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10화 (87/264)
  • #110

    다시 사는 인생 - 110

    “네, 네. 수고하셨습니다. 제반 사항은 미쓰비시중공업에 맡기시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전화를 끊은 경환은 조용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입찰에 성공했다는 황태수의 전화에도 경환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제임스, 안 좋은 소식인가요?”

    경환의 어두운 표정을 확인한 린다는 걱정스럽게 경환을 바라보았다.

    “입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출혈이 너무 심했어요.”

    이번 알제리 프로젝트는 JSC가 20억 불로 낙찰받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19억 8천만 불에 입찰을 하고도 JSC의 입찰가에 밀렸다는 것이 경환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정에도 없던 소나트락과의 합작이 없었다면 이번 입찰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는 것이 경환을 고민에 빠지게 하고 있었다.

    “제임스,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파견 나가 있는 폴에게서 소식이 들어왔어요.”

    자신의 기억은 참고자료로 이용하고 SHJ 독자 입찰을 포함한 전반적인 플랜트 사업을 황태수에 일임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린다가 경환의 고민을 깨 주었다. SHJ는 무선통신 전문인력을 채용하여 퀄컴과 함께 기술지원이란 명목하에 ETRI에 파견을 내 보냈다. 무선통신 사업에 단순한 투자자로만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에서였다.

    “무슨 소식입니까?”

    “한국의 ETRI에서 CDMA의 필드테스트를 올해로 끝내고 내년에 본격적인 상용화에 나선다는 소식입니다. 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경환은 잊고 있었던 CDMA 상용화가 내년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에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시원함을 맛보고 있었다.

    “린다, 내년도 한국의 상용화에 퀄컴은 어떻게 반응을 하고 있나요?”

    “큰 기대를 한다고는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불확실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거 같아요. 한국의 시장이 크지 않다는 게 그 이유고요.”

    일본의 PDC 방식도 세계화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 CDMA 상용화에 성공을 한다 하더라도 유럽의 GSM과 북미의 TDMA와의 경쟁은 힘들다는 게 대세였다. 그렇다 보니 SHJ가 8천만 불을 투자했다는 소식은 다른 투자자들의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었다.

    “린다, 퀄컴의 지분은 어디까지 확보를 했나요? 그리고 우리의 여유자금이 어느 정도입니까?”

    내년 말부터는 퀄컴은 날개를 달고 건드릴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다는 생각에 경환은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쪼들리는 자금으로 인수를 하고 싶어도 지분참여에 만족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는 자금운용에 여유가 있었다.

    “직접적인 투자로 20%를 확보했고, 투자업체의 지분을 매입해서 총 31%의 지분을 확보했어요. 투자한 자금도 총 1억 불 이고요. 운영자금을 제외하고 홍콩과 한국의 자금을 포함하면 여유자금은 7천만 불 정도 됩니다.”

    주거래은행과 로펌에서는 기업상장을 제안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SHJ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기업공개를 한다면 여유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겠지만, 그만큼 주주들과 투자업체의 간섭이 많아져 독단적인 투자패턴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경환은 십 년 이내에는 SHJ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현재 퀄컴의 자금 사정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투자한 자금으로 버티고 있지만, 뚜렷한 매출아이템이 없다 보니 기업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시각이 대세입니다.”

    린다는 퀄컴에 다시 연연해 하는 경환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임스, 저는 퀄컴에서 투자한 만큼의 이득을 실현할 수 있을지 항상 걱정이에요.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제이콥스 사장이 오성전자와 한국정부에 투자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해요.”

    경환의 눈이 반짝였다. 한국정부에까지 투자를 요청했다면 자금상황이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었다.

    “린다, 우리가 퀄컴을 인수합시다. 한국이 상용화 서비스를 시작하면 때를 놓칠 수도 있어요. 최대 1억 불 정도로 인수했으면 좋겠는데, 한번 검토해 봐요.”

