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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09화 (8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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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09

    입찰이 진행되는 소나트락에는 입찰에 참여하는 업체들로 오전부터 북적거리고 있었다. 입찰은 오후부터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경쟁업체들의 정보를 하나라도 입수하기 위해 소리 없는 전쟁은 이미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JSC나 미쓰비시중공업 직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회장님,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입찰상황은 제가 지켜볼 테니 좀 쉬십시오.”

    “괜찮다. 미쓰비시중공업도 이 호텔에 있다고 했지?”

    JSC의 사활이 걸린 이번 입찰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케이스케는 장시간의 비행시간도 감수한 채 노쇠한 몸을 이끌고 알제에 도착했다. JSC와 미쓰비시중공업은 같은 힐튼 호텔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료스케는 회사의 경영권을 탐낼 뿐이지 자신의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조심을 하고 있어서 마주치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동건설이 협조만 해 주었다면 차이를 크게 벌릴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쉽습니다.”

    입찰 막판까지 아동건설을 설득에 최선을 다했지만, 아동건설은 리비아정부의 비준을 받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JSC와 KBR의 요청을 거절하고야 말았다.

    “아동건설도 SHJ의 눈치를 보는 거겠지. 아마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게다.”

    케이스케 또한, 아동건설을 설득하지 못한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동 그룹의 회장이었다 하더라도 JSC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래관계가 불확실한 KBR과 JSC를 위해 해외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SHJ의 눈 밖에 나는 짓을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입찰가를 따라오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은 SHJ란 이점이 있다. 소나트락과의 합작이 이번 입찰에 어떤 작용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료스케의 신중하지 못한 태도가 눈에 거슬렸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의 경우 자체 비용이 높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대후건설이 시공을 맡았다 하더라도 20억 불 이하로는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을 케이스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케이스케는 경환과 코이치가 신경 쓰이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라면 자신에 맞설 전략을 수립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조용한 것이 케이스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가셔야 될 시간입니다.”

    비서가 알리는 소리에 케이스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쓰비시중공업의 지휘부가 자리 잡고 있는 힐튼 호텔의 스위트룸에도 긴장감이 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의 수많은 노력이 담긴 입찰서류를 밀봉하는 아키라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우린 최선을 다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황태수는 아키라의 긴장감을 풀어주려 했지만, 정작 황태수도 아키라와 마찬가지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입찰의 성공 여부에 따라 내년 쿠웨이트와 사우디의 대형 프로젝트도 영향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SHJ는 과감히 마진을 포기하는 강수를 두고 있었지만, 현지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결코 미쓰비시중공업에 유리하게 판이 짜여가고 있지는 않았다.

    “JSC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군요. 알제리의 정부 관료들이 JSC를 밀고 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있으니 솔직히 불안합니다.”

    황태수도 이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TOTAL의 뱅상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더 이상 입찰가를 낮출 수는 없었다. 그만큼 미쓰비시중공업의 고비용은 아웃소싱을 통해 원가를 낮추는 전략을 사용한 JSC를 이기기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지금 준비한 입찰가격도 적자를 겨우 모면하는 정도의 금액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입찰금액을 낮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는 가산점을 가지고 있으니 지켜봅시다. TOTAL이 물밑에서 우리를 지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황태수는 뱅상과의 협상을 통해 TOTAL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TOTAL에서는 아람코와의 합작에 지분참여를 요청했고 황태수는 이번 입찰에 성공한다면 10% 선에서 TOTAL의 지분 참여를 보장했다. 아직 아람코와의 협상은 진행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소나트락과의 본계약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람코의 재촉은 심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사장님께서 아동건설이 리비아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으신 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만약 실패했다면 아무리 가산점을 얻고 있다고는 하지만, 금액차이를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코이치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떡였다. 경환이 아동건설을 막지 못했다면 이번 입찰은 어떤 수를 쓴다 해도 역전을 시키기에는 무리란 것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황태수는 부친과 싸워야 되는 코이치의 어깨를 두드려 무언의 위로를 건넸다.

    “타케우치 부장, 자네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을 굳게 먹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사장님. 저는 SHJ 사람입니다.”

    코이치는 표정의 변화 없이 황태수의 말을 덤덤히 받아넘겼다. 두 사람의 주위에서 초조함으로 안절부절못하던 아키라는 급히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었다.

    “차량이 준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같이 나가시죠.”

    서두르는 아키라의 뒤를 따라 내려온 로비에서 코이치는 자신의 부친인 케이스케와 마주치자 입술을 깨물으며 천천히 케이스케를 향해 걸어가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건강에 항상 유의하십시오.”

    케이스케가 노쇠한 몸을 이끌고 알제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코이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료스케가 달려들어 코이치의 멱살을 잡아챘다.

    “네놈이 무슨 염치가 있다고 낯짝을 들이밀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보구나!”

    료스케의 느닷없는 행동에 황태수가 료스케를 제지하고 나섰지만, 코이치의 멱살을 잡은 팔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놈! 그 손 놓지 못하겠느냐!”

    케이스케의 지팡이가 료스케의 등을 내리치자 그제야 멱살을 푼 료스케는 황당한 얼굴로 자신의 부친을 바라보았다. 첩의 자식을 감싸고 도는 부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료스케는 케이스케의 시선을 외면하며 준비된 차량에 올라타 버렸다.

    “괜찮으냐? 난 너를 원망할 수가 없구나. 그래, JSC에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냐?”

    코이치는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케이스케스를 바라봤다. 부친에 대한 애증을 마음에서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었지만, JSC 만큼은 이미 지워버렸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JSC와의 인연은 제가 일본을 떠날 때 정리를 했습니다.”

    “그랬구나. 내 죽어서도 너에 대한 미안함에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할 게야. 네 마음에서 JSC를 지웠다면 내 더는 강요를 하지 않으마. 잘 살아야 된다.”

