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1화 (88/264)

#111

다시 사는 인생 - 111

사무실 밖으로 보이는 태평양은 너무도 조용하고 한가하기만 했다. 온화한 날씨와 풍부한 농산물로 인해 캘리포니아의 주요농산물 출하지이면서도 휴양도시인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퀄컴의 사장실에는 초췌한 표정의 어윈이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샌디에이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중 MIT 동창생들과 퀄컴을 설립했을 때만 해도 큰 꿈에 부풀었지만, 퀄컴의 주력제품인 장거리 수송 트럭의 메시지 서비스와 디지털 라디오용 집적회도로 판매는 시간이 지나며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야심작이 CDMA였고 88년 뉴욕에서 있었던 현장테스트가 성공했을 때만 해도 고생의 대가를 받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TDMA 방식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CDMA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기세를 몰아 제2의 디지털표준방식으로 인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투자기업은 많지 않았다. 기술의 우수성에 비해 상용화에 따른 시장성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유일하게 CDMA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의 ETRI와 손을 잡을 수 있었고 92년부터 기술개발을 시작하여 4년 만에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투자와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성과는 크지 않아 보였다. 그동안 SHJ의 투자자금으로 급한 불을 끄고 있었던 퀄컴은, 여전히 자금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풀리지 않는 자금상황을 고민하고 있을 때, 부사장인 스티브 알트만이 어윈을 찾았다.

“스티브, 어서 들어오게. 한국은 준비가 잘 돼가고 있는 건가?”

ETRI와의 협상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을 담당했던 스티브만큼 한국 상황에 정통한 인물은 없었다. 스티브가 한국과의 CDMA 개발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우수한 성능이 입증된 CDMA의 라이선스를 가지고도 투자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회사 문을 닫거나 기술을 헐값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는 어윈에게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일정대로 진행이 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SHJ 직원들이 철수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상용화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철수라니?”

어윈은 충격을 받았다. 8천만 불이나 투자해 지분의 20%를 확보한 SHJ가 상용화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철수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메리카뱅크에서는 SHJ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우리의 지분을 매도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아메리카뱅크나 AT&T도 이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SHJ보다 AT&T가 먼저 자금회수를 할 수도 있다는 분위기입니다.”

오성전자와 한국정부에 투자를 요청했을 정도로 자금상황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 SHJ가 발을 빼게 된다면, 그동안 과감한 SHJ의 투자를 지켜보며 관망하던 다른 투자자들의 동요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주거래은행인 아메리카뱅크와 AT&T를 시작으로 도미노처럼 투자금 회수가 이뤄지게 된다면 퀄컴은 파산으로 직행 할 수밖에 없었다. 어윈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없었다.

“스티브, 슬래이터 부사장에게 같이 가 보세.”

리챠드 슬래이터는 린다와의 통화를 끝내고 이후의 계획을 정리하고 있었다. 퀄컴의 부사장을 맡고 있었지만, 자신은 엄연히 SHJ의 사람이란 것을 상기하고 있던 리챠드는 노크도 없이 어윈과 스티브가 들어오자 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슬래이터 부사장, SHJ 팀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리챠드는 어윈의 방문을 예상이라고 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우선 앉으십시오. 저도 정확한 내용은 모릅니다. 단지 SHJ 본사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리챠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윈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어윈은 이런 리챠드의 모습에서 스티브가 가져온 정보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좋지 못한 분위기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지금 시장에는 SHJ가 퀄컴의 지분을 헐값에 매도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리챠드가 대답을 망설이자 어윈의 또다시 리챠드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리챠드는 결심을 한 듯 어윈을 바라보며 굳게 닫혔던 입을 서서히 열었다.

“저도 퀄컴의 부사장입니다. 이번 조치에 반대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SHJ 본사에서는 린다 쿡과 황태수 부사장이 파워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경환 사장이 린다 쿡을 지지해 주었지만, 이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플랜트의 수입 대부분이 투자에 소모되다 보니 과도한 투자에 황태수가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퀄컴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해 플랜트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어윈도 상황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SHJ는 2억 불 정도의 돈을 투자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투자에 비해 결과물이 저조한 상태였다. 플랜트에서 발생하는 수입이 결과물도 없는 투자에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 황태수의 불만을 키웠다는 것을 어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퀄컴의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어윈은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한국은 이미 기술개발에 성공하고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어요. 왜 하필 지금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어윈은 차마 퀄컴의 파산으로 이끌 이번 조치를 중지해 달라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그건 엔지니어 출신인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했다.

“한국이 상용화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세계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보는 거 같습니다. 한국의 상용화가 조금이라도 이슈화 되는 이때에 지분을 매도한다면 손해를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거 같고요. 린다 쿡이 파워게임에서 밀리고 있어 큰일입니다.”

자신도 같은 이유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어윈은 리챠드의 말에 반박하기 어려웠다. SHJ의 지분 매도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어윈은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다. 10년동안 어려움을 헤치고 지켜 온 회사였기에 어윈은 컬퀌이 무너지는 건 무슨 수를 쓰든지 막아야만 했다.

“린다 쿡에게 힘을 실어 줄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가 알기엔 이경환 사장이 투자에 적극적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이경환 사장이 중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 린다 쿡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은 물밑접촉을 통해 인수자를 찾고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되면 공시를 할 수도 있어요.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어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챠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밑접촉을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투자자들은 동요한다는 사실이 어윈을 사면초가로 만들고 있었다. 어윈의 표정을 살피던 리챠드가 조용히 마지막 말을 꺼냈다.

