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2화 (89/264)
  • #112

    다시 사는 인생 - 112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저녁은요?”

    “윌리엄 만나서 먹고 들어오는 길이야. 정우는?”

    “종일 노느라 힘들었는지 일찍 잠들었어요.”

    서류가방을 챙겨 받는 수정을 끌어안고 가볍게 입을 맞춘 경환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든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곤하죠? 어서 씻어요.”

    “어, 그래, 알았어. 오랜만에 맥주한잔 할까? 씻고 나올 테니 준비 좀 해줘.”

    알제리 프로젝트에 매진하느라 한 달 가까이 미국을 떠나 있었던 탓에 정우를 키우는 일은 온전히 수정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내조에 힘을 쓰는 수정은 경환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거실에 나온 경환은 수정이 건네주는 맥주를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고는 수정과 함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KBR과 다시 일을 하는 거예요?”

    경환은 회사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수정에게 얘기를 해 주곤 했었다. 또한, 집안일과 정우를 키우는 일에 대해서도 경환은 수정의 얘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었다. 서로의 관심사에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부부 간의 틈이 벌어져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을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환은 공통 관심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KBR에서 준비하는 프로젝트는 이미 다른 회사와 계약을 했거든. 당분간은 경쟁을 해야 될 거야.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일을 하게 될 거 같기도 하고.”

    윌리엄은 알제리 입찰의 후유증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아동건설과 나트람까지 끌어들이는 강수에도 실패로 이어지자 FPSO로 다진 입지가 하루아침에 모래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처세술의 달인이란 사실을 증명하듯 윌리엄은 경환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경환은 당분간 그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일이라는 거 참 어렵네요.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될 수도 있으니. 그래도 자긴 잘 할 거예요.”

    수정은 맥주 캔을 들어 깊게 마시고는 경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경환은 수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수정이 자신의 곁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 위치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내년이면 서른 살인 거 알아요? 시간이 너무 빠른거 같아요.”

    “나이가 뭐가 중요해? 자기는 아직도 날 이렇게 흥분시키는데.”

    경환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수정의 가슴에 가져다댔고 수정은 그런 경환을 제지하지 않았다. 경환은 수정의 입술을 찾아 깊은 입맞춤을 한 후 수정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나 믿고 따라와 주느라 고생했어. 그래서 내가 준비한 게 있는데, 2월 달에 우리 여행가자. 한 달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을 거야.”

    “정말요? 회사 일 바쁘다면서 괜찮겠어요?”

    경환은 결혼 후 제대로 된 여행을 한 적이 없었던 걸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억지로 시간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SHJ의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여행을 다닐 수는 없었다. 내년부터 퀄컴의 인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한국의 IMF 사태와 IT 산업이 급속하게 팽창되는 시기가 도래하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짬을 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경환에겐 가장 중요한 희수를 포함해서.

    “회사 일은 두 부사장들이 처리를 할 거고 중요한 일은 여행지에서 처리가 가능하도록 만들고 있어.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쉬다 오자.”

    “고마워요. 자기도 힘들 텐데 나한테까지 신경을 써줘서.”

    눈물까지 글썽이는 수정을 경환은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주요 간부들이 다 모인 SHJ의 회의실에는 점심을 샌드위치로 해결하며 퀄컴인수에 대한 회의가 길어지고 있었다. 퀄컴은 91년 나스닥에 상장한 기업이어서인지 인수방법에 대한 차이가 확연히 나타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확보한 퀄컴의 지분이 31%입니다. 불확실한 퀄컴의 미래를 감안한다면 자산인수보다는 주식인수를 통해 경영권을 확보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우리가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이 7천만 불이니 20%의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는 건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황태수와 의견을 교환해서인지 코이치는 주식인수를 통한 경영권 확보에만 초점을 두는 의견을 제시하고 나섰다. 경환은 회의가 시작함과 동시에 아무런 발언 없이 간부들의 의견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우리가 퀄컴을 인수하려는 목적이 단순한 경영권 확보에만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우리가 보는 건 퀄컴의 기술력과 라이선스를 바탕으로 한 보장된 미래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자산인수 방식도 검토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경환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고 있는 린다가 코이치의 제안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 황태수가 급히 린다의 말을 받았다.

    “퀄컴의 부채는 4천만 불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이건 공식적인 부채고 우발 부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작년부터 퀄컴은 적자경영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라도 해 온다면 퀄컴을 먹으려다 우리가 자금난에 빠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주식만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하는 방법이 아닌 영업권을 포함한 부채와 자산을 일괄적으로 인수하는 자산인수 방식은 황태수의 말대로 SHJ의 자금운용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이런 문제는 LBO(차입매수)를 통해 해결을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CDMA 상용화 성공을 잘 포장한다면 투자펀드를 움직이는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차입경영을 하지 않는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LBO를 통해 자금을 확보할 수는 있겠지만, 펀드의 간섭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생각해 봐야 됩니다.”

    린다와 황태수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설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SHJ의 자금이 충분하지 않다는 거였다. 두 사람의 의견은 합일점을 보이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자 경환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의 의견은 모두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퀄컴의 미래가 곧 SHJ의 미래하는 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우선 황 부사장님의 의견대로 LBO는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퀄컴이 확장가도를 달린다면 LBO에 참여한 펀드와의 새로운 전쟁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경환은 펀드와의 경영권 다툼에 힘을 소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우리가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은 7천만 불이고 힘들더라도 1억 불까지는 운용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수방식은 쿡 부사장님의 의견대로 자산인수로 방향을 정하겠습니다. 또한, 인수 후 퀄컴의 나스닥 상장을 폐지하겠습니다.”