    코이치의 어깨에 손을 한번 얹고는 케이스케는 망설임 없이 뒤를 돌려 로비 밖을 나섰다. 코이치는 심호흡을 하며 웃음을 보이며 황태수와 함께 승용차에 올랐다.

    “왜 이렇게 결과발표가 늦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정된 결과 발표시간을 넘긴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발표할 기색은 보이지 않자 아키라는 초조한 마음에 입찰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모이 전무님, 결과발표가 늦어진다는 것이 우리에게 불리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JSC와의 금액차이가 크지 않다는 걸 방증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영 진정이 되질 않네요.”

    아키라는 여전히 서성거리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때 소나트락의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모든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심사를 맡은 위원장이 아닌 직원이 단상에 올라서자 입찰장에는 묘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JSC-KBR 관계자는 저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짧은 말을 끝으로 그 직원은 빠르게 사라졌고 JSC 입찰팀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케이스케를 부축한 료스케는 소나트락의 직원을 따라 입찰장을 나서며 코이치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코이치는 그 웃음을 회피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료스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섰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JSC가 1순위라도 된다는 말 아닙니까?”

    울상을 한 아키라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리자 황태수는 그런 아키라를 제지하고나섰다.

    “결과 발표를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직원들도 있으니 좀 자중하십시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아키라는 황태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임 사장을 배신하면서까지 SHJ와의 합작을 추진하면서 준비한 이번 입찰이 실패한다면 자신의 자리도 함께 없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빛을 한 아키라가 허공만 바라보고 있자 황태수가 조용히 코이치를 찾았다.

    “자네가 나서서 팀원들이 동요하지 않게 다독여 보게. 결과가 발표된 것도 아니니 아직은 지켜봐야 될 거야.”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허탈함에 빠져 있는 아키라를 대신해 코이치가 나서자 동요하던 분위기는 빠르게 가라앉았지만, 반 시간이 넘도록 소나트락과 JSC의 면담을 계속되고 있었다. 황태수는 두 업체의 면담이 길어지자 주먹 쥔 두 손에 흥건히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의기양양한 료스케가 케이스케를 부축하며 입찰장에 들어오고 소나트락의 직원이 단상에 오르자 장내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미쓰비시중공업-SHJ 관계자는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황태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정신을 못 차리는 아키라를 일으켜 직원의 뒤를 따라 나섰다. 소나트락의 접견실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여러 심사위원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SHJ가 합작공장을 알제리에 건설해 현지에서 플랜트를 제작한다는 것에 어느 정도의 가산점을 줘야 될 지 합의를 못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침 JSC도 일반 철 구조물의 30%가량의 물량을 알제리에서 제작하겠다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태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미 입찰금액으로는 JSC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이 상황을 뒤집을 카드가 필요했지만, 대안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권한을 경환으로부터 위임받았지만, 무턱대고 소나트락에 퍼줄 생각은 없었다. 아키라는 사정하는 눈빛으로 황태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SHJ는 따로 드릴 제안이 없습니다.”

    믿었던 황태수의 입에서 다른 제안이 없다는 말이 나오자 아키라는 거의 울 기세로 황태수를 바라봤지만, 황태수는 결심을 굳힌 듯 담담하게 심사위원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럼 SHJ가 추진하고 있는 플랜트 공장은 취소한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심사위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중간에 자리 잡고 있던 모하메드가 노기를 띤 목소리로 황태수를 몰아세웠지만, 황태수는 그런 모하메드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알제리 플랜트 공장 설립은 이번 입찰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이미 세부적인 내용이 확정되고 본계약 체결만 남지 않았습니까? 인도의 기술력이 한국과 일본을 따라올 수는 없습니다.”

    입찰과는 상관없이 합작은 진행된다는 답변에 머쓱해진 모하메드는 노기를 풀고 황태수에게 자신이 직접 제안을 하고 나섰다.

    “합작법인과 관련해서 인사와 재무 둘 중 하나 정도는 소나트락에 위임해 줄 수 없겠습니까? 여기 있는 심사위원들을 설득하려면 우리 소나트락도 명분이 필요합니다.”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를 황태수는 억지로 참고 있었다. 인사와 재무 어느 하나라도 소나트락에 넘어간다면 공장이 궤도에 올랐을 때 소나트락의 전횡에서 SHJ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입찰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모하메드의 제안은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불가합니다. 이미 합의된 내용을 번복하신다면 이번 합작은 성사되지 어렵습니다. 그러나 특수플랜트의 기술이전 시기를 앞당길 수는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제가 약속할 수 있는 마지막 제안입니다.”

    소나트락과의 마지막 면담을 끝내고 입찰장으로 돌아온 황태수는 말이 없었다. 아키라는 그런 황태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SHJ에서 양보를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 입찰실패는 SHJ의 비협조 때문입니다.”

    입찰 실패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아키라의 원망에도 황태수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미쓰비시중공업의 내분을 바라보는 료스케는 승리를 확신하며 JSC의 경영권을 다시 잡을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열리고 심사위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위원장이 입찰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단상 위에 올랐다.

    “입찰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입찰금액을 발표하겠습니다. JSC J.V 19억 6천 5백만 불, 미쓰비시중공업 J.V 19억 8천만 불, …….”

    입찰금액이 발표되자 JSC 진영에는 환호성이 울렸고 상대적으로 미쓰비시중공업 입찰 T.F팀들은 침통함에 고개를 숙였다. 위원장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우선 협상대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제1 협상 대상업체는 미쓰비시중공업 J.V, 제2 협상 대상업체는 JSC J.V입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환호성을 울리던 JSC 직원들과 침통해 하던 미쓰비시중공업 직원들은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을 하지 못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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