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6화 (93/264)
  • #116

    다시 사는 인생 - 116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이러는 건 너무 무례한 행동 아닙니까?”

    경환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래리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또한, 백럽프로젝트라고 쓰여 있는 서류는 경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SHJ의 투자가 IT분야에 집중되자 하루에도 수십 건의 투자요청서가 휴스턴에 날라 오고 있는 와중에 아무리 스탠퍼드라고는 하지만, 대학원생이 내민 기안서는 경환의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사장님을 만나 뵐 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무례하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그럼 이만.”

    래리는 건네려던 프로젝트 기안서를 가방에 넣으며 상심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경환은 그런 래리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다 6년 전 화성산업에 처음 들어가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급히 래리를 불러 세웠다.

    “미스터 페이지, 잠시 기다려 보세요.”

    “제임스, 어쩌려고 그래요?”

    린다는 불안했던지 경환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경환은 그런 린다를 안심시키고는 래리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경환 자신도 절실한 상황에서 화성산업의 최승화를 설득하기 위해 극약처분을 내렸듯이 래리도 절박함에 이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했습니까?”

    “사장님이 이 호텔에 투숙한다는 말을 듣고 아침부터 기다리느라.......”

    경환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뒷말을 잇지 못하는 래리를 봐서는 아침부터 굶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을 그냥 되돌려 보낸다면 후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경환으로 하여금 래리를 붙잡게 했다.

    “나도 아직 식사 전이니 같이 식사나 합시다. 린다도 같이 내려갑시다.”

    경환은 긴장감에 뻣뻣이 굳어있는 래리의 등을 밀어 엘리베이터로 밀어 넣은 후 레스토랑이 있는 3층 버튼을 눌렀다. 정신을 차린 래리는 급히 경환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저, 사실은 친구와 같이 왔습니다. 그 친구는 아직 로비에 있는데.......”

    레스토랑에 도착한 경환은 린다에게 주문을 부탁하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에릭, 로비에서 세르게이 브린이란 학생을 찾아 3층 레스토랑으로 같이 오세요.”

    경환이 세르게이까지 레스토랑으로 부르자 래리는 그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에릭과 함께 세르게이가 긴장한 모습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 메뉴판을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우선 식사부터 한 후에 얘기를 나눠 봅시다.”

    경환은 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래리는 경환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무턱대고 찾아왔지만, SHJ의 오너와 식사까지 같이 하게 되자 래리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 되자 경환은 자신이 화성산업을 통해 잡았던 기회를 래리에게도 주고 싶었다.

    “미스터 페이지? 맥주한잔 하면서 얘기를 나눠 볼까요?”

    “아, 아닙니다. 저는 물이면 됩니다. 그리고 래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래리는 중요한 프로젝트 설명을 앞에 두고 한가하게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래리는 맥주를 마시는 경환에게 급히 기안서를 다시 건네주었다. 경환은 기안서를 살폈지만, 전문용어와 기호가 잔뜩 적혀있는 알고리즘을 이해하기란 비전공자인 경환에겐 무리였다. 서류보다는 래리의 말을 듣는 게 빠를 거라 생각한 경환은 기안서를 덮고 래리를 빤히 쳐다봤다.

    “저와 제 친구인 세르게이는 스탠퍼드 컴퓨터공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 백럽프로젝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이 기안서엔 온통 외계어 밖에 없다보니 인간인 제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지구어로 해석을 부탁할게요.”

    경환은 래리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이란 사실에 급히 관심을 보였다. 지금은 MS가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2000년을 넘기면서 구글과 애플이 MS에 대항마로 출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환은 이 두 사람을 통해 구글과 애플을 뛰어넘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해 보았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인터넷 검색엔진의 검색 정확도를 높인다는 게 백럽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페이지에 담겨진 내용을 분석하여 정확도를 매기고, 또 다른 방법으로 해당 페이지가 위치하는 사이트의 랭킹을 매김으로서 검색의 정확도에 반영해서 신뢰도를 높인다는 이론입니다.”

