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5화 (92/264)

#115

다시 사는 인생 - 115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경환은 조인식에 앞서 퀄컴의 경영진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만성적인 자금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심리가 작용해서인지 불안한 표정을 보이는 경영진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경환은 어윈의 소개를 받으며 경영진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눈 후 회의용 탁자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표정이 아직 무거우신 분들이 계시군요. 십 년을 키워온 회사를 타인의 손에 넘긴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이 순간부터 퀄컴을 타인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시작은 서로 달랐지만, SHJ와 퀄컴은 한 가족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조인식에 앞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한 가족으로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입니다.”

경환의 말에도 퀄컴의 경영진들은 눈치를 보며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그들의 눈에는 경환은 점령군 총 사령관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좌우를 살피던 스티브가 무겁게 닫혔던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고용승계를 약속하시고 경영진의 변화는 주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시간이 지나면 SHJ의 인사들로 교체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스티브는 SHJ가 약속한 고용승계와 책임경영에 대해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인수 후 경영진의 교체는 M&A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잡음 없이 인수 작업을 완료하기 위한 SHJ의 전략으로 스티브는 생각했다. 경환은 예상한 질문이 나오자 스티브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계신 분들이나 퀄컴의 모든 직원들은 조인식이 끝남과 동시에 SHJ의 가족이 됩니다. 퀄컴은 아니 SHJ-퀄컴은 제이콥스 사장님이 책임경영을 하시게 될 겁니다. 전 가족을 함부로 버리지 않습니다. 제 약속은 SHJ의 이름이 존재하는 순간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 아울러 적자경영을 감수하고서라도 SHJ의 여유 자금을 기술개발에 투입한다는 게 제 방침입니다.”

경환은 SHJ-퀄컴의 경영체계를 대대적으로 손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방치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어윈을 사장으로 책임경영을 맡기긴 했지만, 어윈은 스티브와 함께 기술개발에 주력하게 했고 재무와 인사는 리챠드를 통해 관리를 할 생각이었다. 경영진 대부분이 기술자여서인지 기술개발에 전폭적인 투자를 약속하자 부족한 자금으로 미뤄왔던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거웠던 회의실의 분위기는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상장을 폐지하게 된다면 저희가 가지고 있는 스톡옵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무리 가족이라는 말로 동질감을 형성하려고 했지만, 개인의 이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경환의 눈치를 보던 경영진 한 명이 조용히 손을 들어 스톡옵션에 대해 질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두 가지 방법입니다. 퀄컴을 비상장으로 돌리고 나면, SHJ-퀄컴 총 지분의 10% 내에서 스톡옵션을 제공하게 될 겁니다. 지금 가지고 계신 스톡옵션을 소액지분 매입 때 파셔도 되고 다시 스톡옵션을 받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똑 같은 비율로 계산되지는 않을 겁니다.”

질문을 했던 직원은 이해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경환의 입장에서는 모든 스톡옵션을 팔아주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경영진 대부분은 스톡옵션을 SHJ-퀄컴의 스톡옵션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취해서 경환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린다가 경환을 향해 자신의 시계를 손으로 가리켜 조인식 시간을 알리자 경환은 정리를 하기 위해 마지막 말을 꺼냈다.

“모두들 제이콥스 사장님과 함께 기술개발에 힘써 주십시오. 여러분의 뒤는 SHJ가 지키고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 잘 먹고 잘 살지 않을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의 고생과 땀의 대가는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경환의 말을 기립박수로 반겼고, 경환은 어윈과 함께 조인식 장으로 이동을 했다. 이번 인수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듯이 조인식장은 오성전자와 금성전자의 현지법인 직원들과 몇 명의 지역 경제지 기자가 전부였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어윈과 악수를 나누고서야 경환은 퀄컴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잘 부탁합니다. 제이콥스 사장님. 제 힘이 닿는 한 사장님을 믿고 지원하겠습니다. 사장님과 축배를 들고 싶지만, 일정이 바빠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아닙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SHJ-퀄컴을 이 사장님과 같이 성장시키겠습니다.”

