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4화 (9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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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14

    어윈의 동의가 떨어지자 SHJ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퀄컴의 인수를 진행했다. 우선 린다는 M&A 담당변호사를 대동해 주거래은행과의 협상을 진행해 단기부채 천만 불을 상환하는 조건으로 퀄컴인수에 대한 지지를 받아냈고 주요 투자자들과의 물밑 협상을 통해 투자 금을 상환하는 조건으로 그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SHJ는 보안을 유지하며 진행을 하고 싶었지만, 인수 소문은 서서히 시장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그리 좋지못했는데 SHJ라는 플랜트 업체의 무모한 도전이란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주가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단지 SHJ가 M&A 체결 후 퀄컴의 상장을 폐지하면서 소액주주의 지분을 매입할 수도 있다는 기대심리가 작용해 상승세를 반짝 타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상승세도 사그라졌다.

    “인수진행은 문제가 없지요?”

    “실사는 이상 없이 진행되고 있어요. 어윈과도 협상을 마쳤으니 실사가 끝나면 바로 계약을 진행할 수 있을 거예요.”

    경환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전까지는 안심을 할 수 없었다. 무슨 변수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경환의 초조함과는 달리 린다의 얼굴을 그리 좋지 못했다.

    “자금이 문제네요. 퀄컴은 자본잠식이 시작된 상태고 자산이라고 해 봐야 검증되지 않은 라이선스가 전부인데, 앞으로 있을 소액주주들의 지분을 매입할 자금이 빠듯해 보여요.”

    린다의 고민과는 달리 경환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은행의 부채 천만 불과 퀄컴의 영업권을 인정하면서 지급한 3천만 불, AT&T 등 투자 금 상환에 천만 불을 지급하고 나면 SHJ는 2천만 불의 운용자금으로 잔여 주식을 매입해야 될 처지였다.

    “퀄컴이 소유한 라이선스는 우리의 큰 자산이 될 겁니다.우선 본사 자금으로 퀄컴인수를 마무리하고 소나트락과 아람코와의 합작 자금은 홍콩의 자금으로 융통해요. 황 부사장님이 준비하는 쿠웨이트와 사우디 입찰이 끝나면 올해 자금 운용에는 크게 영향이 없을 거예요.”

    “홍콩자금은 우리의 꿀단지였는데, 중국 사업이 올해 정리되는 게 아쉽네요.”

    경환의 아쉬워 입맛을 다시는 린다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만 버틴다면 내년부터 더 이상의 꿀단지는 필요 없다는 사실은 아직은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했다.

    “어윈은 우리가 건넨 조건에 만족하고 있나요?”

    “직원들의 고용승계까지 컨펌해주자 충분히 만족하는 모습이에요.”

    경환은 SHJ의 주식 3%를 어윈에게 스톡옵션으로 제공하고 퀄컴의 책임경영자로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제시했다. 어윈은 직원승계까지 받아낸 상태에서 SHJ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행이네요. 계약이 체결하고 샌프란시스코에 같이 가야 될 거 같으니, 미리 준비를 해 주세요. 린다와 함께 만나야 될 사람이 있습니다.”

    “제, 제임스, 샌프란시스코라면.......”

    경환의 의중을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던 린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팰로 앨토의 1월은 춥지는 않았지만, 북쪽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의 영향 때문인지 싸늘한 바람이 교내를 감싸 돌아 지나가는 학생들의 옷깃을 여미게 만들고 있었다. 교내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디저트로 집어든 포춘 쿠키를 베어 물자 조그마한 종이가 튀어나왔다. 종이에 적혀진 글귀를 확인하고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FAME AND FORTUNE LIE AHEAD. (부와 명예가 앞에 놓여 있다.)’

    “젠장, 뭔 부와 명예가 있다는 거야. 중국 애들 상술에 또 속았군.”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구겨 던져버리며 전공서적을 들췄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자 식당 안으로 세르게이가 손짓을 하며 곁으로 다가왔다.

    “래리, 신문기사 봤어?”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한가하게 신문 볼 시간이나 있는 네가 부러울 따름이다.”

    같은 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세르게이는 읽던 신문을 래리에게 건네주며 래리가 먹고 남긴 포춘 쿠키 반쪽을 입에 넣었다.

    “SHJ가 퀄컴을 인수했다고 하더라고. 앞뒤 안 가리고 실리콘밸리에 투자하더니 퀄컴까지 먹을 줄은 몰랐어.”

