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02화 (79/264)

#102

다시 사는 인생 - 102

황태수와 코이치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 SHJ는 본격적으로 알제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나섰다. 우선 T.F 팀을 구성하여 미쓰비시중공업의 설계와 입찰부서에 파견함과 동시에 알제리 현지에도 급히 인원을 보내 발주처의 동향과 관련정보를 입수하도록 하였고 동경사무소로 하여금 JSC의 움직임을 파악하도록 조치해 놓았다. 황태수가 쿠웨이트와 사우디 입찰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알제리 프로젝트는 부장으로 승진한 코이치가 전담하고 있었다.

경환은 한국의 CDMA 상용화 성공이 예상되는 내년을 준비하기 위해 해외에 주재하는 사무소장급 이상의 직원들을 본사로 불러들여 SHJ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전체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아직은 SHJ의 규모가 점차적으로 커지고 있어 그룹경영을 하기 전 본사와 해외거점들 간의 체계를 확립할 필요를 느끼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내년 2월 한 달 기간으로 여행을 떠날 것을 대비해 업무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숨겨져 있었다.

북경사무소의 김창동을 비롯해 SHJ-화성플랜트의 박화수와 최승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코이치는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동경사무소의 마사토와 함께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국적을 떠나 SHJ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SHJ의 미래를 보는 것처럼 하나같이 자신감에 차있었다. 경환이 황태수와 린다와 함께 자리에 착석하자 소란스러웠던 장내는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우선 사장님께서 한 말씀하시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최석현이 회의 시작을 알리자 참석자들은 경환의 주목했고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해온 직원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오카다 과장은 저를 처음 보지요? 너무 긴장하는 건 건강에 해롭습니다.”

“네?”

“하하하.”

느닷없이 자신을 지목할 줄 몰랐던 마사토는 얼굴을 붉어졌고 경환의 농담에 회의장은 일순간에 웃음바다로 변하기 시작했다. 무거울 수도 있는 분위기를 푼 경환은 말을 이어갔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SHJ를 위해 고생하시는 여러분들의 노고에 먼저 감사를 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SHJ는 여러분들과 함께 바닥을 기어가며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내년은 우리 SHJ에게 뜻 깊은 한 해가 될 것이며, 여러분들과 함께 내년을 준비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SHJ는 절대 여러분들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SHJ의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해 주시길 바라며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더욱 성장을 하고 싶습니다.”

참석자들은 경환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로 경환의 연설을 환영했다. 경환이 자리에 앉자 SHJ의 재무와 관리를 맡고 있는 어스틴이 단상에 올랐다.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재무와 관리 팀장을 맡고 있는 어스틴 스미스 차장입니다. 올 8월까지의 본사 자금현황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총 매출은 1억 8천만 불로 이 중 1억 2천만 불을 투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홍콩법인에서 투자된 금액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입니다. SHJ-화성플랜트 또한, 총 매출에는 포함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면세기간이 내년에 종료되고 회사의 규모가 커질 것을 대비해 해외법인들의 재무 투명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각 해외법인에서는 본사의 방침에 준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총 매출의 65%에 해당하는 금액을 투자로 돌리고 있다는 보고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성산업의 인수자금과 퀄컴의 재투자 3천만 불을 투자한 홍콩법인의 자금까지 포함한다면 1억 5천만 불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하고 있었다. 경환이 눈짓을 보내자 린다가 단상에 올라섰다.

“여러분들도 놀랄 정도로 엄청난 돈을 잡아먹고 있는 린다 쿡입니다.”

투자를 전담하고 있는 린다가 죽을상을 지으며 농담을 하자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컨설팅에서 벌어오는 돈을 뿌리고 있는 중입니다. 저희 투자부서에서는 퀄컴에 8천만 불을 투자하여 지분 20%와 한국의 로열티 40%를 확보했습니다. 또한, IT산업 중에서 소프트웨어에 8천만 불을 현재까지 투자를 하고 있으며, 내년 상반기까지 5천만 불을 추가로 투자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뚜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고 있지만, 향후 IT산업의 폭발력은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이상이 될 거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좀 더 지켜봐 주시고, 컨설팅 부서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다 주십시오.”

“하하하.”

농담으로 시작해 농담으로 끝낸 린다의 답변은 자칫 무거울 수도 있었던 분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린다의 말을 이어받은 황태수가 어려운 짐을 자신에게 넘겼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단상에 올랐다.

“컨설팅 부서를 담당하는 황태수입니다. 쿡 부사장의 말대로 열심히 돈을 벌어 오겠습니다. 작년에 성공한 FPSO 이후 지금까지 총 7억 불 규모의 입찰을 성공했습니다. 또한, 올해 말까지 알제리 프로젝트를 비롯해 총 35억 불 규모의 입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컨설팅은 한계가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동의를 하실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사에서는 투자에 집중함과 동시에 컨설팅 업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본사의 방침을 믿고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황태수의 말을 끝으로 북경사무소를 시작으로 SHJ-화성플랜트, 막 설립된 동경사무소의 업무보고가 내년도 사업계획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해외법인들의 보고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경환은 맨주먹으로 시작해 삼 년 만에 연 4억 불이 넘어가는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한 SHJ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하고 있었기에 경환은 꿈은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오랜 회의가 끝나고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회의내용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경환은 김창동과 함께 황태수와 린다를 조용히 불러들였다. 다른 직원들은 마다하고 자신을 불러들이자 김창동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부장님, 제대로 본사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생만 하게해 정말 미안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한국에서 김밥을 말고 있었을 겁니다. 앞으로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경환은 그런 김창동이 고마웠다. 경환이 컨설팅과 투자에 매진하기 시작하면서 북경과 홍콩법인은 오로지 김창동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김창동은 아무런 불평 없이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해 왔다.