    경환의 재투자를 막기 위해 한 말이 인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변하자 린다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흉내를 냈다. 단말기는 매출의 5.5%, 시스템은 매출의 6%를 로열티로는 손익계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린다의 한숨은 커져만 갔다.

    “린다가 고민하는 건 잘 압니다. 현재 무선통신 시장은 GSM 방식의 독과점에 맞서 경쟁할 대항마를 찾고 있는 중이에요. 한국이 상용화에 성공한다면 그 여파는 빠르게 퍼져 나갈 겁니다. 이때를 놓치면 퀄컴은 우리가 손대지 못할 정도로 커지게 될 겁니다.”

    린다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경환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린다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경환이 바라보는 퀄컴의 미래의 끝을 보고 싶었다.

    “후우, 제임스를 누가 말리겠어요. 우선 우리가 퀄컴의 지분을 매도한다는 소문을 은밀히 퍼트릴게요. 바닥을 치고 있는 퀄컴이 큰 타격을 입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바로 진행해 주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빠져나가는 린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경환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퀄컴이 99년 한해에 매출 20억 불에 영업이익 9억 불을 달성한다는 사실을 린다가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경환은 10억 불을 투자해서라도 퀄컴만큼은 잡고 싶었다. 퀄컴은 SHJ의 미래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열어주는 보증수표였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이다나가 커피 한잔을 경환에게 건네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경환의 주위를 서성이며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마침 나도 이다나에게 부탁할 게 있으니 잠깐 자리에 앉아봐요.”

    항상 밝은 표정으로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던 이다나 였기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경환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은, 제가 임신을 해서…….”

    미혼이라고 알고 있던 이다나의 임신소식에 경환의 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는 달리 혼전동거가 흉이 되지 않는 미국 사회였기에 이다나의 임신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경환은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그래요? 우선 축하해요. 이다나. 결혼은 언제 하는 건가요?”

    경환의 축하에 이다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이다나를 경환은 재촉하지 않았다.

    “아기 아빠는 임신사실을 몰라요. 저와 헤어진 후 한달전에 뉴욕에 일자리가 생겨 떠났어요.”

    경환은 급히 최석현을 찾았지만, 최석현은 시간이 흐른 뒤 헐떡거리며 들어왔다.

    “최 부장님, 아내하고 같이 일한다고 너무 티내는 거 아닙니까? 알제리에도 인원을 파견해야 되는데 부장님을 보내야 될지 고민하게 만드시네요.”

    “헉!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다. 그 대신 가족동반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러나 제 충성심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라이스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케이티는 기업체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SHJ 투자팀에 들어와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있었다. 자신의 농담을 농담으로 되받아치는 최석현을 경환은 못 당하겠다며 손사래를 친 후 이다나의 임신소식을 알렸다.

    “최 부장님, 이다나가 임신을 했으니 기쁜 소식을 직원들한테 알려 주시고, 출산 때까지 지원을 해 주세요.”

    최석현은 이다나에 악수를 청하며 축하를 해 주었고, 급히 경환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제야 안심을 한 이다나는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사실 한국기업들은 임신한 비서를 고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고마워요.”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누구한테 들은 거에요? 그런 걱정하지 말고 맘 편히 가져요.”

    혼자서 고민하며 힘들어했을 이다나를 경환은 애틋하게 바라보며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분간 사장님을 수행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수행비서를 임시직으로 채용을 했으면 합니다.”

    “이다가가 검토해서 보고해 주세요. 이다나 문제가 해결됐으니 내 문제를 좀 해결해야 되지 않겠어요?”

    서둘러 퇴근한 경환은 한인식당인 고려원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반갑지 않은 전화를 받았지만, 그의 요청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자주 찾던 식당이어서인지 식당 사장은 경환을 알아보고는 지정된 방으로 안내했다.