경영에 실패한 자신에 SHJ-퀄컴의 책임경영을 맡기고 이에 더불어 지원까지 약속하자 어윈은 상기된 얼굴로 감격했다. 이번 M&A로 인해 자금에 대한 부담을 벗고 연구개발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어윈은 안도했다. 바쁜 일정으로 이후 행사를 에릭에게 맡기고 급히 자리를 뜨려할 때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경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사장님, 반갑습니다. 존 해밀턴이라고 합니다.”

“제임스 리입니다. 실례지만, 초면인 듯 합니다만.”

존이 내민 손을 엉겁결에 잡은 경환은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짧은 머리에 다부여 보이는 존은 일반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어윈이 급히 달려왔다.

“펜타곤에서 연락관으로 파견 나온 존 해밀턴 대령입니다.”

어윈의 소개에 경환은 고개를 끄떡였다. CDMA 기술은 미 국방부에서 처음 연구된 기술로 퀄컴이 인수해 상용화 개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 국방부에서도 관심 있게 퀄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국이 상용화에 성공한 지금 세계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미 국방부의 지원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환은 존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해밀턴 대령님, 조인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다른 일정이 있어 시간이 촉박합니다.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다음기회에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데요.”

“압니다.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를 예약해 놓으셨더군요. 우선은 인사만 드리겠습니다. 조만간 휴스턴을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여행 잘 다녀오십시오.”

존은 뒤를 돌아 조인식장을 빠르게 빠져나가자 경환은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자신의 여행일정까지 존이 알고 있다는 것은 미 국방부에서 SHJ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재촉하는 린다를 따라 공항으로 향하며 미 국방부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지 장고에 빠져들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피셔맨스 워프에는 어느덧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바닥이 목재로 만들어진 39번 선착장에 모여 들어 연신 사진을 찍기 바빴고 뭐라도 주워 먹을 생각에 갈매기들이 관광객들의 주위를 낮게 날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익숙한 듯 관광객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한 사내가 벤치에 앉아 먼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잭, 아주 팔자 좋습니다. 뭔 놈의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찾느라 고생 좀 했네요.”

느닷없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에 잭은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엔 숨을 헐떡거리는 경환이 서있었다.

“제임스, 여긴 어떻게.......”

“집에 갔더니, 조안나가 알려주더군요. 젠장, 피셔맨스 워프가 이렇게 복잡한 줄 알았으면 조안나에게 파이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기다릴 걸 잘못했네요.”

생각지도 못한 경환의 출현에 잭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KBR에서 나와 도망치듯 휴스턴을 떠났지만, 갈 곳이라고는 고향밖에 없었다. 형사 처분은 받지 않았지만, 윌리엄은 암암리에 잭에 대한 소문을 동종업계에 퍼트렸고 잭은 플랜트업계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부쩍 늙어 보이는 잭을 바라보는 경환의 마음은 좋지 못했다.

“배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린다와 조안나가 보딘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으니 거기 가서 뭐라도 좀 먹어야겠습니다. 빨리 일어나요.”

보딘은 피셔맨스 워프에서 유명한 빵집이어서 그런지 손님들로 넘쳐났고, 머뭇거리던 잭을 억지로 끌고 온 경환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린다와 조안나의 좌석으로 향했다.

“유명하다는 말만 믿고 왔으니, 조안나가 좀 골라주세요. 너무 배고파서 책상도 씹어 먹을 지경입니다.”

태평하게 주문을 부탁하는 경환을 바라보는 잭의 심정은 착잡했다. 한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경환을 파멸로 몰아넣으려 했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잭은 자기 자신에게 난 화를 경환에게 돌리려 했다.

“제임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떤지 궁금해서 여기 온 겁니까?”

“여, 여보.”

칼을 세우고 달려드는 잭의 팔을 조안나가 급히 잡았다. 경환은 그런 잭과 눈을 마주치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잭, 누구나 실수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받은 돈을 전액 기부를 했더군요. 그 돈으로 호의호식을 했다면 전 잭을 제 기억에서 지웠을 겁니다. 제가 말을 잘 돌리지 못하니, 잭을 찾아온 목적부터 말 하겠습니다. 저와 다시 일을 해 보지 않겠습니까?”