    경환은 IT에 투자를 해야 된다고 입으로 매일 떠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래리의 설명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무식한 모습에 기가 막혔다. 래리가 최대한 쉽게 설명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경환에겐 외계어일 수밖에 없었다.

    “래리, 비전공자인 내겐 아직도 어려운 말이네요. 검색의 정확도를 높여서 신뢰가 높고 가치가 있는 사이트를 목록 위쪽으로 올린다는 거 같은데 내가 맞게 이해를 한 건가요?”

    “틀린 이해는 아니라고 봅니다.”

    경환은 검색엔진의 정확성을 높이는 기술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의문이 들었다. 검색엔진을 개발하려는 프로젝트도 아니고 단지 검색의 정확성을 높인다는 설명에 경환은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검색 업체들에게 필요한 기술인 거 같은데요. 야후나 익사이트, 인포시크 등과 먼저 협의를 하지 않고 SHJ에게 온 이유가 있나요?”

    래리와 세르게이는 경환의 실망한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큰 한숨을 내쉬었다. 래리는 여러 가지 변명을 생각하다 솔직하게 있는 사실을 경환에게 털어놨다.

    “사실 사장님이 말하시는 검색 업체들을 찾아 다녀 봤지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SHJ를 찾아 왔습니다.”

    경환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래리가 말하는 백럽이란 기술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모든 검색 업체들이 거절한 상태에서 자신마저 거절한다면 두 사람의 기술은 사장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인정에 이끌려 무턱대고 투자를 할 수는 없었다. 경환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켠 후 래리를 쳐다봤다.

    “래리, 지금 이 백럽으로는 수익을 창출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사용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좋은 소프트웨어라는 사실엔 저도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경영자이며 사업가입니다. 제 입장에서 본다면 이 소프트웨어는 제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검색 업체들의 생각도 저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래리, 제가 제안하나 할까요?”

    “네, 말씀하세요.”

    래리와 세르게이는 경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컴퓨터공학자이지 경영과는 동떨어졌기 때문에 수익모델을 만드는 기술은 확실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SHJ마저 자신들에게 등을 돌린다면 당분간 연구에는 매진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경환의 제안에 귀를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백럽연구와 함께 검색엔진을 직접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럴 경우 더 큰 인덱스를 확보하기 위해 대량이 하드웨어가 지원되어야 되겠죠. 만약 두 사람이 동의를 한다면 SHJ에서 최고의 대우를 약속함과 동시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단지 투자를 받아 연구를 하고 싶었던 거지 SHJ에 취직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경환 또한, 두 사람이 거절을 하더라도 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직 구글이 나오려면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름은 모르지만, 구글 창업자를 찾아다닐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SHJ에 들어온다면 구글 인수를 위한 기초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딱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SHJ에 들어온다면 좀 더 큰 계획을 두 사람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관심이 있다면 제 계획을 말해주겠습니다.”

    래리가 쉽게 답을 주지 못하자 경환의 계획을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급히 세르게이가 나섰다.

    “무슨 계획인지 들어보고 결정을 해도 되겠습니까?”

    “현재 퍼스널 컴퓨터의 OS는 MS를 이길 만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기술력 보다는 MS의 마케팅 전략을 다른 OS업체들이 이길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MS에서 생각하지도 못하는 OS를 두 사람이 개발하고 SHJ가 획기적인 마케팅으로 지원을 한다면 어떨까요? 자세한 내용은 비밀이라 말해 줄 수 없어 미안합니다. 그러나 남들의 뒤를 따라가기 보다는 미리 선점을 해야 된다는 게 제 경영 철학이거든요.”

    래리와 세르게이는 입을 벌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지 검색의 정확도를 높이는 기술을 연구하려 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상상하는 경환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경환은 급히 수표책을 꺼내 만 불을 적어 래리에게 건네주었다.

