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04화 (81/264)
  • #104

    다시 사는 인생 - 104

    “야마시타 군, 준비는 다 되었겠죠?”

    “네, 소장님. 사장님께서 도착하시면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SHJ 동경사무소는 경환의 방문을 맞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환의 방문으로 미쓰비시중공업에 파견 나온 직원들까지 동경사무소에 모여있었기 때문에 사무소는 앉아 있을 자리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마사토는 1박 2일의 짧은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고, 하루나는 불안감과 기대감으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조용히 열리는 것을 바라보던 마사토가 급히 앞으로 튀어 나갔다.

    “사장님, 동경사무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카다 소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타케우치 부장님을 통해 동경사무소가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경환은 먼저 손을 마사토에 건넸고 마사토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두 손으로 경환의 손을 잡았다. 경환은 마사토의 소개에 동경사무소 직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고 하루나는 자신의 차례가 다가옴에 따라 고동치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장님, 야마시타 하루나 군입니다. 본사 파견인원들의 지원업무와 본사 연락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마사토의 소개에 경환은 악수를 청했고, 하루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경환이 내민 손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짙은 화장에 기모노를 입고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경환은 달라진 하루나의 모습에 엷은 미소를 건넸다.

    “미스 야마시타, 오카다 소장님의 칭찬이 대단하더군요. SHJ는 여성에게도 능력에 맞는 기회를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하루나는 왜 더 좋은 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후회를 해 봤지만, 경환은 하루나를 지나쳐 버렸다. 경환이 마사토와 팀장들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하루나는 경환과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워드 팀장님, 현재 T.F팀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쓰비시중공업의 설계기술을 습득하며 원가분석을 담당하고 있던 클린트 하워드는 경환의 질문에 정리된 보고서를 건넸다.

    “미쓰비시중공업의 설계기술은 나무랄 데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문제는 미쓰비시중공업이 아웃소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관계로 원가를 줄일 수 있는 폭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상태로라면 우리의 이익을 포기한다 해도 21억 불이 한계라고 봅니다.”

    클린트의 답변에 경환과 코이치의 표정은 급히 굳어져 갔다. 20억 불로도 수주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21억 불이 한계라면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저와 타케우치 부장이 급히 일본에 오게 된 이유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정보로는 JSC가 철 구조물의 중국생산에 더해 중대형 파이프까지 수입을 한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우리가 예상한 20억 불도 안심할 수치는 아닙니다.”

    코이치는 JSC의 중국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북경사무소의 김창동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김창동은 화동과 경무부의 끈을 이용하여 JSC의 동향을 파악하던 중에 상해의 보강이 JSC에 중대형 파이프 공급계약을 체결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코이치가 제안한 해외사무소 확대계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늘 있을 미쓰비시중공업과의 회의가 어떤 결과를 보이느냐에 따라 대응전략을 수정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현행대로 업무를 계속해 주십시오.”

    짧은 회의를 마친 후 경환은 쉽지 않아 보이는 담판을 짓기 위해 서둘러 미쓰비시중공업으로 향했다.

    경환이 나리타공항에 도착할 무렵 료스케는 상해 홍챠오공항에 도착해 보강에서 보낸 승용차에 타고 있었다. 95년의 상해는 국제금융도시로 부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경환이 제시한 SOC 확대와 물류거점 확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상해는 푸동 지역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상해 항과 푸동 공항을 새로 건설하는 중이었지만, 상해가 국제무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료스케가 상해의 빠른 발전에 놀라워하고 있을 때 승용차는 보강그룹에 도착해 있었다.

    “타케우치 사장님, 보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왕 총경리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쩡바오가 료스케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처음 보는 인물이 료스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번 JSC와의 거래를 대외경제무역부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분은 왕샹첸 부부장입니다.”

    부부장으로 승진한 왕샹첸이 료스케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료스케는 차관급에 해당하는 부부장이 이 자리에 나왔다는 사실에 벌려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당시 중국은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개인적인 친분만 있다면 차관급이 아니라 시장이나 당서기도 쉽게 부를 수 있던 시기였다. 90년대 초반 이런 중국기업들의 접대방식에 현혹되어 가산을 탕진한 한국기업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을 정도였다.

    “이번 JSC와 보강의 합작을 우리 경무부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JSC의 많은 투자가 중국에 집중되기를 바랍니다.”

    “하하하, 왕 부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번 입찰에 성공하고 나서 대대적인 투자계획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왕샹첸의 참석은 료스케로 하여금 일본정부의 고위직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아시겠지만, 이번 입찰은 우리 JSC나 보강 그룹에도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아시리라 봅니다. 철저한 생산관리를 부탁 드리러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하하하, 예전의 중국이 아닙니다. JSC에 공급하는 제품의 질을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왕쩡바오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료스케는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수많은 변명으로 일관하는 중국인 특유의 성격을 료스케는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경쟁업체인 미쓰비시중공업이 SHJ와 합작을 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경환 사장을 아십니까?”

    왕쩡바오와 료스케의 대화를 지켜보던 왕샹첸의 느닷없는 질문에 료스케는 순간 당황했다. SHJ는 미국기업이고 사장은 한국인이었는데 경무부 부부장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 부부장님께서 이경환 사장을 어떻게 아십니까? 사실 미쓰비시중공업은 JSC의 경쟁상대는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SHJ의 이경환 사장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이번 파이프공급계약을 체결한 이유도 SHJ의 대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이뤄진 조치입니다.”