    “사장님, 상장폐지를 공시하게 된다면 소액주주들의 지분을 모두 사들여야 되는데 자금이 못 버틸 수도 있습니다. 상장폐지는 다시 검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경환의 결정에 놀란 린다가 급히 의견을 제시했지만, 경환의 생각은 확고했다. 퀄컴의 부채는 금융권과 기간연장을 협의하고 라이선스를 포함한 영업권 확보에만 주력한다면 자금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고 경환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매번 공시를 해야 되는 부담도 없고 주주들의 간섭 없이 오로지 기술개발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상장폐지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퀄컴이 나스닥 상장을 통해 인수한 자금이 1천 5백만 불입니다. 이 중에는 우리가 확보한 지분도 있으니 자금에 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봅니다.”

    황태수와 린다는 경환의 의지를 확인하고는 자신들의 의견을 거둬들였다. 경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업인수라는 중요한 목표를 앞에 두고 의견을 통일시켜야 된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러나 경환의 속사정은 SHJ-화성플랜트와 SHJ-소나트락, SHJ-아람코를 합작형태로 지분이 쪼개져 있는 걸 배 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퀄컴의 막대한 이익을 나눠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혹시라도 상장이 필요하게 되더라도 2005년이 지난 뒤 경영에 간섭을 받지 않는 선에서 검토를 할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제이콥스 사장과 협의가 잘 마무리 된다면 로펌과 협의해서 회계법인과 컨설팅 기업을 선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중용한 건 제이콥스 사장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오후에 있을 퀄컴과의 협상을 철저히 준비해 주세요.”

    휴스턴 공항에 도착한 어윈과 스티브는 SHJ가 제공한 승용차를 이용하여 다운타운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어윈의 침울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SHJ가 퀄컴의 보유한 지분을 매도한다는 소문과 함께 한국의 CDMA 상용화는 세계 무선통신 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정보가 터져 나오면서 주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퀄컴이 분식회계를 통해 매출을 과대포장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나스닥 공지에 대한 압박이들어오고 있었다. 어윈은 이 모든 게 린다의 작품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며 SHJ를 설득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스티브, 난 아직도 SHJ가 급하게 지분을 매각하려는지 이해가 잘 안되네.”

    SHJ와의 회의를 위해 서류를 다시 확인하고 있던 스티브는 조용히 서류철을 접었다.

    “리챠드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한국시장이 너무 작다는 것과 한국의 기술력과 영업력으로는 세계시장을 뚫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거겠죠.”

    스티브 또한 착잡한 심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의 상용화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세계시장을 노리기 위해서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고 자금은 한계상황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 스티브의 인상을 필 수 없게 만들었다.

    “후우, 결국 아메리카뱅크에서 부채를 상환하라는 통고해 왔네. 기간연장을 해 주지 않겠다고 하더군. SHJ가 너무 깊게 들어와 있었어.”

    주거래은행이 아메리카뱅크는 SHJ의 지분매각 소문에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SHJ가 기업공개를 한 기업이라면 공시의무를 이용해 소문에 대한 진위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비상장기업인 SHJ에겐 공시의무가 없었다. 아메리카뱅크가 부채상환을 요청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다른 투자자들의 반응은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을 할 수 있었다. SHJ가 5천만 불을 투자하면서도 기껏 6%의 지분과 한국의 로옅티 40%를 요청했을 때만 해도 멍청한 투자기업을 잡았다고 좋아했지만, 퀄컴에 대한 SHJ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질 줄은 알지 못했다.

    “어윈, SHJ가 31%로 2대주주입니다. 막말로 우리가 파산신청을 해 버리면 SHJ도 우리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고요. 그러나…….”

    스티브는 말을 잇지 못했다. 파산신청을 하게 되면 퀄컴이라는 이름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분식회계를 통해 재무제표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형사상 처벌을 감수해야 된다는 사실을 말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산신청은 하책이라고 생각해. SHJ에겐 31%를 포기하더라도 돈을 손해 보는 거 말고는 큰 타격이 없지만, 우리는 SHJ가 포기하는 순간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그러나 좋은 의견이네. 스티브.”

    부채가 전혀 없는 SHJ는 퀄컴이 파산을 한다 하더라도 경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이 두 사람의 선택의 폭을 좁히게 만들고 있었다. 같이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 수는 있겠지만, SHJ가 어떻게 반응할 지는 자신할 수 없어 어윈의 한숨은 깊어져 갔다.

    “어윈, 우리가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면 SHJ로도 우리에게 투자한 8천만 불과 시장에 뿌린 2천만 불은 확실히 아까운 돈일 겁니다. 이럴 바에야 인수합병을 제안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부 우리의 지분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와 책임경영 조건을 내걸어 경영권 위임을 받아낸다면 우리의 자금사정도 풀릴 수 있을 텐데요. 그리고 우리의 상황이 좋아지게 된다면 증자를 통해 지분을 조금씩 확보해 나갈 수도 있고요.”

    부채를 SHJ에 넘기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지분을 확보하자는 스티브의 제안에 어윈은 솔깃해졌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승용차는 SHJ에 도착했고 어윈은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콥스 사장님, 알트만 부사장님. SHJ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사장님. 좋은 일로 찾아 왔어야 하는 데 죄송합니다.”

    경환의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회의장의 모습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린다와 황태수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황태수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별말씀을요. 방금 전까지 퀄컴에 대해 논의를 하느라 분위기가 좀 서먹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무슨 일로 급히 휴스턴에 오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경환의 모습에 어윈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가까스로 분노를 삼킨 어윈은 무덤덤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경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