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3화 (90/264)

#113

다시 사는 인생 - 113

“SHJ가 확보한 퀄컴의 지분 31%를 매각한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이런 소문 때문에 주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사실 확인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한 번에 털어버린 어윈은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탁자 위에 놓인 물을 급히 마셨지만, 쉽게 진정될 상황이 아니었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어요.”

경환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은 채 린다가 급히 말을 꺼내자 황태수의 표정이 굳어지며 린다를 향해 고성을 질렀다.

“쿡 부사장! 지금까지 논의된 사항을 무시하겠다는 겁니까? 쿡 부사장의 무모한 투자가 우리의 유동자금을 경색시키고 있다는 걸아는 사람이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투자에는 시기가 있습니다.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시지 않으실 텐데요.”

“2년이 넘었습니다. 더 이상 뭘 더 기다려야 된다는 겁니까? 플랜트사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고스란히 휴지조각이 되고 있는데 그걸 더 지켜보란 말입니까?”

회의실은 린다와 황태수 간의 고성이 오가고 있었고 정작 자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뒷방신세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에 어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위기를 봐서는 아직은 황태수와 린다의 파워게임이 진행 중인 거 같았다. 어윈은 경환의 눈치를 살폈지만, 경환은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좁히며 린다와 황태수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황 부사장님이 플랜트사업을 책임 경영하듯 저도 투자 사업을 책임경영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간섭을 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사장님께서 승인하신 사항입니다. 더는 왈가불가 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린다와 황태수의 언쟁이 계속 가운데 어윈은 도저히 둘 사이의 언쟁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다. 린다에 힘들 실어주겠다는 각오로 휴스턴에 왔지만, SHJ의 분위기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윈은 경환이 매각을 승인했다는 황태수의 말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손님을 앞에 두고 다들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두 부사장님에게 많이 실망했습니다. 다들 나가셔서 머리를 식히고 들어오세요.”

두 사람의 언쟁을 참기 힘들었는지 경환은 두 사람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린다와 황태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각 자의 팀원들을 이끌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회의실에 세 사람만 남게 되자 경환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미안합니다.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아까 무슨 질문을 하셨는지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그게, 저, 퀄컴의 지분을 매각한다는 소문이 들려서…….”

어윈은 좀 전의 거친 회의장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말까지 더듬어가며 말을 끝내지 못했다. 린다와 황태수의 팽팽한 기싸움은 근소하게나마 황태수의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어윈은 황태수가 자리를 비운 이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좀 전에 분위기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황 부사장의 의견을 무턱대고 거절할 입장이 아닙니다.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년이면 한국에서 상용화가 시작됩니다. 성공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포기를 하시면 안 됩니다.”

경환이 자신의 말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어윈은 스티브가 준비한 자료를 꺼내놓으며 적극적으로 경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퀄컴의 운명이 이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에 어윈은 마른 입술을 물로 축이며 퀄컴의 비전에 대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이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국을 시작으로 북미와 아시아를 공략하면서 GSM의 독과점을 파고든다면 그 파괴력은 상상 이상일 겁니다.”

어윈의 말을 들으며 성의 없이 보고서를 들춰보던 경환은 별 관심이 없는 듯이 보고서를 덮어버렸다. 어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투자를 결정한 이유 중의 하나이긴 합니다만, CDMA가 세계무대를 주름잡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더군요. 한국의 기술력을 무시한다는 건 아니지만, 한국이란 시장이 너무 작다는 게 맘에 걸립니다. 또한, 재무제표를 조작했다는 소문을 듣고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좋은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경환의 결심을 확인하자 허탈해진 어윈은 스티브가 제안한 최후의 방법을 꺼내려할 때 이다나가 급히 회의실로 들어왔다.

“사장님, 급한 전화입니다. 받으셔야 될 거 같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경환이 이다나를 따라 급히 회의실을 나가자 어윈과 스티브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경환은 이다나가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들고는 린다를 향해 눈짓을 보내고는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SHJ의 매각이 소문을 넘어 현실화 된다면 아메리카뱅크에서도 기간연장을 해 주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당장 다음 달 돌아오는 5백만 불을 상환할 자금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메리카뱅크와는 기간연장에 구두승인을 받았지만, SHJ 지분 매각이라는 변수가 은행을 움직일 것은 뻔 한 이치였기에 기간연장은 어렵다고 보는 게 정수였다. 그렇다고 어윈이 방만한 경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경영자가 아닌 기술자였기에 적자를 무시하고 기술개발에 자금을 쏟아 부었다는 게 유동자금을 급격히 경색시킨 중요한 이유였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해고민하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린다가 들어왔다.

“잠시 제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드릴 말씀도 있고요.”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윈과 스티브는 현재로서는 자신들의 우군인 린다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지분을 매각하게 된다면 퀄컴에게 큰 어려움이 온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셔서 아시겠지만, 황 부사장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SHJ가 빠져 나간다면 저희는 파산을 신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다음 달 만기가 돌아오는 5백만 불을 상환할 자금도 사실 저희에겐 큰 문제입니다.”

린다는 이런 열악한 회사를 왜 이런 연극까지 해 보이며 공을 들이는지 아직도 경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인수를 결정한 상태에선 최선을 다해 퀄컴을 몰아세우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시간을 벌면서 저희 사장님을 설득하려고 했는데 당장 다음 달이라면 저도 손을 들 수밖에 없겠네요.”