“집사람이 사모님이 온다고 하니 잠을 설치더군요. 이번 기회에 미국 여행도 하시면서 푹 쉬다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장님. 염치불구하고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경환은 김창동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식구들의 동행을 지시했다. 이건 수정의 베개송사도 한 몫을 했지만, 이 정도의 혜택은 경환으로서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장성궈의 비자금이 항상 마음에 걸립니다. 이제 SHJ가 세계시장에 발을 내밀고 있는 지금,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재 북경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북경사무소는 SHJ의 든든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경환은 장성궈의 비자금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투자의 성과가 내년부터는 나타나기 때문에 경환은 이쯤 해서 장성궈와의 인연을 정리하길 원하고 있었다.

“저도 불안한 건 사실입니다. 많은 금액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장성궈는 5천만 불 정도는 항시 남겨놓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민은행 총재인 주룽지에게 힘이 쏠린다는 점입니다.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우고 있는 주롱지가 정권의 정면에 등장하게 된다면 왕샹첸과 장성궈가 첫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경환의 걱정도 김창동과 다르지 않았다. ‘관 101개를 준비해라. 그 중 하나는 내 관이다’라는 말로 98년 혜성같이 등장하는 주룽지는 공안과 군부의 경제활동을 차단하고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며 경제사범들을 처단하는 인물이었다. 중국의 부동산 시장에 투자를 할 생각이었던 경환이었지만, 장성궈와 왕샹첸의 도를 넘는 욕심이 경환의 계획을 수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연탄 사업을 서서히 한국 기업에 넘겨주고 내년 중으로 손을 털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비자금은 제가 장성궈와 담판을 짓겠습니다. 내년 중으로 북경사무소는 화동과의 업무를 종결하도록 추진을 해 주세요.”

김창동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경환의 느닷없는 결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연탄 업무가 종결된다면 북경사무소의 존재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더 이상 중국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와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김창동의 고민을 이해하고 있었다.

“부장님도 아시겠지만, 오성전자의 휴대폰 단말기의 북미판권을 우리가 확보했습니다. 저나 두 분 부사장님이나 유통업에 대한 경험이 없다 보니 판로개척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제가 부장님께 중국에서 십 년을 약속 드렸지만, 아무래도 부장님이 이 일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북경사무소가 정리되시면 바로 미국으로 들어오십시오.”

경환의 제의에 김창동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끝까지 함께 가자는 경환의 말은 믿고는 있었지만, 미국 본사에서 일을 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않았다. 자신을 위한 경환의 배려란 걸 알고 있었지만, 김창동의 마음엔 불편함이 있었다.

“사장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북경사무소를 정리하게 되면 직원들이 걱정입니다. 그래도 SHJ의 이름으로 고생을 함께 해온 직원들이라 서요.”

“그건 제가 말씀 드릴게요.”

린다가 경환을 대신해 김창동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

“부장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SHJ는 직원을 버리지 않습니다. 북경사무소의 직원이 12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SHJ와 함께하길 희망하는 직원이라면 모든 직원들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한국의 SHJ-화성플랜트와 부장님이 맡으실 유통업으로 분리하셔서 정리를 해 보세요. 혹시라도 중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직원이 있다면 제일 그룹으로 재취업을 유도하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경환은 중국인에 대한 신뢰는 많지 않았다. 애사심이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회사의 이익은 가볍게 버리는 중국인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도 김창동을 버리지 않고 함께한 직원들이라면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급격히 정리를 시작하면 왕샹첸과 장성궈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제일 그룹과 물밑접촉을 통해 이슈를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김 부장님의 의견이 타당한 거 같습니다. 본격적인 작업은 내년 초부터 진행을 하시고 제일 그룹과는 접촉을 시작하십시오. 저는 내년 3월쯤 북경에 들어가 장성궈와 담판을 짓겠습니다.”

아직 먹을 게 남은 중국이었지만, 더 이상 욕심을 부렸다가는 왕샹첸과 장성궈와 함께 도매 급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사실 여기에서 정리를 한다 해도 이미 중국의 안전부에는 SHJ의 자료가 남아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장성궈와의 인연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한 후에야 경환은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정우야, 아빠 오셨다.”

“아빠바, 아바.”

수정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막 걷기 시작한 정우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낑낑거리며 경환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경환은 수정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정우를 힘껏 안아 올렸다.

“우리 정우. 엄마하고 잘 놀았어?”

“아빠바, 어마마.”

한참 말을 배우고 있어서인지 정우는 쉴 새 없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알아듣지는 쉽지 않았다. 정우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계속 가리키고 있었고 경환은 정우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우가 가리키는 하얀색의 벽은 정우의 작품인 듯 한 추상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햐, 엄마 아들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이네. 잘 그렸어 정우.”

경환은 정우의 볼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자 정우는 기분이 좋은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수정은 관리사무소에서 트집을 잡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걱정 마, 비용을 좀 주더라도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벽에는 정우가 그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게 벽지를 붙이면 될 거야. 그건 그렇고 오늘 인준이 엄마 만나서 좋았어?”

학교를 졸업하고 가정주부의 일에 매진하고 있던 수정은 어려웠던 북경시절 자신에게 큰 위안을 주었던 김창동의 아내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나갈 생각도 못하고 집에서 수다만 떨었어요. 내일은 허먼 파크에 가기로 했어요. 고마워요. 자기.”

수정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경환에게 달려들어 뽀뽀를 하며 애교를 부렸고 경환도 그런 수정의 애교가 싫지 않았다.

“정우를 빨리 재워야 할 거 같은데?”

정우는 엄마와 아빠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만 껌뻑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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