    “일찍 와 계셨네요. 청와대에 계실 분이 휴스턴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출장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휴스턴까지 와서 이 사장님을 안 만나고 가면 후회할 거 같아서요.”

    미리 도착해 있던 박재윤 경제수석과 인사를 나눈 경환은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 언짢았지만, 무슨 이유로 휴스턴을 찾아왔는지를 먼저 알아야만 했다.

    “이 사장님과 소주한잔 하고 싶었습니다.”

    경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박재윤은 소주병을 들어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부었다. 경환은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쓴 소주를 입에 넘겼다.

    “우선 한국의 CDMA 상용화를 축하 드립니다. 서울과 대전의 필드테스트를 끝내고 내년 초에 상용화를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는 제가 이 사장님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퀄컴의 지분을 확보하셨고 오성전자의 북미지역 독점권에 단말기 로열티 일부를 오성전자의 주식으로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SHJ도 이미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불확실한 곳에 투자를 했다고 제가 놀림을 당한다는 것도 잘 아시겠군요.”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날 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경환은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소주 한잔을 마시고는 박재윤을 향해 말을 건넸다.

    “저는 한국정부와 악연이 깊은 사람입니다. 좋지 못한 기억이 많다 보니 박 수석님의 방문을 환영할 수 만은 없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개인적인 자격으로 이 사장님을 뵈러 나온 겁니다. 사실은 경제부에서 반대하고는 있지만, 고평가된 원화를 절하하려고 대통령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해서 단기외채의 기간연장을 추진하고 있지만, 쉽지 않더군요.”

    박재윤의 말에 경환은 쉽게 답변을 줄 수 없었다. 박재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타격은 받겠지만, IMF 체제로 들어가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썩어빠진 관료들과 정치인들로 인해 박재윤의 계획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경환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무역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텐데 원화 절하가 현실적으로 쉽겠습니까? 경제부 관료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박재윤은 말없이 소주를 마셨고 경환은 소주병을 들어 빈 잔을 빠르게 채웠다. 원화가 고평가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을 할 수 없었지만,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원화 절하는 물가 상승이라는 딜레마에 빠져들기 때문에 박재윤의 계획을 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대통령 방미에 맞춰 이 사장님을 워싱턴으로 초청한 이유도 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경환은 더 이상 한국정부와 엮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개인의 희생만 강요하는 한국정부보다는 가족과 직원들이 경환에게는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오란다고 넙죽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제 기업이 더 소중합니다.”

    안하무인으로 경환을 불편하게 했던 휴스턴 영사의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 사장님께서는 원화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어떤 대응을 정부가 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박 수석님, 이 문제는 경제전문가이신 수석님이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SHJ-화성플랜트와 SHJ 홍콩은 내년부터 달러를 집중적으로 보유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제 예상이 틀리게 된다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큰돈을 벌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경환은 박재윤의 재촉에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박재윤이 아무리 뛰어다닌다 해도 십 년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경제관료들을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게 정답이었다. 경환의 기억에도 IMF가 터지기 전, 여러 경제학자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비롯해 경제관료들은 무사안일에 빠져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해 버렸다. 박재윤의 끈질긴 재촉에 경환은 닫았던 입을 열었다.

    “내년부터 서서히 기업들이 자금경색이 시작 될 겁니다. 내년 말부터는 중견기업들이 쓰러질 테고요. 헤지펀드의 공격은 그때를 맞춰 시작될 거라고 보고있습니다. 대비를 하고 안 하고는 정부의 몫이고, 저는 제 회사를 위해 준비를 할 생각입니다.”

    97년부터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기아자동차, 삼미, 진로, 대농 등 중견기업들이 줄줄히 쓰러지면서 한국은 헤지펀드의 공격에 취약해 질 수밖에 없었다. 박재윤은 경환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흘러가는 분위기가 좋지 못 하다는 생각에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남아있는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IMF는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고 경환은 더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고통받을 국민들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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