“제가 퀄컴의 부사장 자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SHJ의 조치를 막지 못한다면 퀄컴의 간판을 내려야 한다는 건 사장님도 아시리라 봅니다. 지금 상황을 역전하기 위해서는 제이콥스 사장님이 휴스턴으로 가셔서 린다 쿡을 지원하는 방법 말고는 없을 거 같습니다.”

허탈감에 빠져 있던 어윈은 리챠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린 어윈은 스티브에게 빠르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스티브, 퀄컴이 소유한 라이선스 목록과 향후 계획, 특히 퀄컴의 비전에 중점을 둬서 자료를 정리하도록 하게. 그리고 가장 빠른 항공편을 수배하고.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서둘러 주게.”

심각한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브는 어윈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고, 한숨을 돌린 리챠드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장님,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이다나, 고마워요.”

이다나가 준비한 자료를 살펴봤지만, 인터넷이 활성화가 되기 전이라서 그런지 경환을 만족시킬 수준을 되지 못했다. 아직은 전화와 팩스, 책자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사가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경환은 좀 더 상세한 자료가 필요했다. 경환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다나가 모를 리 없었다.

“자료가 생각했던 거만큼 많지가 않았습니다. 전문여행사에 컨설팅을 의뢰했으니 디테일한 자료는 나중에 따로 보고드릴게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그리고 당분간은 비밀을 유지해 줘요. 이다나.”

경환은 수정과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무리 회사 일이 바쁘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었다. 린다나 황태수가 알게 된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를 하겠지만, 자신의 영혼보다도 소중한 희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른 최석현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최대한 여행계획을 숨길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여행지에서도 업무연락을 담당할 비서들 이력서에요.”

한 달로 예정한 여행에서 회사 일을 완전히 손 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숙소와 함께 사무실로 단기임차할 생각이었다. 임신으로 인해 이다나의 동행이 불가능하자 수행비서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력서를 살펴보던 경환은 하루나의 이력서가 보이자 급히 이다나를 찾았다.

“이다나, 동경사무소의 야마시타 하루나 이력서가 왜 여기 있죠?”

“제가 의향을 물어봤어요. 본인도 흔쾌히 동의하고 지원을 했고요. 지난번 사장님을 수행한 경험도 있고 해서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루나가 수행비서 역할에 적임자라는 이다나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경환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부친이 투병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부친을 놔두고 미국에 오게 한다는 건 내가 불편해요.”

아무리 하루나가 적임자라고 해도 투병 중인 부친을 홀로 일본에 남겨놓고 자신의 수행비서를 시킬 생각이 없었다.

“부친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본인이 일본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경환은 부친의 죽음에 상심했을 하루나를 떠올리며 일본을 떠나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를 잃고 죄송함에 하루하루 힘들 게 버티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더는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최 부장과 상의해서 결정하세요. 절대 강요하지 마시고요.”

보고를 끝내고 이다나가 자리로 돌아가자, 밖에서 대기하던 린다와 황태수는 연신 웃어가며 경환의 집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두 분이 어쩐 일이십니까? 누가 보면 연애라도 하시는 줄 알겠습니다.”

“사장님! 자꾸 이러시면 성희롱으로 고소할지도 몰라요.”

“하하하, 사과의 의미로 제가 직접 커피를 내려 두 분께 드리겠습니다.”

경환은 서둘러 커피를 내려 두 사람에게 건네주고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알제리 입찰 성공은 비상하려고 준비하는 SHJ에 날개를 달아 주었고 SHJ는 특별한 문제 없이 순항을 계속할 수 있었다.

“소나트락과의 계약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람코와의 합작은 내년 초에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쿠웨이트와 사우디 입찰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생각입니다.”

경환은 플랜트에서 서서히 발을 빼고 있었다. 이제는 SHJ의 경쟁력도 확보되었고 황태수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저는 당분간 투자에 집중을 할 생각입니다. 플랜트 부분은 황 부사장님께서 책임경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타케우치 부장은 요새 어떻습니까?”

경환은 커지는 SHJ를 혼자서 이끌 생각은 없었다. 한국이 IMF 사태를 기준으로 그룹경영을 계획하고 있었던 경환은 아직 성과를 보이지 못하는 린다에 힘을 실어 줄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황태수와 함께 한 축을 맡아야 될 코이치가 경환은 신경 쓰였다. 코이치가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부친과 경쟁을 했다는 자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JSC와 끝을 보려는 지 JSC가 준비 중인 오만과 U.A.E. 프로젝트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습니다.”

“부사장님께서 잘 다독여 주십시오. SHJ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우리가 그룹경영을 선포하게 되면 지금 부사장님의 자리를 맡을 적임자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환의 계획에 황태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경환이 반대한다면 자신이라도 나서서 코이치가 자신의 자리를 맡도록 경환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돼가자 린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이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리챠드와 방금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래요? 어서 말해봐요. 퀄컴이 반응을 보이던가요?”

린다는 왜 이렇게 경환이 퀄컴에 집착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환의 지시에 따라 이번 작전을 진행하긴 했지만, 아직도 퀄컴인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없어지질 않았다.

“제이콥스 사장이 크게 동요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지분매도를 막기 위해 자료를 준비 중이라고 하는데 내일 오후면 휴스턴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경환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하하,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쿡 부사장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내일 좋은 연기력을 발휘해 주세요.”

경환은 내일을 기다리며 더디게 가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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