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08화 (85/264)

#108

다시 사는 인생 - 108

예상대로 미쓰비시중공업과 JSC는 무리 없이 PQ를 통과하고 본격적으로 입찰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나마 JSC의 중국산 파이프를 수입을 막음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의 차이를 줄였다고는 하지만, KBR의 지원을 받는 JSC는 케이스케가 전면에 나서면서 빠르게 안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경환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최종회의를 주관하는 동경사무소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JSC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는 거 같습니다.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JSC의 보안이 상당히 강화되었습니다. 내부정보를 입수하는 게 어려운 상황입니다. 죄송합니다.”

내부정보 입수를 주관하고 있는 마사토는 막힌 정보루트로 인해 JSC의 정보를 입수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SHJ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입찰T.F팀 또한, 보안이 강화된 외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고 JSC 역시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경환은 마사토를 탓할 수는 없었다. 입찰이 2주를 남겨 놓은 상황에서 자그마한 정보라도 빠져나가게 하지 않기 위해 미쓰비시중공업이나 JSC는 치열한 정보전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타케우치 회장이라도 보안부터 신경을 썼을 겁니다. 비용분석이 끝났을 텐데 미쓰비시중공업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이번 입찰을 총괄하는 코이치는 서류를 펼쳐 경환의 질문에 답변을 시작했다.

“나쁘진 않습니다. 우리와 대후건설이 이익을 포기함에 따라 19억 8천만 불까지 입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JSC는 중국의 파이프가 수입금지 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용이 상승한 관계로 우리와의 차이는 많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차이를 많이 줄였을 뿐이지 아직은 JSC의 입찰가를 역전한 상황이 아니란 코이치의 보고가 회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합작공장 건설에 대한 가산점을 받는다 하더라도 입찰 결과를 아직은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동건설이 우리의 아킬레스건이 될 줄을 몰랐습니다. 혹시라도 알제리와 지척인 리비아에서 장비나 대형 파이프가 제작 공급된다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도 심각하게 검토를 해야 될 거 같습니다.”

성수대교 붕괴를 막기 위해 아동건설과 KBR의 합작을 추진했던 경환은 아동건설이 자신의 발목을 잡자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다년간의 리바아 공사를 진행하면서 초대형 파이프제작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아동건설이 일부 제작설비를 알제리로 돌릴 수도 있다는 황태수의 지적에 경환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

“현재 우리가 JSC보다 앞선 것은 소나트락과 플랜트 합작공장을 설립한다는 거 말고는 딱히 없어 보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황 부사장님이 지적한 아동건설 문제는 심각하게 대응방안을 연구해 봐야 될 거 같네요.”

경환은 이 말을 끝으로 깊은 장고에 빠져 들게 되었다. JSC를 인수할 목적으로 참여한 이번 프로젝트가 큰 이득도 없이 점점 늪으로 빠져드는 상황이 경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발을 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환은 결정을 해야만 했다.

“타케우치 부장님은 일본에서 입찰을 총괄하시면서 미쓰비시중공업과 대후건설을 컨트롤 해 주시고, 황 부사장님께서는 TOTAL과 알제리 합작건에 대해 본계약을 추진해 주십시오.”

“입찰에 성공한 것도 아닌데 본계약을 추진해도 되겠습니까? 이번 MOU 체결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않았습니까?”

본계약을 서두르는 경환을 황태수가 제지하고 나섰다. 그동안 SHJ의 합작제의에 지분배분으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던 아람코는 SHJ가 소나트락과 MOU를 체결하자 황급히 자세를 바꿔 합작공장 설립을 독촉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경환도 아람코를 염두에 두고 MOU를 체결했지만, 이번 입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소나트락에 확실한 의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사우다와 알제리 두 곳에 공장을 설립한다는 게 무리일 수도 있지만, JSC의 북아프리카 진출을 막기 위해서는 알제리가 중요한 키 포인트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행해 주세요. 입찰이 끝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직접 소나트락과 접촉을 할 수 없으니 TOTAL을 우리의 입 역할을 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흠, 알겠습니다. 비행편이 준비되면 박화수 사장을 대동해서 바로 출국을 하겠습니다.”

경환의 결심을 확인한 황태수는 자신의 의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입찰을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경환의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자신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오늘 한국에 잠시 들른 후에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동건설을 한번 만나봐야 할 거 같습니다.”

회의는 그것으로 마치게 되었고 회의에 참석했던 하루나는 미국으로 예약된 경환의 항공편을 한국으로 바꾸기 위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경 외곽의 위치한 케이스케 개인별장에는 JSC와 KBR의 직원들이 외부와 단절된 채 알제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케이스케는 며칠째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은 채 이번 입찰을 직접 지휘하며 보안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카이토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는 게냐?”

케이스케가 JSC의 경영 전반에 다서 경영권을 회수함에 따라 료스케의 영향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한, 자신을 지지하던 일부 주주나 경영진들도 사태를 관망하는 태도로 돌아서게 되어 료스케를 더욱 힘들게 했지만, 지금은 자중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케이스케가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혹시라도 입찰에 실패하더라도 책임소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료스케를 위로하고 있었다.

“KBR과 함께 아동건설을 설득하고 있지만, 리비아정부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들어 난색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흠, 아동건설도 SHJ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로군. SHJ가 KBR과 결별했다고는 하지만, SHJ의 영향력이 더 커졌으니 아동건설도 주판을 튕길 수밖에 없겠지.”

SHJ가 중국산 파이프의 수입을 원천봉쇄하고 나아가 소나트락과 합작을 체결하자 케이스케는 아동건설의 리비아 현장에 도움을 받아 비용차이를 더 벌리려고 했지만, 아동건설은 쉽게 자신의 뜻에 따라오지 않고 있었다.

