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다시 사는 인생 - 103
전체 회의를 마친 SHJ는 본격적으로 알제리 프로젝트 T.F팀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알제리 프로젝트는 국영 석유회사인 소나트락에서 발주한 정유단지와 가스채집단지 플랜트 입찰로 총 20억 불 규모였다. JSC 인수를 노리고 있는 경환으로서는 반드시 성공해야 될 입찰이었지만, 나이지리아가 대후건설의 텃밭이라면 알제리는 JSC의 텃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SHJ가 수주를 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JSC의 발 빠른 대응이 경환을 심각한 고민에 빠트리고 있었다.
“괜히 일본 최고의 플랜트기업이 아니었네요. 이렇게 발 빠르게 대응을 할지 몰랐습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경환은 코이치가 들고 온 입찰동향정보 문서를 넘기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JSC의 대응은 경환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낙찰가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안이하게 대처를 한 거 같습니다.”
알제리 프로젝트를 전담하고 있던 코이치는 자신을 자책하며 깊게 고개를 숙였지만, 경환은 그런 코이치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타케우치 부장님 덕분에 그나마 빨리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저 또한, KBR과 한 번은 부딪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SHJ와의 합작이 결렬되고 오히려 JSC의 최대 경쟁사인 미쓰비시중공업과 합작을 체결하자, JSC는 SHJ의 전략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KBR과 급히 합작을 추진하고 나섰다. FPSO 입찰 이후 소원해진 SHJ와 KBR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고 시작했고 JSC는 절묘하게 그 틈을 노리고 SHJ와 KBR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었다.
“알제리는 JSC이 텃밭인데다 KBR이라는 선 굵은 파트너까지 확보를 했다면 지명도에서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하겠군요. 원가분석은 어디까지 진행이 된 상태입니까?”
낙찰의 최대 관건은 좋은 기술력으로 누가 얼마나 싸게 입찰을 하느냐에 달려있었지만, 코이치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JSC는 설비제작을 제3국을 통한 아웃소싱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현재 기본 철 구조물을 중국에서 제작하기로 결정이 된 상태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일부 플랜트를 한국에 돌렸다고는 하지만, 많은 부분을 일본에서 제작하는 미쓰비시중공업과는 격차가 많다고 봅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마지노선인 20억 불까지 맞출 수 있다고 봅니까?”
20억 불은 JSC가 수주한 낙찰금액으로 20억 불 이하로 내리지 못한다면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이었지만, 경환의 질문에 코이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현실은 암울한 정도를 넘어 사방이 꽉 막힌 철벽에 놓인 상태였다.
“윌리엄, 제임스입니다. 알제리 프로젝트에 JSC와 합작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경환은 KBR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만에 윌리엄과 통화를 시도했다. FPSO의 성공으로 그룹 중역으로 승진한 윌리엄은 경환의 통화를 반기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제임스, 오랜만이네. 자네의 정보가 좀 늦은 모양이구먼. 북아프리카 진출은 우리 KBR의 숙원사업이기도 해서 JSC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네.’
비아냥거리는 윌리엄의 목소리를 확인한 경환은, KBR이 JSC의 합작보다는 SHJ와의 경쟁을 위해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윌리엄이 마음을 굳혔다면 구차하게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기업은 경쟁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KBR과의 경쟁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입찰이 끝나면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나도 자네와의 경쟁을 환영하고 있으니까. 회의가 있어 전화를 먼저 끊겠네.’
윌리엄은 잭이 자신을 떠난 후 모든 책임을 경환에게 돌리고 있었다. KBR 내부에서는 아직 SHJ와의 합작을 원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윌리엄은 자신의 직위로 이것을 눌러버렸다. 경환 또한, KBR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KBR의 강력한 경쟁사인 KENTZ와의 업무제휴를 통해 윌리엄의 행동에 맞대응을 하고 나섰다. JSC의 밥줄을 끊기 위해 나선 알제리 프로젝트가 KBR과의 경쟁으로 변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타케우치 차장님, KBR은 우리와의 경쟁을 선택한 거 같습니다. 우리의 대응전략은 수립하고 있으시겠죠?”
아무런 대책 없이 코이치가 자신을 찾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경환은 대응책을 물었고, 코이치는 따로 준비된 대응전략보고서를 경환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경환은 코이치가 건네 준 보고서를 천천히 넘기자 코이치가 구두로 설명을 시작했다.
“KBR과 JSC의 기술력이 합치게 된다면, 기본 싸움에서는 저희가 상대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또한, 현재로서는 원가 산정부분에서도 상대를 누를만한 여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된다고 판단합니다.”
경환은 코이치의 전략을 살피며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코이치의 대응전략은 미쓰비시중공업을 설득해야 된다는 점이 큰 문제였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고 경환은 생각했다. PQ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SHJ도 JSC와 KBR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기본전략은 이 보고서를 토대로 진행을 하기로 하고, 여기에 한가지 전략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이 방법이 먹힌다면 JSC의 허를 찌를 수 있다고 보거든요.”
경환은 급히 황태수를 호출했고, 세 사람은 점심도 거른 채, JSC와 한 팀이 된 KBR과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사무실 밖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야마시타 군, 본사 파견팀들이 요청한 자료는 보내주었나요?”
“네. 소장님. 출근하면서 호텔에 들러 전달을 해 주고 왔습니다. 그리고 파견팀들의 보고서는 10분이면 정리가 됩니다.”