경환의 뜻밖의 제안에 잭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돈을 목적으로 정보를 넘긴 게 아니었기 때문에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돈을 받자마자 사촌동생을 통해 무명으로 기부를 했었다. 경환이 이런 사실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이미 동종업계에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을 알고 있는 잭은 경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 잭을 바라보던 린다가 입을 열었다.

“잭, 이런 곳에서 갈매기들하고 시간만 죽이고 있을 건가요? 휴스턴으로 다시 돌아와요. 부탁이에요.”

린다는 자신으로 인해 잭이 보장된 미래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항상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차마 경환에게는 말할 수 없었지만, 경환이 잭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조안나, 제 집사람이 조안나의 파이기술을 전수받지 못했다고 저를 얼마나 들들 볶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제 집사람과는 휴스턴대학 동문이잖아요. 집사람 잔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조안나가 휴스턴으로 좀 와줘야 되겠어요.”

“제, 제임스. 저야 수정에게 언제든지 파이를 전수해 주고 싶어요.”

조안나는 눈을 내리깔고 있는 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휴스턴으로 돌아가더라도 배신자라는 낙인이 주홍글씨로 남아 잭을 괴롭힐 것이란 사실에 조안나의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했다.

“잭, 조안나.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압니다. SHJ가 아람코와 합작으로 사우디에 플랜트공장을 건설합니다. 잭, 3년만 사우디 합작공장을 맡아 주세요. 3년 후에 휴스턴으로 돌아온다면 잭이 걱정하는 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게 될 겁니다.”

잭은 아무런 말도 없이 탁자 위의 머그잔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경환과 린다는 조안나의 만류에도 내일 있을 일정을 위해 급히 차를 몰아 산타클라라의 호텔로 향했다. 여행을 가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그동안 투자한 실리콘밸리의 업체들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경환은 IT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지만, 그동안 확보한 라이선스와 연구 중인 IT 기술을 퀄컴과 접목시키는 방향을 잡기 위해선 한번은 방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제임스, 잭이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확신은 못하겠지만, 잭도 모래바람이 그립지 않겠어요? 두 사람이 좋은 결정을 했으면 좋겠네요. 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 번 더 여기에 오면 되겠죠.”

자신의 회귀가 잭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던 경환은 잭이 휴스턴을 떠난 후부터 은밀히 잭의 상황을 살폈다. 퀄컴의 인수가 완결되고 중동에 합작공장을 건설하는 지금이 잭을 불러들일 가장 좋은 시기라고 판단했다. 경환은 잭에게 진 빚을 갚고 그의 틀어진 인생을 화려하게 복귀시켜 주려 했지만, 잭은 아직 경환이 내민 손을 잡지 않고 있었다. 잭에 대한 안타까움에 차 창밖의 경치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승용차는호텔입구에 정차했다.

“사장님, 린다. 좀 늦으셨네요.”

먼저 도착해 있었던지 에릭이 두 사람을 맞아 주었다. 로비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우리의 투자를 받기 위해 많은 업체에서 나와 있습니다. 제가 상대를 하겠으니, 두 분은 먼저 올라가 쉬십시오.”

SHJ가 공격적으로 투자를 한다는 소문은 실리콘밸리를 들썩이고 있었고 마침 경환과 린다의 방문에 맞춰 SHJ의 투자를 받기 위해 아침부터 호텔은 사람들로 만원사례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에릭이 건네주는 방 키를 손에 쥐고 경환과 린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한 청년이 급히 그 뒤를 따라 닫히는 문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서 타세요.”

경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이고는 넥타이의 끝매듭을 풀어 헤쳤다. 청년을 의식해서인지 경환과 린다는 말없이 층수 표시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도착 음이 울리자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각자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제임스 리 사장님!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십시오.”

경환은 엘리베이터에 뒤 따라 탄 청년이 자신을 부르자 급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전혀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경환은 린다를 재빠르게 자신의 뒤로 보내며 그 청년과 마주했다.

“누구십니까?”

“저, 저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래리 페이지라고 합니다. 실례인줄 알지만, 제가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한번 봐 주십시오.”

그 청년이 건넨 자료에는 백럽프로젝트라고 쓰여 있었지만, 경환은 래리 페이지란 이름도 백럽프로젝트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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