린다가 한발 물러날 기색을 보이자 어윈은 화들짝 놀라며 린다의 앞을 가로막았다. 린다마저 빠져버린다면 더 이상 기댈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어윈을 통제 불능으로 빠져들게 했다.

“우리가 파산신청을 하게 되면 SHJ도 손해를 보게 됩니다. SHJ에서 투자한 1억 불이 적은 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흠, 저도 손을 들어야겠군요. 제이콥스 사장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투자한 1억 불은 아깝긴 하지만, 1억 불 때문에 퀄컴에 끌려 다니지는 않을 겁니다.”

린다의 말에 어윈은 아연 질색했다. 도대체 SHJ란 회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라서 1억 불에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는지 어윈의 머리는 복잡해져갔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표현을 한 거뿐입니다. 이 사장님을 설득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SHJ가 우리를 인수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윈의 말이 린다를 놀라게 했다. 아직 미끼를 던지지도 않았는데 어윈의 입에서 인수라는 말이 먼저 나올 줄을 린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고 생각한 린다는 어윈의 의중을 알아야만 했다.

“인수라뇨? 농담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솔직히 SHJ가 우리의 지분을 31%까지 확보한 이유는 인수를 염두에 둔 행동이지 않습니까? 지금 이 자리가 농담할 자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윈은 정색을 하며 마지막 승부수를 린다에게 던졌다. 어윈의 표정에서 농담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한 린다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아 어윈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인수가 저나 제이콥스 사장님에겐 돌파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 SHJ의 경영방침과는 퀄컴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고민이네요.”

린다가 관심을 보이자 어윈은 마지막 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린다의 설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맞지 않으면 맞춰 가면 된다고 봅니다. SHJ의 경영방침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SHJ는 철저히 무차입 경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공개에도 보수적이고요. SHJ는 외부의 경영간섭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퀄컴은 이미 상장을 한 기업이다 보니……, 아쉽네요, 제이콥스 사장님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SHJ가 투자해서 확보된 원천기술과 퀄컴과 합쳐진다면 무한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도 있는데…….”

린다는 미끼를 던지고 어윈을 슬쩍 흘기며 표정을 살폈다. 어윈은 지분을 넘기는 조건으로 경영권을 확보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던 계획이 린다의 선공으로 무산되자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SHJ가 공격적인 투자로 IT 기술을 일부 확보했다는 말이 공학자인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퀄컴은 저와 제 동료들의 피땀이 묻어있는 회사입니다.”

자신의 심정을 이 한마디에 응축해 말을 하고는 어윈은 입을 닫았다.

“압니다. 제가 저희 사장님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퀄컴과 합쳐 시너지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되기 때문입니다. SHJ는 회사의 간부들에게 2%~3%의 스톡옵션에 대한 권리를 제공합니다. 만약 제이콥스 사장님이 인수에 동의를 하신다면 퀄컴의 자산을 인수하면서 2천만 불을 영업권에 대한 보상으로 지급함과 동시에 3%의 스톡옵션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그 대신 상장폐지는 필수입니다.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어윈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린다는 무리하게 어윈을 재촉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린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퀄컴의 파산은 기정사실화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십 년을 공들여 키워온 퀄컴을 자신의 손으로 막을 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인수에 동의를 한다면 동료들과 직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리자면 SHJ는 IT기업을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옥석을 가리겠지만, 대부분 고용승계를 해야겠지요. 또한, 제이콥스 사장님이 책임경영을 맡게 되실 겁니다. 사장님만한 공학자를 찾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문제는 제가 저희 사장님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입니다. 황 부사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 저도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린다의 제안이 보장만 된다면 나쁜 조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혼자 결정할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어윈은 시간을 벌어야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샌디에이고에 있는 동료들이 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린다는 다 잡은 물고기에게 도망칠 기회를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시간이 없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침 황 부사장이 뉴욕으로 내일 출장을 떠납니다. 황 부사장이 돌아오기 전에 저희 사장님을 설득해야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도 자신 없습니다.”

좀 전 회의실의 분위기를 봐서는 황태수가 이 제안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 대해 어윈은 부정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황태수가 매각사실을 언론에 확인시켜 주기라도 한다면 린다의 제안은 무산 된다는 것이 어윈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잠시 스티브와 얘기를 나누어야겠습니다.”

자리를 피해 주기 위해 린다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어윈과 스티브는 심각한 표정으로 린다의 제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린다는 조용히 에릭의 자리를 찾았다.

“에릭, 로펌에서 전달받은 CA(비밀유지약정서)와 LOI(인수의향서)를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M&A 담당 변호사를 급히 들어오라고 하시고요.”

“제이콥스 사장의 동의를 얻어냈습니까?”

린다는 에릭에게 윙크를 보내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린다의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던 어윈이 린다에게 손짓을 보였다.

“동료들과 의견을 나눴습니다. 일부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체로 제 의견에 따르겠다고 하더군요. 보상액을 3천만 불로 올려 주십시오. 떠나는 동료들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퀄컴이란 이름도 가능한 사라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린다는 힘들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쉽게 어윈이 백기투항을 하고 나서자 허탈감마저 들었다. 어윈을 설득하기 위해 밤새며 연구한 방법들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할 정도로 어윈의 결심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제이콥스 사장님 덕분에 제 입장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안심을 할 수 없습니다. 제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기 때문에 문책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진행을 하도록 하죠. 우선 CA와 LOI에 날인을 해 주세요. 그걸 가지고 사장님을 설득하겠습니다.”

같은 시간 경환은 에릭의 보고를 받으며 입을 손으로 막은 채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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