    왕샹첸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료스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부부장으로 승진한 이후 끊임없이 SHJ의 투자를 요청했지만, 경환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투자를 꺼리고 있었다. JSC가 SHJ와 경쟁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장성궈를 통해 SHJ에 정보를 흘리도록 했지만, 경환은 전혀 꿈쩍이지 않았다. 이런 경환의 태도에 왕샹첸의 심기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 경환을 한번은 눌러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상해로 날라왔다.

    “우리 경무부에서는 이번 JSC와 보강과의 합작이 성공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JSC에 공급되는 제품에 대한 면세조건을 강화해서 원가를 낮추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중국정부까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료스케는 감격하며 왕샹첸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이 사장님이 급하게 다시 일본을 찾을 정도라면 유리한 상황은 아니라고 봐야 되겠군요.”

    “다나카 사장님이 어떻게 분석을 하시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SHJ의 분석은 필패라고 보고 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의 회의실은 무거운 분위기가 깔리고 있었다. 경환은 화려한 화술로 희망 섞인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필패라는 말을 먼저 꺼냄으로써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미쓰비시중공업에 전달했다. 아사히는 예상외로 JSC의 전략이 먹히고 있는 상황이 불안했지만, 경환의 입에서 필패라는 말이 나오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SHJ의 제안을 받아들여 SHJ-화성플랜트에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이 정도로도 JSC를 이길 수 없다면, 우리가 SHJ와 합작을 한 의미를 상실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혹시라도 모를 실패의 책임소재를 SHJ에 넘기려는 아사히의 답변에 경환은 어이가 없었다. 경환의 표정이 급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코이치가 급히 아사히의 답변을 받았다.

    “아직 PQ서류도 제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 SHJ와의 합작에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SHJ는 이번 입찰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SHJ는 이 상황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 일본으로 온 것입니다. 결정은 다나카 사장님이 하십시오.”

    처음부터 회의는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코이치의 말대로 SHJ의 명성에 금이 가긴 하겠지만, 이번 입찰을 포기한다 해서 SHJ가 큰 타격을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SHJ가 빠진다면 실패의 모든 책임은 아사히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에 급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사과 드립니다. 그럼 SHJ는 JSC의 움직임에 어떤 대응책을 가지고 있습니까?”

    경환은 진심으로 하는 사과가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꼬투리를 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나카 사장님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우선은 현 상황을 정확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케우치 부장님이 보고를 해 주십시오.”

    이다나를 대신해 경환을 보좌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한 하루나는 급변하는 회의를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경환의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메모를 적어가는 하루나는 경환의 옆에서 회의를 주관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JSC는 KBR과의 합작을 통해 기술력을 한층 업그레이드하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또한, 일반 철 구조물의 중국 제작과 특히 막대하게 소요되는 중대형 파이프를 보강과 공급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원가를 혁혁히 줄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SHJ의 분석으로는 JSC의 입찰예정가를 19억 불에서 20억 불 상로 추산하고 있으며 미쓰비시중공업과의 차이는 많게는 2억 불 적게는 1억 불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하는 방안을찾지 못한다면 이번 입찰은 JSC가 수주할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아사히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입찰팀으로부터 최종 입찰가를 21억 5천만 불로 보고를 받아 놓고 있었기 때문에 21억 불까지는 따라갈 수 있었지만, 그 이하는 무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나카 사장님, SHJ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JSC의 들러리가 될지 아니면 JSC를 들러리로 만들지는 사장님이 결정하십시오.”

    그룹차원에서 이번 입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JSC의 들러리로 전락한다면 자신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 아사히를 괴롭히고 있었다. FPSO까지 실패한 마당에 알제리 프로젝트까지 놓칠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라면 SHJ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아사히의 동의를 받아낸 경환은 코이치를 향해 고개를 끄떡였고 코이치가 급히 서류를 미쓰비시중공업에 전달했다. 서류를 넘기는 아사히의 미간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코이치는 아사히의 표정변화를 무시하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미쓰비시중공업의 고비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공비용을 낮추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알제리에 진출해 있는 한국의 대후건설과의 합작을 제의하며, 특수강판을 제외한 일반 철판의 구매를 신일본제철에서 한국의 포항제철로 돌릴 것을 제안합니다. 또한, 일반 철 구조물 물량 전체를 제3국에서 제작해야 된다고 판단합니다. 이 제안이 수용된다면 1억 불 이상이 절감 효과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마지막 방안은 SHJ가 알제리 현지에 가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차후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입찰의 주체는 미쓰비시중공업이지만, 제안의 내용을 들여다본다면 속 빈 강정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아사히는 경환의 제안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JSC를 들러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보다 좋은 제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방안이란 게 뭡니까?”

    아사히가 한풀 꺾이자 경환은 아사히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현재 황태수 부사장이 한국에서 대후건설의 의사를 타진하고 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도 인원을 파견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내일 알제리로 넘어가 소나트락과 미팅을 할 예정입니다. 보안상으로 인해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으니 양해바랍니다.”

    무거운 분위기의 회의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