    세르게이가 건네준 지역지 신문엔 퀄컴이 SHJ에 팔렸다는 제목과 함께 이번 M&A는 SHJ의 판단착오에 의한 무모한 투자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실리콘밸리에서 사업을 하려면 SHJ의 투자를 받아야 된다는 우스갯소리는 래리로 예전부터 들어왔다.

    “래리,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SHJ의 펀딩을 받아보는 게 어떨까? 백럽(BACKRUB) 프로젝트의 이론도 정립을 했고 본격적으로 개발을 하려면 우리도 자금이 필요하잖아.”

    “SHJ가 무턱대고 이론만 정립시켜 놓은 백럽에 돈을 투자하겠냐?”

    래리는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세르게이를 향해 빈 우유팩을 툭 던지고는 연구소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럽은 래리와 세르게이가 웹페이지 사이의 링크를 많이 받는 페이지를 더 좋은 페이지로 취급한다는 가설을 세워 연구를 하며 테스트를 하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아직 뚜렷한 결과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자금만 충분하다면 제대로 연구에 매달려보고 싶었다. 래리는 급히 되돌아와 세리게이가 보고 있던 신문을 낚아챘다.

    “자기야 뭔 짐이 이렇게 많아?”

    경환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행 가방들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 달 동안 지내야 될 텐데 이 정도는 돼야죠. 그리고 정우 짐도 만만치 않고요.”

    수정은 들뜬 마음에 일주일 전부터 여행 가방을 싸고 풀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여행가방주위를 서성거렸다.

    “필요한 게 있으면 가서 사면되잖아. 비행기 시간 얼만 안 남았으니까 서둘러 나가자.”

    “알았어요. 먼저 가 있을 테니까, 여기 가방들 잊으면 안 돼요.”

    경환은 수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를 안아 들고 급히 집을 나섰다. 수정은 여행을 가기 전 서울에 잠시 머물기를 원했지만, 퀄컴과의 M&A 계약이 남아있었던 경환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경환은 수정과 정우를 먼저 서울에 보내고 자신은 계약을 마무리 한 후 서울에서 만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다 보니 혼자서 이 많은 짐을 가지고 갈 생각에 경환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모님은 출발하셨나요?”

    “방금 보내고 오는 길이에요. 이다나, 부사장님들을 불러 주세요.”

    수정을 배웅하고 회사로 돌아온 경환은 자신이 떠나있을 한 달 동안 SHJ가 업무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업무분장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경환이 여행을 계획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달받은 황태수와 린다는 중요한 시기에 오너가 자리를 비운다면 사업결정이 늦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쌍수를 들어 반대했지만, 경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경환에겐 SHJ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부하직원들은 간당간당한 자금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고 있는데, 한 달씩이나 여행을 가셔서 좋으시겠습니다. 사장님,”

    “황 부사장님의 말에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사장님.”

    퉁명스럽게 말을 건네는 두 사람에게 경환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 분 왜 그러십니까?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제가.......”

    “커피는 제가 직접 내려 마시겠습니다.”

    어색한 상황을 풀 때마다 경환이 직접 커피를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황태수는 경환이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일어나 커피메이커로 향했다.

    “저 결혼하고 신혼여행도 못 간 사람입니다. 미국에 와서도 가본 곳이라고는 허먼 파크밖에는 없습니다. 처음으로 남편 노릇을 하는 건데 이해 좀 해 주세요.”

    경환은 여태껏 직원들 앞에서 오너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직원들과 밑바닥부터 고생하며 SHJ를 같이 이끌고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이 죽을상을 짓고 읍소를 하자 두 사람은 활짝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사장님 덕분에 SHJ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잠시 쉬시면서 재충전을 해야 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는 저와 쿡 부사장이 지키고 있을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오십시오.”

    두 사람이 자신을 놀렸다는 생각에 경환은 눈을 부라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고는 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환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두 사람은 직원이라기보다 전쟁을 같이 치른 전우였기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신뢰가 세 사람을 뭉치게 했다.

    “제가 여행을 가더라도 중요한 업무는 현지에 개설한 임시사무소를 통해 결재를 하겠습니다. 사소한 일들은 두 분께서 협의 하에 진행을 해 주십시오. 대외적인 공식 업무는 황 부사장님께서 제 대리를 해 주시고요.”