“아동건설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미쓰비시중공업은 비용차이를 줄이기 힘들 겁니다. 분석팀의 보고로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입찰가를 22억 불에서 최소 21억 불로 보고 있습니다. 21억 불이라면 적자입찰이기 때문에 우리를 따라오지는 못할 겁니다.”

케이스케는 료스케의 답변에 인상을 구기며 료스케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 이경환이란 놈은 네 머리꼭대기에서 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네놈이 생각하는 걸 이경환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아무리 이경환이란 놈이 대단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케이스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경환의 말대로 JSC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란 것은 JSC를 더욱 타성에 젖게 만들어 경쟁력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료스케를 바라보는 케이스케의 눈에는 침몰하는 JSC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이번만큼 코이치를 SHJ에 보낸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코이치였다면 지금 이 상황을 반전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HJ는 소나트락을 움직일 TOTAL이라는 카드를 이미 손에 쥐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동안 우리가 관리한 알제리 관료들을 최대한 움직이도록 해라.”

료스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케이스케의 지시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케이스케의 장남만 아니었다면 사장이라는 자리에서 예전에 해고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서류를 챙겨 방을 나서는 료스케는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경환을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이경환 사장은 도착했습니까? 올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서울역을 지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회장님.”

최준석은 느긋한 마음으로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SHJ를 통해 KBR이라는 거대기업과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지금은 SHJ의 반대에 서 있었다. 최준석은 SHJ와 KBR이라는 꽃놀이 패를 양손에 올려놓고 저울질을 하는 이 상황이 흐뭇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SHJ가 KBR과 결별을 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플랜트시장에서의 영향력이나 명성은 예전보다 더 커진 상태입니다. 이경환 사장이 이번 일로 뒤끝을 보인다면 우리도 입장이 난처해 질 수도 있습니다.”

“줄타기를 잘해야 되겠지요. 기업 간의 경쟁에서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SHJ가 무슨 떡을 내어 놓을지 지켜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경환 사장도 이번 입찰이 쉽지 않다고 보고 있으니 부랴부랴 우리를 찾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최준석과 정기명이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와 이경환이 회장집무실에 들어왔다.

“어이구, 이 사장님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입찰준비로 바쁘실 텐데 한국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최준석의 비아냥에 속이 뒤집히고 있었지만, 경환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시겠지만, 알제리 프로젝트가 만만치 않아 회장님의 고견을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대 놓고 입찰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밝힌 경환의 말에 최준석은 알고 있다는 표정을 보이며 경환에 자리를 청했다. 여비서가 놓아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경환은 한껏 들떠있는 최준석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성수대교로 인해 아동건설의 이미지는 전보다 좋아졌지만, 경환은 생색을 낼 수도 없었다.

“나이지리아 현장은 잘 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아시겠지만, SHJ는 사우디와 쿠웨이트에서도 KBR과 경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회장님이 보기에는 누가 경쟁에서 이길 거 같습니까? 아, 그리고 이번 알제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KBR의 차기 공사에 대한 시공을 약속받으셨겠지요?”

경환의 질문의 속뜻을 알아차린 최준석은 웃던 얼굴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SHJ가 KENTZ와 지멘스와 컨설팅계약을 했고 KBR과 경쟁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또한, 이번 입찰에 참여한다는 생각에 들떠 KBR의 요청만 받아들였을 뿐 KBR의 차기 공사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최준석은 정기명을 위아래로 훑어내리고는 다시 표정을 바로 잡았다.

“하하하, 그럼요. KBR을 연결해 준 SHJ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SHJ와 KBR이 경쟁을 한다는 게 참 불편합니다. 그러나 KBR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는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동건설이 KBR의 요청에 이번 입찰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입찰을 준비하면서 사실 아동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JSC와 합작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최준석의 아픈 곳을 한번 찌른 경환은 당근을 주기 전에 밑밥을 던졌다. 그러나 최준석은 쉽게 걸려들지 않고 있었다. 경환보다 성격 급한 최준석은 고개를 한번 끄떡인 후 말을 돌리지 않았다.

“SHJ는 우리가 리비아 현장에서 JSC를 지원하는 것을 꺼리고 있지 않나요? 아직 JSC에 확답을 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리비아정부를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최준석의 도발에 경환은 가볍게 웃음을 보였다.

“아동건설이 리비아의 설비를 이용한다면 이번 입찰에 저도 큰 타격을 받겠지요. 그러나 이번 입찰은 제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에 참여를 하는 거뿐이지 SHJ의 행보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아동건설은 SHJ와 영영 다른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최준석의 얼굴은 똥을 씹은 것처럼 구겨지고 있었다. 속으로는 괘씸한 경환의 행태에 맞대응을 하고 싶었지만, KBR의 차기 공사에 참여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SHJ까지 놓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준석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을 때 경환이 살길을 열어 주었다.

“우리와의 경쟁까지 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JSC와 합작을 하셨으니 우리와의 경쟁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단지, 리비아 설비를 움직이지 않도록 해 주신다면 삼 년 후 아동엔지니어링에 SHJ 자금을 대대적으로 투자하겠습니다.”

최준석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리비아공사를 제외하고는 다른 수입원이 없는 상태에서 아동건설의 재무제표는 심각할 정도로 하향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동엔지니어링에 국한했다고는 하지만, SHJ의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숨통이 트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최준석은 경환의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아동그룹이 공중분해 된다는 사실은 경환밖에는 알지 못했다. 경환과 최준석은 동상이몽을 꿈꾸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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