스케는 지팡이를 손으로 잡고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SHJ가 JSC를 맘에 두었다면 유동자금이 막히기 시작하는 U.A.E 프로젝트 이후에 움직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료스케, 너는 지금 즉시 후생성에 전화를 넣어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거라.”

자신이 뒤를 봐주는 간 나오토 후생성 장관은 올 1월 무라야마 내각이 퇴진하고 정권을 잡은 하시모토 내각의 연립정권에 발탁된 인물이었다. 일본의 보수주의 색채를 움직인다면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케이스케는 료스케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도착한 김포공항에는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 늘어나는 관광객들로 인해 아침 일찍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해서인지 따로 줄을 서지 않고 발권업무를 마친 경환은 아직 여유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주문했어요. 결혼하고 처음 가는 여행이다 보니 어제 잠도 한숨 못 잤어요. 그나저나 정우를 맡기고 온 게 잘한 건지 모르겠어요.”

“잘했어. 기내식도 있으니 간단하게 먹자고. 부모님이 오히려 좋아하시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수정은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들떠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실 경환도 정우를 부모님께 맡긴 게 죄송했지만, 오히려 부모님은 자주 보지도 못하는 첫 손자를 매일 볼 수 있다며 기뻐하시며 흔쾌히 맡아 주셨다. 전생에 두 번 정도 가본 여행지였지만, 수정과는 처음이란 사실이 경환을 설레게 했다.

“이경환 사장님. 식사하시는데 죄송합니다.”

경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중년의 사내를 쳐다봤지만,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이름과 행동반경을 알고 있다면 정부기관일 확률이 많다고 판단한 경환은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처음 뵙는 거 같은데 누구십니까?”

경환은 여행 가는 첫날의 들떠있는 기분을 망친 사내에게 호의를 건넬 수 없어 딱딱한 어투로 되물었다.

“오성전자의 한재웅 상무라고 합니다. 실례인줄 알지만, 잠깐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오성전자라는 말에 경환은 기가 막혔다. 자신의 거절에도 공항까지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행동반경이 쉽게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경환을 고민에 빠지게 했다. 이미 펜타곤의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오성전자까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주변에 나타난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야 될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무례하시군요. 오성전자가 이렇게 대단한 기업일줄 몰랐습니다. 출국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없습니다. 십분 후에 저는 일어나겠습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재웅이었지만, 나이대접을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상무직급의 한재웅이 SHJ의 오너인 경환에게 사전약속도 없이 접근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린다의 책임 하에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오성전자는 경환이 나설 일도 아니었다. 한재웅은 아들뻘 되는 경환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있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지만, 결코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그룹 회장님께서는 미래를 위해 SHJ와의 동반자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사장님께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 뵌 이유도 오성그룹의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말을 마친 한재웅은 두툼한 서류봉투를 경환에게 건넸고 서류를 꺼내 한 장씩 넘기는 경환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행에 들떠있는 수정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경환은 중간까지 보다 만 서류를 덮고는 한재웅에게 되돌려 주었다.

“제가 오성그룹에게 만만하게 보였나봅니다. 어린놈에게 사탕하나 물려주면 좋아할 거란 생각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이, 이 사장님. 크게 오해를 하신 거 같습니다. 이 제안서의 내용이 부족하다면.......”

경환은 굳은 얼굴로 한재웅의 말을 손을 들어 끊었다. 오성그룹이 어떻게 탐나는 기술을 빼내는지 경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재웅의 말을 더 듣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SHJ의 가치가 10억 불밖에 안 된다고 보십니까? 오성그룹 입장에서 작업하던 퀄컴이 SHJ에 떨어지자 배가 아프셨겠지요. 오성그룹에서 보는 미래를 SHJ도 본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될 겁니다. 10억 불의 백배를 주신다면 생각을 잠시 해 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얘기 꺼내지도 마십시오.”

“백, 백배요?”

한재웅은 경환의 배포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오성전자의 주가총액보다도 많은 액수를 부른 경환의 의도는 명확했다. 처음 논의된 5억 불에서 두 배인 10억 불로 제안을 했지만, 경환은 콧방귀를 끼고 백배인 천억 불을 부른다는 것은 인수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룹 회장의 지시로 나온 이 자리가 한재웅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만, 전화 한통 써도 되겠습니까?”

멍한 표정으로 한재웅이 건네준 휴대폰을 받은 경환은 급히 박화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화수 사장님, 이경환입니다. 지금 오성전자에서 제 여행 첫날의 기분을 완전히 망가트려 놓았네요. 쿡 부사장에게 바로 제 지시사항을 전달하십시오. 오성전자와 동일한 조건으로 금성전자와 대현전자, 모토롤라에게 제안을 하라고 하십시오. 더 이상 오성전자의 혜택은 없습니다.”

전화를 마친 경환은 수정과 함께 출국장으로 들어가 버렸고, 한재웅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경환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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