    린다는 경환의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황태수와는 같은 부사장을 맡고 있지만, 린다는 SHJ 내부에서 만큼은 황태수를 자신의 위로 인정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황태수가 웃음을 거두어 들였다.

    “타케우치 부장이 오만 입찰을 성공시키고 나서 대후건설과의 공동입찰에 적극적인 거 같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으로는 JSC를 막기 어렵다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저도 타케우치 부장의 의견에 동의를 하고 있고요. 당분간 지켜 볼 생각인데 어떠십니까?”

    “오만 프로젝트야 알제리에 대한 보상차원으로 합작을 했다지만, 이후의 프로젝트에는 오성건설을 제외한 한국기업과의 공동입찰을 보류시키십시오.”

    황태수는 경환의 결정에 토를 달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이유에 대해선 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경환은 어디까지 황태수에게 설명을 해야 될지 고민했다. IMF 사태를 맞아 대후그룹과 아동그룹이 공중분해 된다고는 차마 말해 줄 수 없었다.

    “아시겠지만, 현재 투자 팀 연구원들이 헤지펀드에 대한 동향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올 연말부터 아시아의 증권과 외환시장을 공격한다는 첩보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이 그 공격대상에 포함된다면 한국 경제가 요동치게 될 것입니다. 내년까지는 사태를 관망해야겠습니다.”

    “흠.”

    황태수는 탄식을 내 뱉었다. 경환의 정보력의 정확성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태수의 미간에는 내 천자가 그려졌다.

    “박화수 사장에겐 최대한 달러를 확보하라고 하십시오. 주위의 창고를 임대해서라도 최소한 일 년 치 이상의 원자재를 확보하라고 하시고, 회사 운영경비를 제외하고는 달러의 매도를 중지시키십시오.”

    “알겠습니다.”

    황태수는 토를 달지 않았다. 경환이 이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다면 예삿일이 아니란 사실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IMF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대비를 해야 그나마 시간을 맞출 수 있었지만, 한국은 어떠한 변화의 조심도 없이 평온했다. 많은 고민 끝에 대비를 하라는 건넨 정보를 쓰레기 취급하는 한국정부에 실망한 경환은 서서히 한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인식에 오성전자와 금성전자, L. A 영사관에서 참석을 요청해 왔어요. 그리고 조인식을 마치고 시간을 할애해 달라고 하던데요.”

    경환은 인상부터 찡그렸다. 오성이나 금성이야 이해를 할 수 있었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영사관에서 참석을 요청했다는 게 경환의 심기를 건드렸다. 린다는 경환의 심정을 헤아리며 말을 이었다.

    “일반석에서 참관을 하는 건 동의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일정이 바빠서 따로 시간을 만들 수는 없다고 말을 덧붙였고요. 아직 회신이 없는 거로 봐선 올 생각이 없나 보네요.”

    나 잘했죠? 라는 표정을 짓는 린다에게 경환은 엄지를 들어보였다. 경환이 한국정부와의 악연으로 인해 칼을 세우는 것은 이해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기를 린다는 바라고 있었다. 경환이 국적을 바꾸기 전에는 한국정부에 의해 지난번과 같은 개인적인 피해가 자행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분간은 쿡 부사장님이 퀄컴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세요. 우리가 인수를 했다 하더라도 절대 점령군 행세를 하면 안 됩니다. 퀄컴이 필요한 것은 최대한 의견을 수렴해 주세요. 조인식이 끝나면 퀄컴 직원들도 SHJ 식구입니다.”

    “리챠드에게 당부를 해 두겠습니다. 실사기간에도 최대한 퀄컴의 편의를 봐 주었습니다. 복지나 급여도 SHJ 기준으로 재산정 작업을 하고 있어 퀄컴직원들도 만족하는 분위기예요.”

    인수를 반대하고 이탈한 기술개발 인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경환은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금이야 별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지만, 올 연말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곤란하지만, 내년을 기준으로 SHJ타운을 조성하는 계획을 수립해 보세요. 우리가 인수 했다고는 하지만, 샌디에이고는 휴스턴에서 너무 멉니다. 그리고 휴스턴이 아니더라도 SHJ타운에 적합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경환은 회사를 분산시킬 생각이 없었다.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 지배구조를 확실히 하기 위해선 해외 합작법인을 제외하고는 한 곳으로 집중할 생각이었다. 희수가 태어나는 올 연말부터 경환이 꿈꾸는 미래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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