    “고민을 해 보세요. SHJ와 함께 하고 싶다면 다음 달 초까지 휴스턴을 한번 방문하시고, 관심이 없다면 적은 돈이지만, 연구에 보태세요.”

    경환은 두 사람과의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환의 머리에는 두 사람보다는 구글이 중요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구글에 대한 정보나 기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구글을 창업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SHJ의 투자가 들리는 소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환이 말하는 MS가 생각하지 못하는 OS가 도대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다음날 경환은 린다와 에릭의 안내를 받으며 실리콘밸리에 투자한 벤처기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서 확보한 라이선스와 향후 투자계획 설명을 들은 후 L.A를 거쳐 서울로 출발을 했다.

    오성전자 사장실에는 이세일 사장과 한재웅 상무가 심각한 표정으로 미국 지사에서 보내온 업계 정보동향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저희가 한발 늦었나 봅니다. SHJ가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은 도저히 생각을 못했습니다.”

    “흠.”

    한재웅의 아쉬워하는 표정에 이세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퀄컴의 투자요청을 받은 후 거절을 했지만, 그건 퀄컴의 자금사정이 악화되기를 기다려 싼 가격에 인수를 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런 오성전자의 전략을 비웃기라도 하듯 SHJ가 전격적으로 퀄컴을 인수해 버리자 오성전자는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SHJ의 이경환 사장은 매번 우리의 앞길을 막는군요. 가뜩이나 SHJ에서 시달리며 북미의 단말기 독점권을 줘 버렸는데 퀄컴까지 먹어 버렸으니 그 위세가 더 대단해질까 걱정입니다.”

    이세일은 SHJ를 생각하자 벌써부터 두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국가나 기업들은 한국의 CDMA 상용화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지만, 오성그룹은 반도체 이후 오성그룹을 이끌어갈 21세기 미래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계획 하에 PCS사업에 모든 그룹의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퀄컴이 SHJ 손에 떨어지자 그룹회장의 문책을 받은 이세일은 신경질적으로 보고서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미 상용화가 시작되었어요. 아직은 미비하다지만, 휴대폰 시장은 분명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겁니다. 당장 아쉬운 건 우리니 SHJ와의 관계를 좀 더 미래지향적으로 봐야겠습니다. 회장님께서 퀄컴을 놓쳤다면 SHJ를 인수하는 방향으로 검토하라고 하시는 데 한 상무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세일의 말에 한재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얕은 수를 쓰다 SHJ와 감정이라도 상하게 된다면 금성전자와 모토롤라에 선두를 내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들어서였다.

    “사장님도 그간 경험으로 아시겠지만, SHJ의 이경환 사장은 만만한 친구가 아닙니다.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오퍼를 넣는다면 오히려 감정만 상하게 될 겁니다. 건설과 엔지니어링이 아직도 SHJ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나도 한 상무의 의견에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회장님이 내린 지시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내년 PCS 사업이 본격화 된다면 단말기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고 이때를 기점으로 세계진출도 가시화 될 거구요. 이경환 사장이 입국을 하게 된다면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룹 회장의 지시란 소리에 한재웅은 마냥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각 해외 사이트를 중심으로 달러를 매입하라는 지시와 함께 가급적이면 국내의 자금도 원화의 보유를 최소화 하라고 합니다. 한 상무는 무슨 내용인지 아는 게 있습니까?”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 청와대 박재윤 경제수석이 경질된 이유가 석연치 않더군요. 항간의 소문에는 고평가된 원화를 서서히 풀어 800원 후반대로 조정을 하자고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경제부와의 트러블이 발생해 문책성 인사가 아니냐는 소문이 있던데 이 문제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룹 기획조정실이 청와대 수석의 교체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이세일의 머리는 복잡해져 갔다. 다른 뭔가가 긴박하게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지만, 실체에 대해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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