마사토는 하루나의 빠른 일 처리에 만족을 하고 있었다. 사회경험이 많지 않았던 것을 우려해 하루나의 입사를 반대했지만, 하루나는 성실함과 빠른 업무습득으로 마사토의 우려를 불식시켜 버렸다. 더욱이 서구적인 미모와 능숙한 영어로 인해 본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은 하루나만 찾았고, 이로 인해 지원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어도 하루나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루나는 동경사무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소장님, 파견팀들의 보고서를 정리했습니다. 결재해 주시면 본사로 보내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그리고 조만간 사장님과 타케우치 부장님이 일본에 출장을 오실 거에요. 야마시타 군의 성실함을 내가 본사에 보고를 했으니, 좋은 소식을 기대해 봐요. 그리고 아직 다른 직원들은 모르고 있으니 당분간 우리 둘만 알고 있읍시다.”
과거 JSC의 동료들을 통해 KBR과의 합작 정보를 입수한 마사토는 곧바로 코이치에게 보고를 했었다. 이 보고로 인해 경환은 직접 마사토에게 전화를 걸어 고생했다는 말을 전했고, 경환의 치하에 고무된 마사토는 자신도 SHJ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생각에 감사하다는 말을 수십 번 한 후에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사장님은 어떤 분이세요?”
경환과의 전화통화를 되새기던 마사토는 하루나에게 웃음을 보여 주었다. 자신도 경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루나는 하키라에서 만났던 경환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하키라 마담의 스카우트제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처음 출근하는 자리에서 경환을 만났었다. 경환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그날로 하키라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가득했다.
“나도 한번밖에는 뵙지 못했지만, 타케우치 부장님이 고개를 숙일 정도의 분이시라면 대단한 분인 건 분명해요. 직원을 가족같이 생각하신다는 분이니 우리도 열심히 일해 봅시다. 나는 SHJ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있어요.”
마사토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하루나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일정이 나오면 바로 알려주세요. 호텔예약과 공항 픽업을 준비하겠습니다.”
“어? 야마시타 군, 공항 픽업은 준비하지 마세요. 사장님과 부장님은 알아서 사무소로 오실 거에요. 사장님 말씀대로 표현하자면 마중 나올 시간에 일이나 더 하라고 하신답니다. 이게 우리 SHJ의 원칙입니다.”
마사토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일본기업과는 다르게 권위를 따지지 않는 모습이 신선하게 하루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하루나는 다시 만나게 될 경환을 생각하며, 고이 간직하고 있던 백 불짜리 다섯 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경환이 알제리 프로젝트를 위해 고심을 하고 있을 때, JSC도 빠르게 움직여가고 있었다. SHJ는 이번 프로젝트를 실패한다 해도 KBR과의 경쟁에서 졌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뿐이었지만, JSC는 회사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국내 플랜트 경쟁에서 후발주자인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이조선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해외시장은 JSC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생명선이었다. KBR과의 합작을 성공시킨 료스케가 회장실에 들어서고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SHJ와의 전면전을 선포한 이후 케이스케는 료스케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자신의 대에서 JSC가 무너지게 놔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한 코이치가 자신의 품에서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한 케이스케로서도 료스케 말고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 KBR과의 합작은 잘 처리를 했다. 그러나 SHJ의 사장도 문제이긴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코이치란 사실을 기억하거라. 우리의 장단점을 코이치만큼 잘 알고 있는 놈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동안 코이치와의 비교 대상으로 자격지심에 빠져있던 료스케는 이번 기회야말로 자신의 사업가적인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충분히 준비를 했다고 믿고 있는 료스케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절대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경쟁은 비용을 얼마나 최대한 줄이느냐가 싸움의 관건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건 KBR도 동의를 하는 부분이고, KBR에서는 자신들의 이익 폭을 최소로 줄이겠다는 통보를 해 왔습니다. 우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일반 철 구조물은 전량 중국에서 위탁생산을 할 예정입니다.”
료스케의 전략은 흠 잡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케이스케는 마음 한구석에 쌓여가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어느 누구도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던 프로젝트를 SHJ는 보란 듯이 그런 예상을 뒤엎어버리고 경쟁사를 따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SHJ 하나만도 벅찰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후계자로 삼았던 코이치까지 SHJ에 합류해 있었다. 코이치를 통해 SHJ와의 합작을 추진하려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케이스케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KBR은 SHJ를 단순히 정보력에 의지에 입찰을 성공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말에 현혹되지 말거라. SHJ가 정보만 제공하는 기업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료스케 너는 지금까지 SHJ가 참여한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고 SHJ의 대응전략이 무엇일지 연구해 봐야 할 거다.”
료스케는 아직도 백 퍼센트 신뢰를 주지 않는 케이스케가 못마땅했지만, 이번 입찰이 끝나기 전까지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입찰을 성공으로 이끈 후 자신에 동조하는 주주들과 함께 경영권을 손에 넣을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SHJ나 코이치도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말씀대로 우리의 전략과 SHJ의 대응전략을 다시 분석해 보겠습니다. 회장님의 걱정이 무엇인지 저도 잘 알고 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의 높은 생산원가를 어떤 방법을 쓴다 하더라고 SHJ가 절대 풀지 못할 것입니다. 아울러 중대형 파이프를 중국에서 공급받기로 결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비용차이는 더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중국은 90년대 중반부터 철강산업을 집중육성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동북의 안강(AN STEEL)과 상해의 보강(BAO STEEL)이었고, 이 두 곳은 세계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저가로 제품을 풀고 있었다. 질이 떨어진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료스케는 철 구조물과는 별도로 중대형 파이프까지 두 곳과 공급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미쓰비시중공업과의 비용차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료스케는 SHJ가 날고 긴다 해도 이 차이를 메울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흠, 료스케 네가 이번엔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본다. 생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거라.”
자신도 이런 상황에선 마땅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은 하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불안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